與 ‘인내’ 끝에 승리 - 野 선거법 지연·‘선거버스터’…‘득보다 실’ 커

▲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가 필리버스터 마지막 주자로 나서서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을 내리게 된 것과 관련해 책임을 느낀다며 사과하고 있다. 사진 / 원명국 기자
지난 2일 39번째 주자로 나선 이종걸 원내대표의 12시간 31분에 걸친 역대 최장 무제한 토론을 끝으로 9일간의 ‘필리버스터 사태’는 겨우 마무리됐다.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을 막기 위해 47년 만에 국회에 다시 등장한 필리버스터는 테러방지법에 대한 일부 관심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 측면도 있지만 이를 주도했던 더불어민주당 스스로 총선에 미칠 악영향 등을 의식해 스스로 중단했다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총선 전략의 수단이었음을 반증하기도 했다.
 
심지어 필리버스터에 동참한 박영선 의원의 경우 테러방지법 관련 사항만 토론해야 하는 자리에서 더민주에 대한 총선 지지를 읍소해 여당에선 이번 필리버스터를 진정성 없는 총선 홍보 쇼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특히 새누리당은 야권의 필리버스터를 국정 발목잡기로 규정하고 발언 내용에 있어서도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법적 대응에 나설 것임을 예고해 앞으로 이를 두고 여야 간 일어날 파장도 주목되고 있다.
 
◆ 필리버스터 촉발시킨 뜨거운 감자, ‘테러방지법’
 
테러방지법 일부 조항을 놓고 필리버스터로 여당을 압박해 수정하려던 야당의 계획은 지난 2일 필리버스터 중단으로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주자인 이종걸 원내대표의 필리버스터 종료 뒤 재개된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은 홀로 남아 반대표를 던진 국민의당 김영환 의원을 제외한 야당 의원들 전원이 반대의 의미로 퇴장한 가운데 새누리당이 찬성 156표를 던져 통과시켰다.
 
이번에 통과시킨 법안은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발의한 뒤 지난달 23일 같은 당 주호영 의원이 본회의장에서 수정한 것으로 테러위험인물을 추적할 경우 사전 혹은 사후에 국무총리에게 보고한다는 내용을 추가시켰다.
 
그럼에도 야권은 무분별한 사찰 가능성이 여전히 크다며 수정안을 요구했는데, 그 중에서도 테러방지법 2조에 명시된 ‘테러위험인물’과 ‘대테러 활동에 필요한 정보 조사’의 범위가 보다 명확하게 규정돼야 자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 삼은 부분은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규정 중 ‘테러단체의 조직원이거나 테러단체 선전, 테러자금 모금·기부 기타 테러 예비·음모·선전·선동을 하였거나 하였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에서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란 문구인데 야권은 이 부분을 좀 더 보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테러위험인물로 지정될 경우 동법 9조에 의거 출입국·금융거래 정지는 물론 해당 인물의 통신이용 관련 정보가 수집되게 된다는 점에서 확실히 ‘테러위험인물’의 범위를 한정하지 않을 경우 정보기관이 ‘테러 방지’ 명분을 내세운다면 어느 누구의 개인정보나 인권도 침해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 야권 주장의 골자다.
 
아울러 국정원의 탈법을 우려해 인권보호관 제도를 도입키로 했으나 법안에 명시된 인권보호관 1명만으로 국정원에 대한 실질적 감시가 이뤄지기 어려우며 테러방지법 7조에 명시된 ‘관계기관이 보안을 주장할 경우’엔 인권보호관의 활동이 사실상 제약을 받게 된다는 부분도 쟁점화 돼 왔다.
 
이 뿐 아니라 야당은 국정원에 두려던 대테러방지기구를 국무총리 산하에 놓고 위원회 형태로 운영하게 됐음에도 이 위원회가 기획·조정 업무만 담당하는 기구인데다 대테러센터장에 국정원장을 임명하게 될 경우 총리실 산하에 두는 취지가 무색해진다며 국정원장을 대테러센터장에 임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반면 새누리당은 이 같은 야당의 주장에 대해 지난 3개월 동안 야당이 요구한 내용을 충분히 반영했다며 더는 손댈 수 없다는 입장을 관철했다.
 
앞서 지난 19일 새누리당은 정보수집권에 대해선 원안 그대로 국정원에 부여하되 대테러센터는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무총리실에 두기로 했으며 국정원의 월권을 방지하기 위해 권한 오남용 시 2년 이상 형사 처벌하는 조항을 추가했다.
 
특히 무고나 날조 등에 대해선 가중처벌 조항까지 둬서 야권의 우려를 불식시켰다는 게 여당의 주장이다.
 
또 국정원이 통신회사나 금융정보분석원에 개인정보를 요청하게 되면 서류로 기록이 남을 뿐 아니라 국무총리실 산하 대테러센터로 해당 서류가 넘어오기 때문에 국회가 충분히 감시할 수 있다며 정보수집권을 국정원에 부여하는 데 대해서도 문제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 국회 정보위원회 여당 간사인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은 “통신감청과 계좌추적 대상은 법률이 정하는 테러위험인물에 한정되며 내국인은 50여명 가량에 불과하다”면서 “국정원이 직접 감청설비로 감청하고 금융계좌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통신사와 금융거래분석원으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아 열람하는 것”이라고 확인한 바 있다.
 
이처럼 새누리당에선 국정원의 권한 남용을 막을 제도적 장치가 충분히 마련됐다며 또 수정하다간 결국 ‘테러방치법’이 돼버리기에 더는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렇듯 여야가 일부 쟁점 사안을 놓고 첨예하게 맞서게 되자 더 이상의 카드가 없던 더불어민주당에선 이종걸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필리버스터를 추진했고 선거법을 처리키로 양당이 약속했던 지난 26일 본회의도 야권이 필리버스터를 강행해 그대로 넘겨 버리면서 선거법 처리 지연이란 오명을 스스로 떠안게 됐다.
 
이에 반해 여당은 야당의 요구를 일축하고 더 이상의 수정 없이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게 됨으로써 필리버스터로 여론전에 호소하려던 야권의 압박 전략을 무력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새누리당 김정훈 정책위의장은 지난 2일 필리버스터에 대해 “법이 통과되면 모든 휴대전화를 도청할 수 있고 금융계좌를 다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등의 허위 사실을 너무 많이 유포해 국정원의 국제적 신뢰를 추락시키고 국민을 쓸데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며 “야당의 허위사실 유포가 잘못됐다는 점을 국민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 필리버스터가 끝나도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야권을 압박하고 나섰다.
 
◆ 필리버스터 평가, 與 “선거버스터” - 野 “테러방지법 공론화”
 
▲ 더민주 박영선 비대위원은 1일 자신의 필리버스터 연설 도중 필리버스터 중단은 총선에서 이기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강변한 뒤 “(필리버스터 중단에 대한) 모든 분노의 화살은 저에게 쏴 달라. 대신 여러분이 분노한 만큼 총선에서 야당에 표를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사진 / 원명국 기자

한편 필리버스터 장기화가 총선 승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임을 우려해 ‘필리버스터 중단’을 요구한 더민주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뜻을 받아들여 지난 1일 의총에서 이 원내대표가 필리버스터 중단 방침을 공식화하면서 2월 임시국회를 넘길 뻔 했던 법안들은 겨우 처리될 기회를 얻게 됐다.
 
그런 점에서 일단 이번 필리버스터 정국의 승자는 새누리당으로 꼽히고 있고, 야권은 테러방지법의 일부 독소조항을 알리는 한편 지지층 결집을 이끄는 데 필리버스터가 어느 정도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자평하지만 여당의 주장대로 ‘선거버스터’로 변질됐다는 비판에선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특히 여당의 이런 주장을 확인시켜준 것은 김 비대위 대표와 함께 필리버스터 중단을 강력히 역설해왔던 박영선 비대위원인데, 그는 자신의 필리버스터 차례가 되자 연설 도중 필리버스터 중단은 총선에서 이기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강변한 뒤 “(필리버스터 중단에 대한) 모든 분노의 화살은 저에게 쏴 달라. 대신 여러분이 분노한 만큼 총선에서 야당에 표를 달라”고 노골적으로 표 구걸을 해 빈축을 샀다.
 
테러방지법 일부 조항의 인권 침해 가능성을 우려해 시작했다는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박 비대위원 스스로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 중단’했다고 밝히면서 그간 지속했던 필리버스터의 저의가 사실상 총선 전략의 일환이었음을 자인한 셈이 돼 그 취지와 명분마저 퇴색해 버렸다.
 
이를 지켜본 여당 의원들의 냉소적인 반응은 야권이 보여준 이번 필리버스터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는데,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2일 “기어코 필리버스터를 이용해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며 “우리가 주장했던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총선을 위한 선거버스터였음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라고 꼬집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초기에 전통적 야권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를 냈음에도 이른바 총선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더민주 지도부가 결국 필리버스터를 중단했는데, 이를 두고 지난 2일 필리버스터 종료와 관련해 실시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필리버스터 중단을 잘했다(39.4%)는 의견보다 잘못했다(44.4%)는 의견이 더 많아 야권은 이번 필리버스터 정국으로 ‘득보다 실’이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시사포커스 / 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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