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국정원, 정보수집권 부여’ 직권상정하자 野 ‘무제한 토론’으로 맞서

▲ 24일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새누리당의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처리를 막기 위해 세번째 필리버스터 연설자로 나서 10시간 18분이라는 국내 최장 필리버스터 연설 기록을 세웠다. 사진 / 원명국 기자
여야 간 일부 조항에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지난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에 의해 테러방지법이 결국 직권상정되자 이에 반발한 야당이 표결 처리를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로 맞서면서 또 다시 국회가 끝 모를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무제한 토론’이란 의미의 필리버스터는 소수가 다수의 독단을 방지하고자 의도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로 법에 명시된 합법적 거부권 행사 행위인데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도 제도화돼 시행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가 주도해 진행된 이번 필리버스터는 지난 2012년 18대 국회에서 ‘국회선진화법’이 입법화되며 재도입된 이래 19대 국회 첫 발동 사례로 지난 1973년 폐지됐던 시점부터 되돌아본다면 43년만에 처음 이뤄진 셈이다.
 
우선 더민주는 테러방지법에 포함된 국정원에 대한 정보수집권 부여 조항이 일반인 사찰 가능성을 안고 있는 만큼 새누리당이 이를 수정한다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고 법안 처리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새누리당 역시 절대 양보할 수 없다며 대치하고 있어 이런 국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다만 더민주도 자신들이 조속한 처리를 강조해온 선거구 획정안을 매듭지어야 하는 만큼 당장은 여야가 기존 합의했던 26일까지 필리버스터가 이어질 것으로 일각에선 예견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 2월 임시국회가 마무리되는 내달 11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진행할 수도 있어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 與 직권상정에 野 최후 카드로 ‘필리버스터’ 뽑아
 
20대 총선을 두 달도 안 남긴 시점에서 지역구 챙기기도 바쁜 현역 의원들이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을 막고자 필리버스터에 속속 동참하면서 세간의 관심 역시 이 생소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상황에 집중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야권이 정치적 부담을 안고 필리버스터를 감행하게 된 이유는 외형상 여야 합의를 이루지 않고 의장의 직권상정으로 강행처리하려고 했다는 건데 실질적으로는 해당 법안 세부 내용에 있어 국민인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부분 때문이다.
 
즉, 테러방지법 통과로 국정원에 정보수집권이 합법적으로 부여될 경우 이를 구실로 국민에게도 과거처럼 무차별 도감청을 벌일 수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새누리당은 테러 방지를 위해선 부득이한 조항이라며 맞서고 있다.
 
또 양측은 사실상 컨트롤타워라고 할 수 있는 대테러센터를 어디에 두는지를 놓고도 이견 차를 보였는데 새누리당은 국정원에 두자는 입장을 고수해오고 있으나 야당은 국무총리실이나 국민안전처에 둬야 한다고 주장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처럼 양측 논의가 지지부진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청와대의 압박을 받은 새누리당에서 먼저 대테러센터는 야당 안대로 국무총리실에 두고, 정보수집권은 여당 안대로 국정원이 갖게 하자는 타협안을 야권에 제시했는데 정보수집권이 국정원에 부여된 이상 의미 없는 얘기라며 야권이 불응하자 여당은 결국 여야 합의를 포기하고 직권상정해 처리키로 방침을 정했다.
 
그간 여야 합의에 방점을 두던 정의화 의장마저 23일 끝내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에 돌입하자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는 더불어민주당은 최후 저지 카드로 필리버스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본회의 직전 열린 더민주 의원총회에선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도발로 현재 한반도가 안보위기 상황이란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중론으로 자리 잡은 데다 총선을 앞두고 ‘의사진행방해’라는 형태로 ‘발목잡기’ 이미지가 굳어지면 당선에 이로울 게 없다는 생각을 가진 다수의 의원이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는 국민 정서를 무시할 수 없다”며 우려를 표명해 이를 강행한 이 원내대표 입장에선 ‘필리버스터 카드’로 정치적 부담도 떠안은 셈이 됐다.
 
그럼에도 더민주 뿐 아니라 정의당과 국민의당 일부 의원들도 더민주가 주도하고 있는 필리버스터에 동참해 직권상정은 저지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는데 우선 더민주는 소속 의원 108명을 대상으로 하루에 5명으로 조를 편성해 릴레이 방식으로 나가겠다는 방침인데 반해 정의당이나 국민의당은 필리버스터 동참 여부를 의원 개인 의사에 맡기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전날(23일) 새누리당 의원들 대다수가 본회의장을 퇴장하는 와중에 더민주 김광진 의원이 첫번째 주자로 나서서 5시간 33분에 걸쳐 발언을 이어가 과거 박정희 정권 시기였던 1964년 4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일회담 내용 발설로 구속위기에 처한 동료의원을 구하기 위해 5시간 19분에 걸친 필리버스터로 기네스에까지 올랐던 기록을 경신했다.
 
두 번째로 나선 국민의당 문병호 의원이 1시간 49분간 발언을 이어간 뒤 세 번째 발언자로 더민주 은수미 의원이 24일 오전 2시30분 단상에 올랐는데 무려 10시간 18분에 걸쳐 발언하며 종전 국내 최장시간 필리버스터로 기록됐던 1969년 8월 신민당 박한상 의원의 3선개헌 저지 연설(10시간 15분) 시간을 경신해 야당의원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특히 필리버스터 발언동안에는 화장실도 갈 수 없는 등 단상을 절대 떠날 수 없어 장시간 연설은 결코 쉽지 않은데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김광진 잘했다!, 은수미, 눈물로 마친 10시간 18분. 감동!”이라며 이를 극찬했고, 이종걸 원내대표도 이날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국민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필리버스터에 폭발적으로 성원해주고 있다”며 여론몰이에 나섰다.
 
그러면서도 이 원내대표는 ‘국정 발목잡기’란 시선을 우려했는지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테러방지법에 담긴 국정원의 국민 인권침해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라며 “국정원이 테러방지를 위한 불명확한 사유만 있으면 긴급 감청을 통해 무제한 잠금장치를 풀고 이메일, 문자, SNS에 접근할 수 있는 국민 최후의 인권을 유린할 가능성이 있다”고 거듭 반대 이유를 분명히 했다.
 
또 그는 전날 직권상정을 단행한 정 의장에 대해서도 “직권상정 요건은 전시에 준하는 비상사태인데도 의장은 전시 또는 사변,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를 현 사태로 보고 직권상정했다”며 “배후에 박 정권의 압박이 놓여있다. 박근혜 정부의 폭주에 정 의장마저 동조한 것은 대단히 유감”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 黨靑 “‘필리버스터’, 기막힌 현상…선진화법은 망국법”
 
이처럼 최후의 카드인 필리버스터를 통해서라도 직권상정만은 막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더민주에 대해 정부여당은 한 목소리로 맹비난을 퍼부었다.
 
먼저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주재한 제8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직권상정을 통한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아선 야당의 필리버스터 행위에 대해 “정말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 생각한다”며 “여러 (테러 관련) 신호가 지금 우리나라에 오고 있는데 그걸 가로막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냐”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사회가 불안하고 어디서 테러가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경제가 발전을 할 수 있겠냐”면서 “많은 국민이 희생을 하고 나서 통과를 시키겠다는 얘기인지”라고 야당의 행태에 불쾌감을 표했다.
 
▲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2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필리버스터 기네스 기록을 경신한 김광진 의원과 관련해 전날 김 의원측이 지역구민들에게 문자를 보내 필리버스터 중인 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며 테러방지법을 문제삼는다는 진정성보다 오히려 총선을 의식한 행위 아니냐고 비판했다. 사진 / 원명국 기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도 야당의 필리버스터 행위를 질타했는데 그는 같은 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중진연석회의 직후 기자들에게 “선진화법이 얼마나 망국법인지 스스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라며 필리버스터를 합법으로 명시한 국회선진화법에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또 김 대표는 향후 대응책과 관련,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동의해야 필리버스터에 대한 중단이 가능한 만큼 “저지할 방법이 없지 않느냐”면서도 야당이 모든 의원을 동원한다면 2월 회기가 끝나는 3월 10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이어가 법안 처리를 무산시킬 수는 있겠지만 오는 26일 선거구 획정안 처리가 있는 만큼 결국 스스로 중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그는 필리버스터가 총선에 미칠 영향과 관련, “(야당에) 마이너스 영향을 줄 것”이라며 더민주가 ‘자승자박’의 처지에 처할 것이라 예견했다.
 
같은 당 이철우 의원 역시 이날 오전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야당의 필리버스터 행위에 대해 “국회법에 따라 하기 때문에 제재방안은 없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면서도 “3월 10일까지 회기인데 회기가 계속되는 동안 필리버스터를 하면 다음 회기에는 바로 상정돼 처리한다. 시간의 문제지 처리되는 건 틀림없다”고 법안 처리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또 새누리당은 국정원이 테러방지법을 내세워 무차별 도감청으로 국민인권을 침해할 것이란 야당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는데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오전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무차별적이 아니라 국제 테러단체와 연계된 인물로 한정돼 추진되는 것”이라며 “국정원이 야당과 시민단체 뒷조사를 위해 권한을 남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데 이를 반영해 총리실 소속 대테러대책위에 인권보호관 제도를 도입키로 했다”고 보완책까지 설명했다.
 
이번 필리버스터의 직접적 원인이 된 ‘직권상정’을 감행한 정 의장도 이날 오후 국회에서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와 국민의당 주승용 원내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선거도 치러야 하는데 저렇게 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를 하면 큰 일”이라며 우려를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원 원내대표도 “필리버스터 정국은 결자해지 차원에서 더민주가 해결해야 한다”며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고 안보위기에서 불안을 씻어낼 테러방지법을 처리하는데 동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더민주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는 전날 오후 국회에서 필리버스터가 진행 중인 와중에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무제한 토론은 쉽게 안 끝날 것”이라며 “다음달 5일, 10일까지도 할 수 있다. 시간을 정해두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바 있어 이번 사태가 언제까지 장기화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시사포커스 / 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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