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영화가 개봉했다. 스타 감독 강우석이 연출을 맡고 국민배우 설경구, 안성기에 허준호, 정재영 등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70년대 실제 존재했던 684부대의 이야기를 다뤘다. 1999년작 <쉬리>나 2000년작 <공동경비구역 JSA> 등 이후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가 꾸준히 성공가도를 달리기는 했지만 이 영화의 흥행 속도는 유독 경이로웠다. 이 영화는 개봉 11일만에 최단 기간 300만을 돌파했고 39일만에 <친구>의 818만을 돌파하는 등 흥행 면에서 모든 기록을 새로 쓰고 당시 역대 최대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개봉 45일 만에 900만을 돌파한 이 영화는 개봉 58일째 결국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천만 영화로 등극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수작으로 꼽는 <실미도>의 얘기다.
 
<실미도>가 ‘천만 영화’의 첫 테이프를 끊은 뒤 한국 영화계의 파이는 급속도로 커졌다. 이듬해 <태극기 휘날리며>가 39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실미도>의 기록들을 다시 갈아치웠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왕의 남자>가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 지평을 열었다. 2006년에는 <괴물>이 천 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매 해 천만 영화가 나왔고 모든 작품들은 대중성과 작품성 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들이 천만 관객을 동원할 자격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고 <실미도> 이후 ‘천만 영화’라는 타이틀은 상업영화에 붙이는 최고의 타이틀이 됐다.
 
하지만 현재 ‘천만 영화’의 무게감은 당시와 다르다. 영화 시장이 성장하면서 함께 덩치를 불린 멀티플렉스 자본은 ‘천만 영화’의 위상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에 있다. 멀티플렉스들이 자사 계열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상영관 수를 밀어주는 방법으로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빼앗고 작품의 가치에 비해 과도한 관객수를 동원한다는 소위 ‘스크린 독과점’ 논란은 어느새 영화 시장의 주요한 화두가 됐다.
 
<괴물> 이후 3년 만에 탄생한 ‘천만 영화’는 2009년작 <해운대>다. 우리나라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는 참신한 소재와 설경구, 하지원이라는 스타 배우의 등용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스토리와 엉성한 CG 등에 대해 혹평에 가까운 감상평을 내놓는 관람객들이 적지 않아 <해운대>에 관한 평가는 앞서 천만 고지를 달성했던 영화들에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2012년 역대 6번째 국산 첫만 영화로 이름을 올린 <도둑들>부터는 스크린 독점 논란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도둑들>은 역대 최초로 1000개가 넘는 스크린을 확보했고 같은 해 <광해, 왕이 된 남자>도 같은 길을 걸었다. 이후 2013년 <7번방의 선물>과 <변호인>, 2014년 <명량>과 <국제시장>, 그리고 지난해 <암살>과 <베테랑>까지 어느 작품이든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겪지 않은 영화가 없다. <괴물> 이후부터의 천만 영화들은 모두 아직까지도 천만 영화의 자격이 있는지 논란에 심심찮게 휘말리고 있다.
 
현재 차기 ‘천만 영화’로 거론되는 <검사외전>도 앞선 논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검사외전>은 설 연휴 기간 동안 관객을 쓸어담으며 이번 주말 800만명 돌파가 예상된다. ‘대박’이 확실하지만 <검사외전>은 하루 최대 1806개의 스크린을 장악했고 연휴 기간 동안 1만회 가까이 상영됐다. 흥행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고 재미와 감동에 비해 흥행 스코어가 과도한 것 같다는 비판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한 극장의 <검사외전> 상영시간표를 본 한 누리꾼이 “고속버스 시간표인 줄 알았다”고 혀를 찬다거나 경쟁작인 <쿵푸팬더3>의 아이맥스 상영이 갑자기 취소되고 <검사외전>이 그 자리를 꿰찼다거나 하는 얘기들이 들려올 때면 씁쓸함이 느껴진다.
 
제한된 스크린 수를 감안하면 한 작품의 스크린 독과점은 다른 많은 작품들의 기회 상실을 의미한다.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작들이 스크린 독과점 논란 속에 쓸쓸이 퇴장했다. 대기업들의 멀티플렉스 자본의 ‘장난질’이 심해지면서 2014년 말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지만 논란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과도해지는 느낌이다.
 
소비자들의 선택권 측면에서도, 한국 영화 스스로의 위상 측면에서도 스크린 독과점은 영화계의 미래를 당겨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 ‘천만 영화’ 중에서도 역대급 명작으로 꼽힐 만한 영화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크린 독과점 논란과 결부되는 순간 해당 작품의 흥행 성적은 폄하되기 일쑤고 관람객들의 선택의 가치 또한 평가절하되기 마련이다. 국민들의 대표적인 여가생활이자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잡은 한국 영화가 언제까지나 현재의 부흥기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제는 정부가 1회성 제재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나서 백년대계를 마련해야 한다. 영화계에 살고 있는 스크린 괴물에 대한 통제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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