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권패 촌극 팬들과의 약속 잊었나

16강 진출에 실패한 뒤 축구 관계자들은 K-리그의 부활만이 한국 축구가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다고 수차례 밝히고 있다. 이런 일련의 주장들에 대해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과 구단 운영진들도 K-리그 활성화를 위한 방안에 대해서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K-리그가 스스로 팬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먼저 지난 12일 서울과 포항의 경기가 열리기로 한 상암 월드컵 경기장. 포항의 원정 유니폼을 입고 응원을 하러 온 사람들은 허탈감에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바로 비가 많이 온다는 이유로 경기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야 경기 취소 통보를 했다. 이런 사태가 불거진 지 또 하나의 촌극이 벌어졌다. 이미 한 차례 연기됐던 포항 스틸러스-제주 유나이티드의 2006 삼성 하우젠컵 9차전이 결국 제주의 '기권패'로 선언이 됐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16일 오후 홈페이지를 통해 '포항이 제주를 2-0으로 이겼다'고 발표했다. 제주가 경기를 거부함에 따라 연맹 규정에 따라 2-0으로 포항의 기권승이 선언된 것이다. 연맹은 "제주가 제 시간에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기권패로 한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연맹 이사회는 추후 제주에 대한 징계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협회의 이번 결정으로 포항-제주전은 86년과 87년, 96년, 98년에 이어 K리그 사상 5번째 '몰수게임'으로 남게 됐다. 이날 포항에 승리 여부에 따라 FC 서울을 제치고 선두를 탈환할 수 있었던 제주는 이로써 5승2무2패(승점 17)로 2위에 머물렀다. 엉겁결에 승점 3을 챙긴 포항(승점 16)은 7위에서 3위로 수직상승했다. ◆왜 경기장에 안 나타났을까? 제주 유나이티드가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15일 경기가 진행되기로 한 포항 전용구장이 포스코 노조의 농성으로 경기장에 시위대가 경기에 난입할 수 있다는 이유로 경기가 하루 연기됐다. 하지만 포스코의 농성이 끝나지 않자 연맹은 서둘러 경기장을 알아봤고 알아본 곳이 연습구장이었다. 이런 연맹의 결정에 앞서 경기를 거부한 채 보따리를 싼 제주 측은 불만을 토로했다. 왜 '룰'대로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제주의 한 관계자는 "불가항적 요소로 경기가 하루 연기된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규정대로 해야 하지 않느냐. 마음대로 시간과 장소를 바꾸면 우리는 그저 따라가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규정 상 경기가 연기되면 다음 날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열기로 되어있는데 왜 이를 지키지 않느냐는 게 제주 측의 입장이다. 이날 경기 장소는 포항전용구장이 아닌 포항의 클럽하우스가 있는 송라 연습구장으로 변경됐다. 연습구장에 조명 시설이 없어 어두워지기 전에 경기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경기 시간도 오후 7시에서 5시로 앞당겼다. 제주의 정해성 감독은 "경기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선수들의 신체 사이클을 7시에 맞춰놓고 그동안 훈련을 해왔는데 아무런 말이 없다가 낮 12시에 갑자기 시간을 당겼다"고 밝혔다. 제주 관계자는 "아마 포항 선수단을 이끌고 있는 파리아스 감독도 우리를 이해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포항 측에 '가능하다면 대구나 울산, 부산으로 경기장을 옮겨서 치르자'고 제의를 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 우리는 시내 호텔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데 포항은 클럽하우스에서 훈련하면서 일방적으로 그쪽으로 정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주는 경기를 앞둔 4시 30분께 포항 시내 시그너스 호텔을 떠나 비가 오지 않아 비행기가 뜰 수 있던 부산으로 이동했다. 강경한 자세인 제주는 원정 비용을 청구하겠다고 하는 한편 연맹의 결정은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합의점은 없었나 이번 ‘기권패’라는 초유의 사태를 부른 연맹과 포항, 제주 삼자 간에 의견이 서로 달랐고 경기에 참여하지 않은 제주의 이유도 나름대로 수긍할 만하다. 이번 사태는 컵대회에서 일어났다. 컵대회는 남은 2주 동안 4경기를 치러야 한다. 수요일과 토요일, 주 2회 경기를 치르게 된다. 도저히 경기를 치를 시간이 더 나오지 않는 것이다. 대회 종료 이후에 경기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연맹은 경기를 강행하려 했다. 이 부분에서도 항상 연맹과 구단과의 마찰이 있는 부분이다. 연맹 관계자는 "이미 금요일부터 대비책을 강구했다"며 "이날 오전 포항전용구장은 경찰 측에서 개방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개방할 경우 노조원들이 이 곳으로 난입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관계자는 "인근 4~5개 경기장도 알아봤다. 하지만 다른 대회가 열리고 있거나 보수 문제로 잔디를 엎어놓았다고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중립 경기장에서 치러야 했기 때문에 제주 측에서 제기한 울산 현대나 대구 FC, 부산 아이파크의 홈 구장은 아예 제외됐다. 이에 연맹은 규정을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제주가 제기한 규정과 달리 다른 규정이 있어 제주는 경기에 나섰어야 했다는 게 연맹의 변. 연맹은 "개최지 변경에 대한 26조 3항을 보면 천재지변이나 기타 이유로 홈팀이 개최지 변경을 요청할 경우 연맹은 수용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포항도 연맹 측과 비슷하다. 포항은 설령 포항전용구장에서 예정대로 경기가 진행됐다 한들 팬들 없이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기가 성립되기 힘들었다고 밝혔다. 연맹이 경기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에 따랐다고 했다. 떠난 원정팀 제주,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홈팀의 이점을 주장한 포항, 그 사이에서 규정을 들이댄 연맹. 과연 이번 사태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누구의 책임이든 그렇게 K-리그의 부활을 외쳤던 연맹과 구단은 팬들을 외면했다는 오명은 계속 안고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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