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빼든 김근태 잘못하면 우리당 가른다

11.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지도부가 해체되면서 난파 위기에 놓인 열린우리당을 이끌 비대위 위원장에 김근태 전 최고위원이 과연 그가 '구원 투수'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 전 최고위원은 열린우리당 개혁세력의 '대표선수'다. 그렇지만 정치 입문 이후 '만년 2인자'의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그런 김 의원이 난파 직전인 '열린우리호'를 떠맡게 됐다. 그로선 '마지막 승부'일 가능성이 크다. 그 자신이 "독배를 마시겠다"고 표현할 정도로 당 안팎의 상황이 녹록지 않은 탓이다. 벌써부터 "잘해야 본전"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많다. 김근태 의원을 새 선장으로 맞은 '열린우리호'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키잡이'는 정해졌지만 항로에 대해선 논란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더구나 숱한 난관과 암초가 가로놓인 험로를 헤쳐야 한다. 만년 2인자에 머물러 있던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 최고위원이 5.31선거 참패와 집권여당 붕괴조짐이라는 '악재'속에서 '당권'을 휘어잡았다. 비상체제의 열린우리당은 사실상 계엄상태. 이런 가운데 중앙위원회가 전권을 넘긴 상태에서 그가 잡게 된 당권은 '계엄사령관' 못지않은 파워를 지닌다. 그는 비상체제 속 '비대위원 임명'과 '당체제 변혁', '집권여당 발(發) 정계개편'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손에 쥐게 됐다. 역대 당의장 가운데 최강의 지휘권인 것이다. 기대반 우려반 속에 위기의 열린우리당을 '김근태'가 구해낼 경우 2007년 그의 대선가도에서 순풍이 불 것으로 예상된다. 승리투수가 된다면 당내 정동영계와의 힘겨루기에도 더 이상 힘쓸 일이 없는 것은 물론, 정 전 의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만의 세력 구축이 전망된다. ◆김근태 어깨에 열린우리당 운명 5.31 선거 참패와 정동영 전 의장 등 지도부 총사퇴로 표류하던 열린우리당은 결국 김근태 전 최고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기로 8일 결정했다. 이용희 의원을 위원장으로 당 중진들로 구성된 '8인 인선위원회'는 이날 열린우리당이 비상대책기구 인선위원회 첫 회의를 열고 김근태 체제 출범을 확정했다. 이용희 인선위원장은 "김근태가 안되면 멀쩡한 정치인을 잡는 격 아니냐"고 말했다. 이에 따라 8인 인선위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총 15명 이내로 하고 7명의 상임위원을 두기로 했다. 비대위는 당초 10명 이내로 구성될 방침이었으나 비대위에 부여되는 막강한 권한을 감안, 구성원을 늘리기로 한 것이다.
앞서 7일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국회의원원·중앙위원 연석회의에서 참석자들은 "김근태 만한 대안이 없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일단 비대위의 첫 과제는 지방선거 참패의 원인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하는 일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지방선거 참패로 당의 존립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원인규명은 김근태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임 셈이다. 명확한 원인규명을 토대로 비대위의 시동을 걸어야 향후 그의 당권 가도에 걸림돌이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 자신도 비대위가 출범하는 대로 소속 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워크숍을 열어 선거패배의 원인에 대한 의원들의 의견을 수렴할 것으로 알려졌다. 돌다리도 두들겨 간다는 조심성인 것이다. 이 과정에선 당내 실용파와 개혁파의 치열한 노선 대결이 펼쳐질 전망이다. 당의 노선 문제는 지금껏 여러 차례 쟁점으로 부각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쉬쉬하며 넘어갔다. 당초 열린우리당은 창당 때 개혁성향을 보였으나 국민들은 5.31 선거를 통해 안정을 원하고 있음을 내비치면서 당의 노선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의견이 팽배해진 상황이다. 정동영 전 의장이 물러나면서 민주화 운동을 했고 개혁 성향의 김근태 전 최고위원이 '대안'이 된 것 또한 이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실용파로 분류되는 정동영계를 설득시키지 못하거나 이끌지 못한다면 김근태 자신도 당권을 행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되는 것은 자명한 일. 일단 김 전 최고위원은 실용파와 개혁파의 '끝장 토론'을 벌려 놓고 자신의 승리를 이끈다는 계산이다. 아울러 비대위는 양측의 노선 대결 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정면충돌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면서, 건설적인 토론을 위한 완충 역할을 하는데 전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노선 문제 해결 이후에는 선거과정에서 드러난 당의 고름을 짜낸다는 방침이다. 일단 당 일각에선 최우선으로 당헌에 규정된 기간당원제 개정작업에 착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상태다. 열린우리당은 지금껏 재.보선에서 패배할 때마다 기간당원제에 대한 손질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기간당원제는 정당개혁의 트레이드마크'라고 주장하는 개혁파의 반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당내 친노세력인 참여정치실천연대도 소속 의원들이 주도해 만든 기간당원제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에 공감하고 있는 상태. 더욱이 이번에는 기간당원제에 대한 당내 비판이 상당히 고조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개정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기간당원제를 손질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면 개정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출범할 비대위는 당헌.당규 개정권한을 포함해 당무 전반을 관장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참정연도 9일부터 전국 28개 지역을 돌며 지방선거 참패원인 분석과 기간당원제 등 단체 진로모색을 위한 간담회를 가질 계획이어서 김근태가 이끄는 비대위의 부담을 덜어주게 됐다.
◆김근태 발(發) 정계개편 시나리오 정동영 전 의장이 민주개혁세력 통합론을 주장했지만 당권은 넘어간 상태. 따라서 정치권에서는 김근태 전 최고위원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고건 전 총리가 희망국민연대를 통한 정계개편을 주도하겠다는 의도를 비춘 상태에서 그와 2.18 전당대회 이전부터 만나온 김 전 최고위원이 당권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근태 체제의 비대위는 고 전 총리나 민주당발 정계개편 시나리오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고도 상당한 준비작업을 기울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벌써부터 민주당이나 고건 전 총리가 주도하는 정계개편 시나리오에 일부 소속 의원들이 동요하면서 당의 안정성과 추동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 때문이다. 당 일각에선 비대위 산하에 외부영입을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해 고 전 총리 영입 문제를 전담시키는 등 주도적으로 정계개편 가능성에 대비하자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비대위의 임기는 최대 내년 2월까지, 정기 전당대회 전까지이다. 그 사이 물밑에선 다양한 수준의 정계개편 논의가 진행될 전망이다. 계파별 방법론이 저마다 다르다. 중도보수 성향 의원들의 고건 영입론, 수도권·호남 의원들의 민주당 통합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영남 친노'쪽은 반대다. 김근태 전 최고위원은 고건·강금실·박원순·이수호·문국현 등을 모두 아우르는 범민주세력 대연합론을 주장해 왔다. 당내 이견은 물론 여론의 역풍도 고려해야 한다. 대권 레이스, 도약이냐 좌절이냐 모처럼 2인자 딱지를 뗄 그에게 "잘해야 본전"이라는 우려가 더 많다. 시험대의 난이도가 높기 때문이다. 앞으로 임기를 어떻게 보내느냐, 성과는 내년 대권 레이스로 직결된다. 김 의원의 핵심측근은 "'주먹 쥐고는 악수할 수 없다'는게 김 의원의 지론"이라며 "촌로에서부터 국가 원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민들을 만나 반성하고 사과하고, 그 속에서 다시 일어 설 것"이라고 전했다. 이 측근은 또 "당 체질도 '말하는 정당'에서 '일 하는 정당'으로 물꼬를 다잡을 것이고, 결국 민생경제 회복에 방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통합 전도사'로까지 불리는 김 의원이지만 당분간 타 정당이나 정치세력과의 통합, 연대 논의는 수면 아래로 내려갈 전망이다. '독배'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지난 1995년 정계입문 뒤 줄곧 비주류에 머물러온 김 의원 개인으로도 정치인생 최대의 고비이자 기회를 맞고 있다. 잘못하면 대권주자 반열에서 탈락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김근태 그는 누구인가? 1945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그는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67년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체포, 제적을 당하고 징집됐다. 이때부터 김근태의 본격적인 민주화 역정이 시작됐다. 그는 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과 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되며 박정희 정권이 막 내릴 때까지 피신생활을 계속했다. 80년대 들어서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등을 결성, 이때부터 재야 운동권의 대명사로 불렸다. 30년 동안 체포 26회, 5년6개월에 걸친 두번의 투옥과 수차례의 고문을 겪어왔다. 그는 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며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다. 정치권에서도 그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대선자금 양심고백을 해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바보 같은 짓'이란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어두운 관행을 스스로 고백해 새로운 정치풍토를 만들고 싶었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2003년 9월에는 열린우리당 초대 원내대표를 맡아 창당의 산파역을 했다. 그 뒤 재야파의 수장으로 정동영 전 의장과 함께 우리당을 이끌었다. 30년간 민주화운동의 한길을 걸으며 쌓은 개혁적인 면모는 그의 최대 무기다. 깨끗한 이미지와 개혁적인 콘텐츠는 전문가집단으로부터도 높이 평가받지만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신중함은 주변으로부터 단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그는 현 상황을 위기이자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역량과 리더십을 제대로 보여주면 향후 대권 레이스에도 유리한 고지에 설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에는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자세다. 또한 정동영 의장이 5·31선거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곧바로 "독배라도 마시겠다"며 당의 전면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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