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스케일' 한국 영화의 속성과 한계를 드러내어 주는 분수령격 영화

우스갯소리로 일명 '포레스트 검프 시네마'라고 부르던 영화들이 있다. 바로, 실존하지도 않은 허구의 인물을 실제 역사 속으로 집어넣어 역사의 '중추적 역할'을 맡도록 설정한 기묘한 영화들을 말하는데, 여기에 '역사의 중요 변환기마다 매번 활약하는, 아예 역사를 설명해주기 위해 만들어낸 듯한 인물'이라는 입장 또한 가세한다. 물론, 로버트 제멕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는 개그의 일종으로서 이런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는 자기냉소적 영화이지만, 이렇듯 보다 '똑똑한' 영화에서 개그의 방책으로 사용하는 설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어찌보면 더욱 우스꽝스런 방향성을 지닌 영화들도 분명히 존재하며, 한국영화 역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투입해 만들어낸 '2004년의 거작' "태극기 휘날리며"는 불행히도 이런 '포레스트 검프 시네마'의 틀 안에 정확히 부합되는 영화이다. 자기 자신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우직한 면이 엿보여 안쓰럽기까지 한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은,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종류의, 더욱 극악스런 설정들에 의해 다소간 완화되기까지 한다. '무엇이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악화되기 마련'이라는 금구는 이 영화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합할 듯 싶다. 일단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구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태극기 휘날리며"는 마치 영화 세 편의 소재를 모두 이어놓은 듯한 플롯 과다 현상을 보이고 있다. 6.25 동란 직전부터 발발 상황, 전쟁의 양상, 그리고 38도선을 경계로 한 국지전의 장기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6.25 동란 초반의 상황을 모조리 담아내는 무리한 전개를 감행하고 있으며,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구조된 냄새가 풍기는 인물들은 이 무리한 전개과정을 착실히 밟아나가 강제징집에 대한 이슈, 보도연맹 가입에 관련된 이슈, 방첩청년단에 관한 이슈, 인민군포로에 대한 이슈 등, 당시 벌어졌던 모든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통째로 우겨넣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어찌보면 "태극기 휘날리며"의 각본은 '과욕'으로 인해 침몰지경에 이른 '안타까운 야심작'의 대표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국전의 모든 양상을 두루 살피며 귀납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아우르려는, 그야말로 '실패로 돌아간 야심작' 말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영화를 살펴보면, 결국 "태극기 휘날리며"는 '무책임'하고 '안일'한 영화일 뿐이며, 외국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국지적 요소'들만을 강조시킨 '수출용 상술'의 일종으로 보일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일 만한 가장 극악한 '속성'이 첨부된다. 이것은 '플롯과 그에 따른 인물 변환'에 대한 입장부터 짚어봐야 할 일인데, 먼저,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끝도 없이 이어붙이기 식으로 진행되며 무대와 상황을 바꾸는 영화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실패의 말로를 걷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다중 플롯변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닐 조던의 "크라잉 게임"과 같은 영화들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인간 내부의 갈등 구조에 의해 변모하는 "크라잉 게임"의 인물 대립 구조와 달리, "태극기 휘날리며"는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억지스럽게 인물 간의 대립 구조를 변형시키며, 인물의 근원적 성질은 변하지 않은 채 그저 주변 무대 설정과 상황 설정만이 변모하고 있다. 형제는 서로를 사랑하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여러 복잡한 과정, 주로는 '전쟁'이라는 참상에 의해 야기된 불운한 과정을 겪어 기묘한 방향으로 관계가 틀어지기도 했지만,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형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항시 같은 모습이며 같은 성격의 같은 사람들이다. 닐 조던이 플롯을 변환시키며 동시진행형으로 성립시킨 '인물 내부의 변환'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고집스런' 캐릭터 정형화가 이어지면서, 지긋지긋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동일한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며, 동일한 인물 대립구조가 맥빠지는 인물들과 두서없는 플롯을 좇아다니다 결국 종결을 맞이한다. 이들은 정확히 말해서 '인물'이 아니다. 이들은 체스의 말이며, 역사궤도를 짚어주는 지도봉일 뿐이다. 물론 모든 영화가 복합적 인물 구성과 상황에 대한 관조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필요야 없겠지만, 적어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그 엄청난 플롯량과 길게 연대기적으로 펼쳐지는 무리한 구성, '역사의 중심부에 서있는 인물들'이라는 중량감있는 설정 탓에, 이런 '인물 구조'의 테크닉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케이스였으며, 이들을 다뤄내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주변 상황' 묘사에 인물이 압사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인물의 발작성과 모호성, 부조리함을 강조시켜 다면적인 인물을 구축하는 일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무책임'하며 '무분별'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행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한국 관객'이라 불리워지는 특정 관객층에 대한 배려 아닌 배려 때문이다.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오래된 잠언, 즉 '플롯이 변화하는 까닭은, 이야기 속에서 인물이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명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관객'이라 특화시킬 수 있는 관객층에게 만큼은 강하게 어필할 수 있을 법한 영화이다. '한국 관객'이라 불리우는 집단은, 본래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의 성격과 대립 구조가 변화하는 설정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 관객'은 하나의 선 굵은 인물이, 하나의 선 굵은 플롯을 우직스레 밟아나가며 육중하게 무게감을 늘리는 과정을 유난히도 즐기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관객'이 끝없이 선호하는 '끈끈하고 열정적인 묘사'가 빠질 리 없다. '한국 관객'은 드라이한 풍미를 싫어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혐오하고, 지적인 무드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렇다. '한국 영화'가 기본적으로 '한국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이상, 영화의 스케일이 커지고 그만큼 재정적 리스크가 커질수록, 영화는 단선적인 인물과 판에 박힌 대립 구조 설정, 끈끈하고 열정적인 묘사, 단순화된 플롯과 신파적 엔딩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로 하며, 우리는 어쩌면 거대 제작비가 투여된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플롯을 지닌 도전적인 영화 따위는 영원히 볼 수 없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런 절망적인 '속성'에 대한 정확한 '보고서'이자 '분수령'이며, 우리 민족성과 문화예술 간의 함수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어 주는 영화인 것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부분은, 이토록 안일하고 무책임하며 얄팍한 속셈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가, 한국영화사상 가장 높은 완성도의 액션 연출과 면밀히 계산된 미쟝센, 깔끔하고 세련된 편집으로 치장된 '테크니컬한 걸작'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특히, 제작상의 문제로 항시 '마을 어귀에서 전투', '산악지역에서의 게릴라전' 정도로만 묘사되던 한국전이 드디어 제대로 된 배경설정을 확보하고, 시가전,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국지전, 눈발 날리는 고원에서의 전투 등 다양한 '진짜 한국전'의 양상을 시원스레 풀어헤쳐 보이고 있으며, 1950년대의 한국 상황을 탁월한 고증에 의해 재현시킨 완성도 높은 세트디자인이 관객들의 눈을 틔워주고 있다. 한국영화에서 참 보기 힘든 종류의 '시대적 이입'에 확실히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출상의 쾌거들이 영화의 절대적인 약점들, 나약한 발상들과 맞부딪혀 발생된 감흥은, 가장 냉정하게 말해도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으로, 이 영화가 주는 실망감과 절망감, 그리고 영화제작상의 완성도에 대한 경탄이 동시에 밀려드는 잡종교배적 감흥은 지금껏 그 어떤 영화에서도 얻기 힘들었던 기괴한 종류의 것이며, 그 독보성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임을 고백하고 싶다. 여러 예술 쟝르 중 유난히도 영화만큼은 그 입지나 나아가야 할 방향에 있어서 조금은 변칙적이며 훨씬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여겨진다. 이것은 영화라는 쟝르에 있어서 대중성과 상업성이 '속성'이 아닌 '근원적 발생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크게 기인하는데, 이런 까닭에 늘상 냉철하고 진보적인 시각을 영화에 강요한다는 것은 어딘지 부조리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물론, 모든 문화 예술 쟝르가 공통으로 지녀야 하는 '덕목'을 다시 한번 언급하는 것으로서,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케이스의 문제점을 짚어내야 할 것이다. 바로, 모든 종류의 문화 예술 쟝르는 그 대중성의 확보에 있어서, 대중들의 비위를 맞추고, 대중들의 보편 감수성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숨겨진 감수성을 이끌어내고 강한 설득력과 쟝르 자체가 지닌 매력으로서 그들의 사고체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시켜야 한다는 점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야심'일 것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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