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표 전 의원 사외이사 선임키로…‘바람막이’ 논란 확산

▲ 해성그룹을 이끌고 있는 단재완 회장과 돈독한 관계인 김진표 전 국회의원이 계열사인 한국제지의 사외이사로 선임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적절성 시비가 일고 있다. ⓒ해성그룹

복사지 시장 1위인 복사용지 ‘밀크(miilk)’로 유명한 한국제지가 경제 부총리를 지내고 17~19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새정치민주연합 김진표 전 국회의원을 사외이사로 영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외이사 바람막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3월 주주총회 시즌의 본격적인 개막을 앞둔 지난달 24일 한국제지는 주주총회 소집을 알리면서 김진표 전 의원과 이원욱 서울지방국세청 열린세정추진위원회 위원, 조남일 씨 등 총 3명을 사외이사이자 감사위원으로 선임한다고 공시했다. 이 중 이원욱 위원은 재선임이고 김진표 전 의원과 조남일 씨는 신규선임이다.

한국제지 주주총회는 오는 27일이며, 이날 김진표 전 의원 등에 대한 선임 안건이 의결될 것으로 보인다. 임기는 2년이다.

가뜩이나 대기업들의 사외이사가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센 가운데 김진표 전 의원이 난데없이 한국제지의 사외이사로 선임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엔 바람막이 논란으로 옮겨갈 태세다.

◆영입 이유가 ‘돈독한 관계’?…적절성 시비
김진표 전 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적인 거물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당시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다. 참여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겸했으며 2004년 17대 총선에서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를 지역구로 출마해 국회에 입성, 19대 총선까지 내리 3선에 성공했다.

국회 입성 후에는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과 원내대표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도전했지만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와의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고배를 마셨고, 지난해 6.4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에게 석패, 고배를 마셨다. 현재는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처럼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거물 정치인을 한국제지가 사외이사로 선임한 배경에 대해 해석이 분분하다. 한국제지 측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김진표 전 의원이 재무나 세제를 비롯해 여러 모로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 사외이사로 영입한 것 같다”면서 “(단재완 회장은) 김진표 전 의원과 오랜 기간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설명했다.

한국제지 관계자의 답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재무나 세제’가 아닌 ‘여러 모로’이다. 재무나 세제 부분에서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얘기는 표면상의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다. ‘여러 모로’라는 표현에서 최근들어 거세지고 있는 사외이사 바람막이 논란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5일 한국제지 관계자는 <시사포커스>와의 통화에서 이 부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관계자는 김진표 전 의원의 선임 이유에 대해 “이사회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실무 부서에서 그 부분에 대한 파악까지는 어렵다”고 답했다.

그는 사임이사 선임 기준에 대해서도 “딱히 기준이 공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사회 내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는 대부분 사외이사 선임으로 논란을 겪고 있는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제지 역시 사외이사 선임 기준을 뚜렷하게 밝히지 않아 논란을 자초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으로 연결된다.

◆‘거수기’ 전락한 사외이사, 논란 거세

▲ 비단 한국제지뿐 아니라 우리나라 재계 문화에서 사외이사의 거수기 논란은 어느새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주총 시즌을 맞은 이번달에도 대기업들은 잇따라 권력기관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한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한국제지

애당초 사외이사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경영 전반에 걸쳐 폭넓은 조언과 전문지식을 구하고 또 이사회에 참여해 경영진의 견제와 감시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자리다.

사외이사는 내부에서 나올 수 없는 목소리를 대변해 외부인의 입장에서 공정하고 바른 방향으로 회사를 이끌어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반대의 목소리도 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 오너 일가 및 경영진의 부정부패와 전횡을 방지하고자 1998년부터 상장회사에 한하여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했고, 기업들은 사외이사에 회당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 이상의 일정 보수를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의 사외이사 선임이 언제부터 ‘트렌드’가 되면서 사외이사의 거수기 논란 내지는 방패막이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사외이사들을 통해 중요 정책이 결정된다는 식의 얘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한 기업 관계자는 “뭔가 사외이사는 모셔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포스코 이사회가 포스코플랜텍에 대한 유상증자 안건을 처리할 때 사외이사가 반론을 제기해 보류됐던 사실이 대서특필됐던 것은 역설적으로 사외이사의 역할론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했던 사건이었다. 그마저도 결국 며칠 후 유상증자 안건이 통과됐다.

거물급 권력기관 출신 인사를 영입해 정부 등으로부터의 압박을 막아주는 방패막이로 활용한다는 비난도 거세다.

이미 주총 시즌을 맞아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 등 권력기관 인사들이 줄지어 대기업 사외이사로 옮겨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동규 전 공정위 사무처장과 이병국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현대제철은 박의만 전 국세공무원교육원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할 예정이고, 삼성생명은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을, 호텔신라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선거캠프 출신 김원용 김앤장 미래사회연구소장에게 사외이사 자리를 제안했다.

지난해 10대 그룹 93개 상장사의 사외이사 중 36%는 국세청과 공정위, 금감원과 검찰 등 권력기관 출신이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제지의 김진표 전 의원 선임 역시 시장에서 곱게 보일 리가 만무하다.

◆해성산업, 부동산 덕에 재무구조 ‘탄탄’
더군다나 김진표 전 의원은 한국제지를 거느리고 있는 해성그룹의 단재완 회장과 오랜 후원 관계를 맺어온 터다. 단재완 회장과 김진표 전 의원은 서울 경복고등학교 동문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에서는 단재완 회장의 해성그룹에서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는 해성산업이 그간의 조용한 행보에서 벗어나  지난해 9월 ‘작전세력 개입설’로 큰 주목을 받았던 사례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번 김진표 전 의원의 사외이사 선임이 향후 그룹 운영과정에서 논란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들어두는 ‘보험’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해성산업은 해성그룹 전체 매출 1조3000억원에 비해 초라한 규모인 매출액 100억원 대의 소형건물관리업체에 불과하지만 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다. 해성산업은 한국제지 지분 5.63%를 보유하고 있고 그룹 전체 매출의 60% 가량을 차지하는 한국제지의 2대 주주다. 또한 계양전기 지분 9.32%, 지난해 4월 인수한 해성DS 지분의 5%를 보유하고 있다.

이처럼 규모가 작은 해성산업이 해성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할 수 있는 원천은 부동산에서 나온다. 해성산업은 강남을 비롯한 서울 주요 상권에 수 조원대에 달하는 부동산을 보유한 대표적인 자산주로 꼽힌다. 이는 해성산업을 일궈낸 고 단사천 회장의 덕이다.

고 단사천 회장은 명동 사채업계를 주름잡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이나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마저도 돈줄이 막히면 고 단사천 회장을 찾았다는 얘기까지 있으니 그가 ‘현금왕’, ‘지하경제의 재벌’로 불렸던 것도 이상하지 않다. 1980년대 고 단사천 회장이 하루에 움직이는 현금의 규모가 약 3000억원에 달했다고 전해질 정도다.

사채를 바탕으로 규모를 키운 고 단사천 회장은 명동 등 주요 상업지역과 개발이 시작되던 강남 지역 등의 부동산에 몰두했고 이는 해성산업이 작은 규모에도 알짜기업으로 불리는 원동력이 됐다. 실적에서 수익이 나오지는 않지만 서울 북창동 해남빌딩, 서초동 송남빌딩, 부산 송남빌딩 등 소유하고 있는 다수의 토지와 빌딩에서 나오는 임대료와 시설관리비 등의 현금 수익이 크다는 점에서 우량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부채비율은 9.7%에 불과하다.

▲ 논란의 당사자가 된 김진표 전 국회의원이 과연 사외이사와 감사위원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의 눈초리가 쏟아지고 있다.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김진표 전 의원이 스스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사진 / 유용준 기자

◆홍역 치른 단재완 회장, 부담 느꼈나
이처럼 주력사업이 부동산이기 때문에 실적이 크게 변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지난해 해성산업의 주가가 2013년 말부터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자 ‘과열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2013년 11월 3만6900원이던 주가가 지난해 8월 13일 무려 8만9500원까지 오른 것. 1년도 채 되지 않아 주가가 2배 이상 오르며 매출 100억원대의 회사의 시총이 무려 9000억원 가까이 육박, 코스닥 상위 17위에 등극하자 시장에서는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가 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지난해 9월 초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해성산업의 주가가 며칠 연속 하한가로 직행, 1년 새 2배 이상 올랐던 주가가 며칠 만에 2만원대까지 내려가면서 3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해개미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시장에서는 작전세력이 개입해 시세 차익을 챙겨갔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한국거래소까지 나서 해성산업을 투자주의 종목으로 지정한 뒤 집중 모니터링에 들어갈 정도였다.

그간 쌓인 거품이 한 번에 빠진 것이라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며칠 만에 시총이 5000억원 이상이 날아갈 만한 계기가 될 만한 일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큰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4일 종가 기준으로 한국제지의 주가는 3만750원을 기록, 주가가 갑자기 오르기 시작했던 지난 2013년 11월 수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간 큰 논란 없이 무난하게 운영돼 온 지주사 해성산업이 큰 주목을 받은 데 이어 한국거래소까지 집중 모니터링하고 나서자, 그간 인터뷰조차도 거의 하지 않는 등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단재완 회장이 느꼈을 부담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교롭게도 주가가 폭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지난해 9월 말 단재완 회장은 본격적으로 한국제지·계양전기·해성DS·한국팩키지·해성산업 5개 계열사를 묶어 제2창업의 원년으로 삼고 해성그룹의 출범을 선언하고 나섰다. 부동산에 치우친 사업구조 때문에 신성장 동력을 찾는 데 골머리를 앓던 단재완 회장은 “제2의 창업을 한다는 각오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겠다”며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자”는 뜻을 밝혔다.

따라서 해성산업의 작전세력 개입설로 홍역을 치른 단재완 회장이 본격적인 그룹경영에 나서면서 향후 사업운영 및 확장 과정에서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논란에 대한 든든한 ‘우군’으로 김진표 전 의원을 사외이사로 선임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물론 알려진 것처럼 단재완 회장은 기존에도 여러 정치인들에게 후원금을 지원해 왔지만, 업계에서는 동갑내기 고교 동문이라는 상징성과 김진표 전 의원이 정치계에서 가지고 있는 입지 등을 고려했을 때 우선적으로 고려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단재완 회장의 장남 단우영 씨와 차남 단우준 씨가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하면서 최근 해성그룹은 3세 승계에 시동을 걸고 있다. 고 단사천 회장이 남긴 “가진 범위 내에서 투자해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지 말라”는 유지가 조금씩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중요한 시기라는 점도 이런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스스로 논란 불식시켜야
대표적인 정치권 거물인 김진표 전 의원을 사외이사로 영입하면서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한국제지가 ‘방패막이’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역으로 김진표 전 의원의 역할이 중요하다. 선임이 이미 결의된 만큼 김진표 전 의원이 우선적으로 친분 관계를 떠나 사외이사 본연의 임무인 ‘견제와 감시’를 충실히 실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고 높다.

한국제지만 유별난 것은 아니지만 한국제지의 공시에 따르면 당2012년 당시 사외이사 2명은 한 해 동안 각각 7~80%대의 출석률로 9~10번 정도 이사회에 출석해 모든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고, 1인당 1200만원을 보수로 받았다. 2명 중 1명이 3월 임기 만료로 퇴진했던 2013년에도 마찬가지로 두 사외이사는 출석한 모든 이사회에서 찬성표를 던졌고 합계 1500만원을 받았다.

아직까지는 1년에 수천만원을 안겨주는 대기업들에 비해서 큰 금액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김진표 전 의원이 사외이사로 선임되면 워낙 거물급 정치인인 만큼 보수는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김진표 전 의원이 이사회에서 얼마나 제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사외이사 논란의 재점화 여부가 갈릴 전망이다.

또한 이번 한국제지 공시에 따르면 오는 27일 열릴 주총에서 김진표 전 의원을 포함한 세 명의 사외이사는 많은 기업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란히 감사위원으로 선임된다. 감사위원 역시 사외이사와 함께 회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한 양대축을 형성하고 있는 만큼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김진표 전 의원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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