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도 지나 이제 겨울 문턱에 와 있다. 올 한 해도 두 달 정도 남았다. 전에는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면 가을로 인식됐다. 그렇게 본다면 사색의 양식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계절을 놓친 듯싶지만 한국인에게 특히 서울 시민에게 독서의 계절은 가을이 아닌 겨울이란 조사가 나왔다.

이 같은 결과는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국민 독서실태 조사’를 통해 공개됐다. 서울도서관의 최근 2년간 대출한 도서 수가 겨울에 가장 많았고 가을에 가장 적었다는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왔다. 아울러 이번 조사에서 서울 시민이 독서에 투자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30분을 조금 넘었고 한 해 읽는 권수는 13.4권으로 집계됐다.

독서에 투자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읽느냐는 컨텐츠도 중요하다. 서울 시민들은 도서관에서 문학 분야의 책을 가장 많이 빌려본 것으로 나왔다. 그 뒤를 예술, 사회과학, 역사가 뒤를 이었다. 서울 시민들이 독서에서 가장 멀리하는 분야는 기술과학이었다.

문학이나 예술은 시와 소설, 미술 음악 등으로 주로 현실에 상상을 가미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다. 본질적으로 허구의 틀에서 고차원적인 진실을 추구할 때 좋은 문학, 훌륭한 예술 작품이란 평을 받는다. 이에 반해 역사라든지 사회과학, 기술과학은 논픽션에 가깝다. 논픽션은 주로 사실과 법칙의 세계를 다룬다. 사람의 성향은 사실을 대하는 태도에서 결정된다.

사실, 곧 팩트는 어원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것’을 뜻한다고 알고 있다. 공장을 뜻하는 팩토리란 말과 어원이 같다고 들었다. 사실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라서 글을 수정하듯이 나중에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느냐 하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간단한 이 사실을 둘러싸고 의심과 의혹이 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도대체 뭐가 사실이냐는 것조차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또한 사실을 둘러싼 해석이 사람마다 제각각 달라도 너무 다를 때가 허다하다. 이러다 보니 소소한 일상사부터 굵직굵직한 사건까지 사실을 둘러싸고 입씨름과 공방이 오가며 추측과 갖가지 소문이 무성하게 자라난다. 하늘을 보면 의혹의 잿빛 구름이 스모그처럼 지구촌 상공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듯하다. 첨예한 논란 거리에 대해 제대로 된 사실 규명이 된 적이 없으니까 ‘~카더라’ 통신이라든지 각종 음모론이 횡행하고 있다.

사실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집단은 오히려 이런 사태가 편할 수 있다. 인식에 가해지는 이러한 혼란은 작전상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이런 사태가 바람직할까? 사실을 업신여기는 성향이 강해지면 사람들은 공상화 경향을 띠게 된다. 사람은 이해에의 욕망이 유달리 강해서 어떤 의혹이 있을 경우에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럴 듯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사람은 사실보다 이 ‘그럴듯함’에 대해 더 열광적으로 반응하는지도 모른다. 이 열광은 도취를 낳고 때로는 과격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사실이란 때로는 직면하기가 버거운 게 사실이다. 세상에 눈을 돌리면 비극적이고 어리석고 엽기적인 일들이 거의 무한히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심마저 갖게 한다. 달아나 피하고 싶다. ‘아름답고 달콤한 환상과 상상의 세계’에서 쉬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어찌 보면 문학 관련 분야의 책을 많이 읽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실의 무거움과 진실의 날카로움은 편안한 수긍보다는 실천적인 대응을 요구한다. 피곤한 일이다. 반면 공상의 세계에서는 삶의 다양한 이해관계는 생략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은 ‘이쁘게’ 포장된다. 사실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이 깊어질수록 픽션 속에서 희망과 기쁨은 요란해진다.

2001년 9/11 사건이 터졌다.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한 초대형 건물 두 개가 비행기와 충돌하더니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후 사실과 상상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실제 이 지구 위에서 일어난 것이다. 무서운 상상력에 기초한 기획이 사실의 세계에 출현했다. 그 이후 안 그래도 무성하던 음모론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활개 치고 있다.

이런 인식의 혼란 상황 속에서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사실에 대한 탐구와 겸허함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와 기술과학 서적은 사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여러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그럴듯해 보이는 ‘아전인수격’ 해석의 현기증 나는 미로를 벗어나는 길은 사실 추구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서 비롯할 것이다.

서울시가 11월 8일부터 9일까지 서울광장과 서울도서관 일대에서 ‘2014 서울 북 페스티벌’을 연다. 짬을 내서 역사와 기술서적을 찾아 읽자. 곧 겨울, 독서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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