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한명숙·강금실 '빅3' 맹활약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 여성정치인 리더십 시험대 박순천 여사가 정통 야당인 민주당 총재로 선출된 것은 1965년. 국내에서는 여성으로서 정당 대표로 뽑힌 첫번째 케이스였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공격에 "나랏일이 급한데 언제 병아리를 길러서 쓰겠느냐"며 거리낌없이 되받은 여장부였다. 어쨌거나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가 보잘 것 없던 시절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외국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영국의 대처 전 총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매컬리스, 할로넨이 각각 아일랜드와 핀란드 대통령으로 활약 중이라는 사실부터가 여성들의 폭넓은 정치 참여도를 보여준다.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출신인 낸시펠로시 의원이 현재 하원 민주당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다. 필리핀의 아로요,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스리랑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물론 지난해 도이(土井多賀子) 여사에게 자리를 물려받은 일본 사민당 후쿠시마(福島瑞穗) 당수 또한 여성이다. 요즘은 국내에서도 여성을 빼놓고는 정치판이 돌아가지 않을 만큼 여성들의 관심도가 매우 높아졌다. 하다 못해 여성전용 선거구 얘기가 나올 정도다. "치마폭이 바지폭보다 훨씬 넓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로만 그치지 않는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성의 정치참여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한나라당을 박근혜 대표가 이끌고 있는 가운데 열린우리당 한명숙 의원에 대한 총리 지명으로 첫 여성 총리의 탄생이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관심사인 서울시장 선거를 겨냥해 여당이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의 출마를 기정 사실화하면서 '여성 정치'에 대해 유권자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지는 모습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들이 '여인천하(女人天下)시대'를 펼칠 것인지에 새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근혜·한명숙·강금실… '여인천하시대' 열리나? 2007년 대권 고지를 향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자리인 재상(宰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열린우리당 한명숙 국무총리지명자,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 출전을 놓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공교롭게도 세 사람은 40대 강 전 장관과 50대 박 대표, 그리고 60대 한 지명자는 여성 트로이카가 정계의 핵심 포스트를 분점하는 형국이다. 박 대표는 22세 때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고, 1979년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는 은둔생활을 하다 98년 국회의원에 당선, 본격적인 정치를 했다. 정치 입문 6년만인 2004년 3월 '탄핵정국'에서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17대 총선 때 '박풍(朴風)'의 위력을 발휘한 그는 자신을 둘러싼 '후광정치' 논란을 잠재우고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로 자리매김을 했다. 재야 운동가 출신인 한 의원은 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으로 1년6개월간 감옥생활을 했고, 그의 남편 박성준(65) 성공회대 겸임교수 역시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영어의 몸이 됐다. 그는 신혼 6개월만에 남편이 구속돼 13년간 옥바라지를 했다. 박 대표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16대(비례대표)에 이어 17대(고양 일산갑)에서 당선된 한 의원은 여성부, 환경부 장관을 하는 등 행정경험을 쌓았다. 그런 그가 이제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총리 취임을 계기로 질적 도약을 이룰 수 있을지 주목된다. 강 전 장관의 이력도 이채롭다. 사법고시 합격, 판사, 민변으로 활동하다 법무부 장관에 임명돼 일약 '스타'가 된 케이스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서울시장 예비 후보 가운데 선두자리를 차지하고, 여권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는 것은 그의 대중적 인기를 반영한 것이다. 강 전 장관은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드는 순간 '정치인'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이들의 '여인시대' 앞길에는 '관문'도 적지 않다. 박 대표와 강 전 장관은 각각 대권 후보와 서울시장 후보로서 까다롭고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하며, "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총리지명자는 자신의 내정 소식을 접한 뒤 이같이 소감을 밝혔다. 그에 대한 국민과 역사의 평가가 어떻게 내려지느냐에 따라 그 후배 여성 정치인은 물론 여성 일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제 여성 총리 시대가 눈앞에 와있지만, 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로 지명된 장상 전 총리서리는 야당의 반대로 국회 인준 절차를 넘지 못했다. ◆여성 정치 태동기 지난 1948년 5월31일 한국 헌정사의 문을 열어 젖힌 제헌국회. 그러나 이날 열린 개원식 주인공 중에는 '세상의 절반'이 빠져 있었다. 5·10 총선거를 통해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 중 여성이 단 1명도 없었던 것이다.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은 이듬해인 1949년 보궐선거(경북 안동을)에서 임영신(작고)이 당선되면서 비로소 탄생됐다. 임영신은 최초의 여성 당수(민주당)로 기록된 박순천(작고)과 함께 한국 여성 정치사의 태동기를 장식한 주역이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을 벌였던 임영신은 1948년 8·15 정부수립 당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상공부장관으로 개국내각에 포함됐다. 한국 첫 여성 장관과 국회의원 타이틀 모두를 독차지한 셈이다. 그가 장관에 막 부임했을 때 부하 남성직원들이 "서서 오줌 누는 사람이 어찌 앉아서 오줌 누는 사람에게 결재서류를 들고 가 고개를 숙이겠느냐"며 쑥덕거리자 "내 비록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왜놈과 맞서 싸웠고 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 누는 사람 못지 않게 뛰어다녔다. 그런 나에게 결재 받으러 오기 싫은 사람은 지금 당장 보따리를 싸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역시 독립운동가 출신인 박순천은 1950년 서울 종로갑구에서 당선되면서 여성 2호 국회의원에 올랐다. 정계 입문은 임영신에 뒤졌지만 이후 정치적 영향력 면에선 그렇지 않았다. 2, 4, 5, 6, 7대에 이르기까지 5선 의원에 올랐고 1965년에는 민주당 총재에 올라 한국 최초의 여성 당수로 기록됐다. 박순천은 특히 여권신장을 위한 입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생리휴가제, 산전·산후 휴무제, 간통쌍벌죄 등의 도입을 주도했다. ◆여성 총리, 여성 대권주자 시대 한국 여성 정치는 199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일대 도약기를 맞았다. 1996년 개원한 15대 국회가 박근혜(한나라당 대표), 추미애 등 걸출한 스타급 여성 정치인들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깨끗하고 당찬 이미지, 돋보이는 의정활동 등을 무기로 이들은 16대 국회를 거치면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지난 2004년 17대 총선 당시 각각 한나라당(박근혜)과 민주당(추미애) 대표를 맡아, 원내 1·2위 정당 을 모두 여성이 이끌어가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은 2002년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돼 사상 첫 여성 총리에 오를 기회를 잡았으나, 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면서 분루를 삼켜야 했다. 2004년 17대 총선은 여성 정치 도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각 정당의 정치개혁 경쟁 과정에서 여성들이 '비례대표 홀수번호에 여성 배정', '공직 후보자 및 당직의 30%에 여성 배정' 등의 성과를 따낸 것이다. 이를 통해 17대 국회에는 총 299명의 당선자 중 39명(13.4%)을 여성이 차지,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최초로 10%를 넘어설 수 있었다. 박근혜(한나라당), 김혜경(민주노동당) 등 여성 당수도 배출됐고, 이같은 성과는 급기야 '한명숙 총리 내정'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비로소 '여성적 리더십'이 국민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공인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박선숙 전 환경부 차관은 "여성에게는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과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당 유승희 의원은 "여성 총리 지명으로 깨끗한 정치, 돌봄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고, 한나라당 이계경 의원은 "여성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여성에 대한 편견을 바꿀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06년 한국은 왜 여성 정치인들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여론조사기관인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한귀영 연구실장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적 요구와 맞물려 여성 정치인이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월드리서치 김상범 이사는 "여성의 강점인 화합과 유연성이 경직된 사회에서 부각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같은 분석은 유력한 여성 대통령 후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 대표는 물론 한 후보자도 총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경우 일약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올라설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여권 관계자는 "여당 대권주자들의 약세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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