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수(祭需) 물가 올라 유리지갑 털린다

▲ 대기업들이 중소협력회사들의 자금 사정을 고려해 추석 전에 물품대금을 조기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시장은 추석 대목을 앞두고도 썰렁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어 울상이다. ⓒ홍금표 기자
대기업, 협력사 자금 부담 완화 위해 자금 풀어
재래시장 활성화 노력 불구 지역경제는 ‘냉랭’

민족 대이동이 이뤄지는 한가위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듯 한가위에는 서민층까지도 한껏 기분을 낸다. 조상님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마련하는 제사상에는 조금 더 비싸더라도 좋은 것을 올린다.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대기업들은 추석을 앞두고 대금을 미리 결제하며 협력업체를 돕고 있다. 돈줄이 말라버린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서민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늘이 가득하다. 물가가 너무 올라버린 것이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대기업들이 추석을 앞두고 물품대금을 조기 지급하고 있다. 자동차, 전자, 유통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이 같은 솔선수범이 이어지고 있다.

삼성·현대차·LG 등 앞장서

삼성그룹은 추석을 앞두고 협력업체에 물품대금을 미리 결제하기로 결정했다. 규모만도 1조8000억 원에 달한다.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중공업 등 18개 계열사가 참여한다. 이와 함께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300억 원 규모의 전통시장 상품권을 구매할 계획이다.

삼성은 지난 설에도 조기대금 1조1000억 원을 지급했다.

삼성은 지난 18일부터 다음 달 19일까지 서울 서초사옥을 비롯한 전국 37개 사업장에서 135개 자매마을과 협력해 농축산물 직거래 장터도 운영한다.

재계 2위인 현대자동차그룹도 협력사의 자금 부담을 완화시키기 위해 약 1조1500억 원을 추석 전에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현대차그룹은 2, 3차 협력사들의 자금 운영에 어려움이 없도록 1차 협력사에 2, 3차 협력사에게 납품대급을 앞당겨 지급할 수 있도록 유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현대차그룹은 매년 설, 추석 등 명절 전 협력사들의 자금난 해소를 위해 납품대금을 선지급해왔다. 올해 설에도 1조300억 원의 대금을 조기 집행했다.

대금 선지급과는 별도로 현대차그룹은 추석 명절을 맞이해 9월 1일부터 2주간 18개 계열사 그룹 임직원과 협력사 임직원이 함께 결연시설을 방문해 명절, 음식, 생필품 등을 전달하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올 추석 납품대금 조기지급을 통해 위축된 서민 경기가 더욱 활성화될 수 있길 기대한다”며 “자금이 2, 3차 협력사들에도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해 협력사 임직원들이 함께 풍성한 추석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LG그룹도 대금 조기지급에 동참했다.

LG는 LG전자 3500억 원, LG디스플레이 4600억 원, LG하우시스 1000억 등 10개 계열사가 1조1000억 원 규모의 납품대금을 다음 달 5일까지 조기 지급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LG는 온누리상품권을 구입, 직원들에게 지급해 전통시장 활성화를 도울 방침이다.

또한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LG화학, LG하우시스 등 주요 계열사들은 추석을 앞두고 독거어르신 및 아동복지관 등 지역 사업장 인근의 소외이웃을 방문해 송편 빚기, 명절음식 나눔, 생활용품 지원 등 다양한 사회공헌활동도 펼칠 계획이다.

한편, 재계 3위인 SK는 협력사 물품 대금을 계약이 발생할 때마다 지급하기 때문에 추석을 맞아 특별히 조기 지급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추석 대목 큰손, 유통업계도 발 벗고 나서

추석 때가 되면 소비자들로 붐비는 대형 유통업체들도 나섰다.

롯데백화점은 500여 개 협력업체에 800억 원의 물품대금을 평소보다 일주일가량 앞당겨 다음 달 4일 지급한다고 밝혔다. 롯데마트도 1300여 개 협력업체에 납품대금 1500억 원을 선지급하며 자금난 해소에 도움을 줄 계획이다.

현대백화점과 현대홈쇼핑을 운영하고 있는 현대백화점그룹도 1200억 원의 물품대금을 조기 지급한다.

현대백화점은 450여 개 협력업체에 780억 원을, 현대홈쇼핑은 2200여 개 협력업체에 420억 원을 추석 연휴 전인 다음 달 5일에 지급할 예정이다.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도 68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풀어 5100여 곳의 협력업체를 지원한다.
신세계백화점은 2300여 개 협력업체에 3300억 원을, 이마트는 2800여 개 협력업체에 3500억 원 규모의 물품대금을 대금지급 예정일인 다음 달 10일에서 5일 앞당겨 추석 연휴 전인 5일에 지급한다고 밝혔다.
홈플러스도 2700억 원 규모의 상품대금을 조기 지급한다.

당초 9월 1~30일 지급 예정이던 중소협력사 4800여 곳의 상품대금을 열흘가량 앞당겨 26일~9월 4일까지 지급하기로 했다.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도 가맹점과 중소협력업체에 물품대금 440억 원을 미리 지급하기로 했다.

재래시장은 여전히 추운 겨울

이처럼 대기업들이 중소협력업체에 대해 추석 전 물품대금을 조기 지급하며 순풍이 도는 듯 하지만 재래시장의 사정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상황이다.

추석이 평년 대비 한 달여 가까이 앞당겨지면서 과일과 채소를 수급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여기에 추석을 앞두고 비까지 내리면서 부담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아직까지 추석 장보기가 일러 추석 특수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재래시장의 소상인들의 체감 경기는 풀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인천지역 재래시장에 채소를 납품하는 김상철(가명·40) 씨는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서 예년에는 평소 대비 1.5배 정도 주문 물량이 늘었다. 하지만 올해는 이른 추석 때문인지 물량이 많아지지 않았다”며 “아직 시간 있으니 조금 기다려 보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올해 추석은 그냥 지나갈 것 같다”고 푸념했다.

이어 김 씨는 “주변 청과상 주인들도 이번 추석에는 크게 바랄 게 없다는 분위기다”며 “그나마 청과는 국내산이 대부분이라 다행이지만 일부 채소와 나물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것들이 있어 가격 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 납품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김 씨의 말처럼 추석이 다가오면서 장바구니 물가가 요동을 치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합동단속반을 편성해 시장 가격 변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가벼워진 서민들의 지갑이 아예 닫힐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일부 상인들은 대기업들이 중소협력업체들의 납품대금을 조기 지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상관없다는 반응이다. 어차피 자신들은 대기업과 거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대금을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기업 협력업체들이 이를 발판으로 대형유통업체들에 적극적으로 상품을 납품하면서 자신들의 상권을 침해한다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 광진구에서 건어물을 팔고 있는 강 모(52) 씨는 “거리는 조금 있지만 대형마트들이 추석을 맞아 다양한 할인행사를 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보다 좀 더 싼 가격에 판매할 수도 있지만 마진이 별로 남지 않아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다”며 “거기에 우리 시장은 주차 공간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아 손님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말로는 아무리 재래시장 상권 살리기를 외치지만 실제로 온누리상품권을 들고 오는 손님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강 씨는 “정부에서 아무리 재래시장 살리겠다고 이런저런 모색을 해봤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세상인들이 제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는 이상 재래시장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사포커스 / 전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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