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입’에서 ‘국민의 입’ 될까?

호남발 정치 변혁의 신호탄이 터졌다.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여당 인사 최초로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호남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새누리당은 원조격인 민주정의당 시기에는 전남에서 당선된 적이 있지만 1988년 이후 26년간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있던 여당의 황무지에서 이정현 후보가 당선됐다. 이 당선인은 7·30 순천·곡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새누리당 후보로 나서 새정치민주연합 ‘노무현의 적자’ 서갑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 당선인은 6만815표(49.43%)를 얻어 4만9611표(40.32%)에 그친 서 후보를 가볍게 제치기까지 했다.

이제까지 전남과 광주에서는 여당 당적을 가진 후보자가 당선된 예가 없었다. 호남을 통틀어 여당 출신 국회의원이 배출된 것은 1996년 15대 총선 때 전북 군산을에서 신한국당 강현욱 의원이 당선된 이후 18년만에 처음이다. 새정치연합 김부겸 후보가 지난 6·4 대구시장 선거에서 40%의 득표율을 획득하면서 선전했지만 결국 넘어서지 못한 영호남 지역 구도를 이 당선인이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이 후보의 당선은 한국 정치의 해묵은 고질병인 ‘불변의 지역구도’에 결정적으로 균열이 가고 있다는 증거이며, 호남에서부터 새로운 정치 변화의 가능성을 실증해보였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다.

▲ 7·30 전남 순천·곡성 국회의원 재보선에 출마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공식 선거운동 첫 날인 17일 전남 순천시 한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뉴시스

▶ ‘지역구도 타파’ 한결같은 진정성

7·30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새누리당은 15개 재·보선 선거구 중 순천·곡성과 서울 동작을 등 주요 격전지를 비롯해서 모두 11개 지역에서 승리했다. 반면 새정치연합은 텃밭인 호남 3석과 수도권의 경기 수원정 등 4곳밖에 건지지 못했다. 야당은 참패했고 이 참패는 텃밭에서 승리한 이정현 당선인으로 인해 더욱 도드라졌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30일 이 후보가 당선된 데 대해 “우리나라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라며 축하했고 이인제 최고위원도 31일 YTN 라디오와 인터뷰에서 “혁명이라고 열 번을 불러도 모자라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같은 당 민현주 대변인은 평화방송라디오와 인터뷰에서 그의 승리 요인을 꼽으며 “일단 믿고 한 번 써 봐 달라고 호소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런 진심이 순천 곡성 유권자분들께 통했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정현 당선인의 승리 요인은 무엇일까? 이 당선인은 지난 6월 <주간경향>과 인터뷰에서 새누리당 출신으로 호남에 출마하더라도 당선 될 것이라며 자신이 강조하는 ‘진정성’에 대해 “지역구도 타파”라며 “나는 누군가 이 지역구도라는 엄청난 장벽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1m 구멍을 뚫고, 다른 사람이 또 1m를 뚫고, 그 다음 사람이 또 1m를 뚫다 보면 지역구도 장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각오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 당선인은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마침내 자신이 말한 그 1m를 뚫어 한국 정치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됐다.

이 당선인의 혁명적 승리의 조짐은 선거일 이전에 징후가 나타났다. 20-21일 순천KBS와 여수MBC가 이틀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 당선인은 38.4%, 서갑원 후보는 33.7%로 역전된 결과가 나왔다. 또, 이 지역 사전투표율이 13.23%로 전국 평균 7.98%보다 약 5%포인트 이상 높이 나와 최대 이변 지역으로 급부상했다. 지역 유권자들은 이런 유의미한 수치에 대해 새누리당 첫 호남의원이 탄생함으로써 지역주의 청산 계기가 만들어지느냐 아니면 야당이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박근혜 정부 심판’으로 결론 나느냐며 초미의 관심을 보였다.

승자를 이해하려면 패자의 패인이 뭔지도 알아야 한다. 이 당선인의 진정성 마케팅이 밑바닥 민심 지형을 휘젓고 있을 때 야당은 ‘그래도 텃밭인데…’ 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조짐이 심상치 않자 선거 운동 막판에야 김한길 공동대표(22일), 이해찬 의원(25일), 문재인·박지원 의원(26일), 안철수 공동대표(27일), 정동영 상임고문(28일)까지 가세했지만 이미 뒤집혀진 판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능과 빼기 식 분열, 무사안일주의도 모자라 야당의 무기인 비판적 실천의지를 ‘쇼’ 수준에서도 보여주지 못한 야당 의원들과 당원들 그리고 지도부의 패배였다. 새정치는 세월호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이라는 절호의 국면에서도 주도권을 잡아 시원시원하게 정국을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시대착오적 ‘제 사람 심기’ 공천 잡음만 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야당 지지자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오죽했으면 항간에 두 대표 때문에 야당이 망가지고 있다는 비난이 회자됐을까.

선거 운동 기간 이정현 당선인이 지역타파에 대한 정치적 열정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민심을 손아귀에 걷어가고 있는 가운데, 야당의 ‘박근혜 정권 심판론’이 호소력 있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서 후보가 마지막 유세에서 “국민무시, 호남무시, 야당무시하는 불통정권 박근혜 정부를 심판해야 한다”며 ‘삼무시론(三無視論)’을 외쳤지만 유권자들이 보기에는 안쓰러운 네거티브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이 당선인은 새누리당의 선거 지원을 마다하고 선거운동 내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목욕탕과 전통시장 등을 누비고 다니던 유세 자전거를 버리고 선거 전날에는 하루 종일 순천 지역을 ‘막 돌아다니며’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마지막까지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외쳤다. ‘정권심판론’을 들고 훅을 날리려는 서 후보에게 어퍼컷을 날린 셈이다.

▶ 정권심판론 포지티브 전술로 극복

국민의 소망을 현실로 만드는 변화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하는 정당은 소멸하고 정치인은 잊혀지게 마련이다. 이런 냉정한 민심의 동향을 이 당선인은 잘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당선 후에 확연해졌다. 30일 오후 11시 15분쯤 전남 순천시 새누리당 전남도당 사무실에서 이 당선인은 “이정현이 잘나서가 아니라 일단 한 번 기회를 줘보겠다는 의미란 점을 잘 알고 있다”는 당선 소감을 밝힌 데 이어 “국민 여러분께서는 순천시민과 곡성군민이 우리 정치와 지역 구도를 바꾸는 위대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을 감격스럽게 보고 계실 것”이라며 “유권자들을 하늘처럼 받들고 은혜를 갚으며 살겠다. 호남 정서 대변, 인재 양성을 위한 머슴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한국 정치의 문제점인 지역구도와 지역감정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줘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당선 소감에서 지역감정 타파를 말할 정도로 지역주의를 깨려는 그의 노력은 살아온 이력을 일별만 해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선인은 1984년 민정당 구용상 전 의원의 캠프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2002년 이회창 후보 캠프에서 전략기획을 맡았다. 제1회 지방선거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한데 이어 17대 총선에서 광구광역시 서구 을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고작 720표(1.03%)를 얻었다. 18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의정활동을 했고, 19대 총선에서는 다시 광주광역시 서구 을 후보로 출마해서는 39.7%라는 고무적인 득표율을 얻었지만 패배했다.

▲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 브리핑 도중 생각에 잠겨 있다. ⓒ뉴시스

이 당선인이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7대 총선에서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서 물심양면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박근혜 당대표는 광주에 출마해 단기필마로 싸우는 이 당선인을 격려하는 오찬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이 당선인의 ‘호남포기론을 포기해달라’는 호소를 듣고 그의 달변에 탄복, 당 수석부대변인으로 전격 발탁했다는 후문이다. 이후 이 당선인은 ‘박 대통령의 입’, ‘박 대통령의 복심’, ‘박 대통령의 호위무사’ 등으로 불리며 끈끈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 와중에 설화에 휩싸이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비극적 결말을 맞을 수 있다”고 발언한 양승조 민주당 의원에 대해 “위해를 선동하는 테러, 언어 살인, 국기 문란, 암살 가능성 발언” 등 격렬한 언사를 쏟아내며 박 대통령 방어에 나서 비난이 빗발쳤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아침에 뉴스 듣다 보니, 이정현 ‘심기 수석’께서 ‘테러, 암살’ 폭언을 하면서 감정이 격앙되어 울컥하셨다고. 민주공화국의 홍보수석이 조선왕조의 내시처럼 구시면 곤란합니다”라고 조롱성 비판을 가한 적도 있다.

이에 대해 이 당선인은 담담하게 ‘나는 울먹인 적 없고 내시가 아니다’고 반박하며 굳은 심지를 보였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 당선인은 ‘왕의 남자간의 대결’이라는 말이 퍼지자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뜬금없이 순천·곡성 선거에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고 멀쩡하게 국정을 운영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등장하냐”면서 “그것은 맞지 않는 말일 뿐만 아니라 나는 그런 자격도 없다”고 논란을 일축했다.

이 당선인은 18대 국회 들어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일하다 19대 총선 때 세 번째로 광주에 출마했으나 민주당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한 오병윤 진보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어 새누리당의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청와대 정무수석을 거쳐 윤창중 전 대변인 성추행 사건 이후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 민심 간파, 지역발전론-일꾼론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이 당선인의 “일단 써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1년 반 뒤에 총선에서 버려달라”는 호소 뒤에는 든든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당선인은 18대 국회 때 비례대표로 원내에 입성하면서 4년 내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들어가 오롯이 호남의 숙원사업을 바지런히 챙겨 ‘호남 예산 지킴이’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선거 통틀어 가장 이슈가 된 슬로건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바로 ‘예산 폭탄’이었다.

이에 대해 최대한 많이 확보한 예산을 토대로 지역 발전을 이끌겠다는 호남일꾼론이 승리의 한 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권자들은 호남에 긴급한 예산과 수년째 정체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국비 확보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고 그에게 한 표를 던졌다. 물론 새정치 한정애 대변인은 23일 현안 논평에서 이 당선인을 향해 “예산 폭탄 운운하며 국회의 예산결산 심의의결권을 우습게 보는 데 이어 이제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유치까지 호언장담하고 나섰다”며 공세를 펼쳤지만 지역 경제적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퍼져나가게 하지 못했던 서 후보의 승리를 견인하기에는 무리였다.

이 당선인은 30일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광양만 등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갖추고도 낙후된 호남과 전남 동부권에 정부와 외국기업을 설득시키고 관련 예산을 제대로 투입하도록 할 것”이라며 “지금보다 훨씬 많은 예산을 끌어오겠으며, 주민의 열망과 낙후된 현실을 생각하면 예산폭탄으로도 부족하고 원자폭탄이라도 필요한 상황”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당선 소감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터에서 이긴 비결이 들어 있다. 너무 간단해서 무시하는 두 요인, 그것은 바로 정치적 진정성과 경제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다. 더 줄이자면 열정과 능력이다. 이 두 덕목은 지역구도 타파를 넘어 남북통일이란 위업을 달성할 미래의 정치인도 새겨들어야 할 공식이다. 서 후보가 패배했다고 해서 호남 유권자들이 정권심판론에 배여 있는 세월호의 아픔을 외면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국민들도 세월호와 유병언 미스터리에 대해 공감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침몰한 세월호 간판에 퍼질러 주저앉아 울고만 있기에는 일상생활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힘들다.

만일 자신이 내건 경제 공약을 선거운동 할 때처럼 꿋꿋이 지켜나간다면 이 당선인은 사반세기 넘게 지속된 지역구도를 깬 최초의 정치인이자 상대적으로 낙후된 전남지역 경제부흥까지 이룩한 위대한 정치인으로 국민의 기억과 역사에 남을 것이다.

이 당선인이 청와대와 경제각료, 그리고 친정부 매체들에 진 빚이 크다. 이들은 세월호 정국 때문에 내수 경제가 죽어가고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이 당선인의 경제 공약에 매력적인 후광을 입혔다.

▲ 7·30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순천·곡성지역 이정현 당선인이 31일 오후 전남 곡성군 곡성읍에서 자전거를 타고 주민들을 만나고 있다.

국민들은 이 당선인이 더 큰 정치인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 당선인을 만드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박 대통령과 관계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 당선인은 지난 대선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설령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당선 무효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발언해 입술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누리꾼들은 이 당선인의 이런 발언에 불쾌감을 느껴 험한 비판들을 쏟아냈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국민들은 이번 위대한 시민 혁명의 드라마 속에서 주연으로 갈채를 받는 이 당선자가 이제부터 ‘국민의 입’, ‘국민의 복심’, ‘국민의 호위무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