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민의 영원한 슈퍼스타 - 역도산

일본 프로레스링의 아버지 역도산(力道山), 그는 사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국민의 영웅으로 자리잡고 있다.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1924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씨름을 하다가 1939년 일본인 모모다(百田)의 양아들이 되면서 일본 씨름 스모에 입문하게 된다. 그의 이름 역도산은 그가 소속되어 있던 스모방에 걸려 있던 휘호 力心一道에서 따온 것이다. 力道山 光浩(리키도잔 미쯔코)란 스모명으로 활약하다가 데뷰 10년만에 돌연 머리를 깍고 은 퇴한다. 은퇴이유는 표면상 '동료들과의 의견차이', '간디스토마에 걸려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스모선수에 최고 영예인 요코즈나 (한국에 천하장사급)에 조선인이란 이유로 오를 수 없다는 회의감이 지배적이다. 잠시 건설회사 자재부장으로 일하다가 일본을 방문한 미국 프로레슬러를 만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역도산은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 레슬러로 전향한다. 미국에서 300전295승5패라는 성적을 남기고 1953년 일본으로 귀국하여 일본 프로레스링협회를 설립한다. 그때 그의 나이 28세 때 일이다. 당시 일본은 TV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고 시합을 생중계로 관람할 수 있어 프로레스링은 순식간에 폭발적 인기를 얻게된다. 그는 시합에 쇼 연출을 살리는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상대편의 반칙으로 위기에 처하는 척 하다가 관중이 흥분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의 특기인 손칼 날리기로 상대를 일시에 제압하는 드라마틱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당시 일본의 최고 국민 가수이자 그의 열광팬인 미소라 히바리가 '왜 처음부터 손칼 날리기를 쓰지 않느냐'며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역도산은 전설적 세계챔피언, 루디스를 쓰러뜨리고 프로 레슬러로서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한다.그제서야 일본언론도 그가 한국인임을 알면서도 영웅화했다. 패전이후 미국에 컴프렉스를 안고 있던 일본 국민에게 통쾌감과 자신감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역도산은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안트 바바, 김일등 우수한 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1963년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에 한국체육발전을 위해 스포츠센터 건립을 약속했으나, 같은해 도쿄의 카바레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수술을 받던중 사망하였다. 역도산은 생애 3번 결혼하였는데 그의 마지막 부인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62)는 최근 역도산의 인생을 회고한 책 출판 기념식에서 '38도선에 남편의 동상을 설립하고 싶다'고 전한바 있다. 역도산의 첫번째 부인사이에서 태어난 딸 김영숙(金英淑)은 북한 체육위원인 박명철의 부인으로, 그녀의 딸 박혜정은 북한 역도팀 감독으로 2002년 부산아시아게임에 참가한바 있다. (일본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보였던 샤프형제와의 시합. 사진 왼쪽 끝이 역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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