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뜨겁게 먹어야 맛있다?

박찬욱 감독의 2002년작 <복수는 나의 것>은 기묘하고 도전적인 방향성으로 한국은 물론 서구의 비평가들까지 매료시킨 필름느와르 걸작이었다. 흥분하는 사건전개 내부에 서있는 냉정한 인물들, 자극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자체로는 다분히 정적인 픽스 컷의 연속 배치. 이런 양극적 양상의 적극적인 충돌을 꾀했던 박찬욱의 의도는 그대로 맞아떨어졌고, <복수는 나의 것>은 개성적이고 도발적이며 독창적인, 듣도보도 못한 필름 느와르의 새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반만에 등장한 그의 신작 <올드 보이>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 정확히 말해 <복수는 나의 것>이 지니고 있던 미덕을 상당부분 배반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먼저 <올드 보이>에서 '배반'의 주역을 맡은 표현상의 테크닉에 대해 살펴보자. 박찬욱은 <올드 보이>에 대해, 고의적으로 <복수는 나의 것>의 냉정한 영역에서 떨어뜨려 놓은 '과잉의 영화'라고 칭한 바 있다. 실제로 <올드 보이>의 스타일은 박찬욱의 언급처럼 '과잉'의 연속이다. 컷의 과잉, 편집의 과잉, 음향의 과잉, 성격화의 과잉, 연기의 과잉 등, 영화제작의 거의 모든 요소가 과잉으로 집요하게 치달아있다. 연출의도야 어떤 방향이건 작가의 주관에 달린 일이지만, 그 의도의 가치는 언제나 설정된 방향이 '효과적'으로 작용했는가에 달려있는 법이다. <올드 보이>가 다루는 주제는 이미 그 자체로 자극적인 것이고, 이를 풀어내는 형식 역시 관객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미스테리 형식이다. 15년간 알 수 없는 이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감금되어버린 한 소시민의 수사극이자 복수극이라는, 이미 자극으로 치달아 있는 전제 내에서, 왜 또다시 자극을 한 데 뒤집어쓰는 과잉의 '형식'으로 내달려야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완급조절의 절대법칙을 내던지고 밀어붙이기만 하는 형식을 택한 것인가. 이유는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스타일리즘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자신의 영화를 완전히 독보적인 영역으로 밀어 넣으려하는 야심, 작가적 비젼과 고집이 관객에의 친화보다 확고히 위에 서있다는 자만심, 그리고 '완벽에서 멀어진 영화'가 '철두철미한 영화'보다 더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허영어린 계산, 이 모든 것이 바로 스타일리즘에 대한 집착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올드 보이>는 매 씬, 매 컷마다 이런 집착들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의도된 불안정감'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란 중요하다. 어떤 예술쟝르건 작가의 미학적 비젼보다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야심과 자만심, 허영이 한데 만난 '집착'의 비젼을 통해 관객들이 얻어낼 수 있는 감흥은, 분명히 말해 피로감 외에는 없으며, 그 '의도된' 피로감의 내부에는 피로한 감정을 만끽하는 나름의 즐거움 대신, 오직 정서적 탈진감, 모욕감, 강탈된 기분 등이 자리잡게 된다. 엔터테이너로서의 서비스 정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세계관을 타인의 잠재적 무의식 속에 삽입시키고자 하는 예술가들이라면 반드시 지녀야만 하는 '이입'의 테크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일례로, '지루한 상황'을 납득시키기 위해 관객들을 지루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 따윈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기본적인 방향설정에서 불편한 감이 일긴 해도, <올드 보이>가 성공하고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로버트 리차드슨이 촬영한 영화를 4시간 연속으로 보는 기분이 드는 정정훈의 촬영도 개별적으로는 모두 아름답고, 다양한 대비의 미쟝센을 선보이고 있으며, 특히 원작 만화에서 설정된 다분히 개인적 감수성에 입각한 '사건의 동기'를 완전히 뒤엎고, 이를 희랍 비극의 형식 - <복수는 나의 것>이 그랬듯이! - 으로 재구성한 각색작업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절묘하고 깊이있다.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두 주인공, 최민식과 유지태의 연기는 '과잉된 격렬함'와 '과잉된 냉정함'의 단순 대비에 그쳐 기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나름의 카리스마를 지니고는 있으며, 연출의 과잉 의도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강혜정의 뚜렷하면서도 현장감을 살리는 대사패턴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이상한 일이다. 비평적 스타의 자리에 오르고 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듯 의도적으로 '망가뜨리는' 패턴을 향해 방향을 잡는 감독들의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가장 기계적인 예술가들로 알려진 영화감독들 역시 예술가 특유의 변덕과 우매함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과 동시에 안도감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도발적인 시도를 감행하려는 연출가들이 반드시 숙지해야할 잠언 또한 존재한다. '불완전한 영화'가 지니는 매력이란, 그 불완전성이 사소한 실수, 혼란스런 와중에 내린 결정, 돌발적으로 찾아온 불운 등, 완전성을 추구하다 벌어진 악재를 통해 탄생됐을 때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지, '의도된 불완전함'이라는 오만함으로 접근했을 때에는 절대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 말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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