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판단과는 별도로 담배 둘러싼 개인별 추억은 깊어

어렸을 적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할머니 담뱃대에 ‘풍년초’ 브랜드의 연초(煙草)를 장죽(長竹) 끝에 있는 쇠붙이 홈에다 꾹꾹 쑤셔넣는 일이었다.

조그마한 엄지손가락으로 눌려대고 나면 종일 담배 냄새가 손가락에서 묻어 나왔다. 그 땐 그 냄새가 적이 좋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담배농사에 고달팠다. 그 당시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밭농사는 담뱃잎을 말려 파는 거였다. 모종을 심고, 매일 물을 주고, 애 보살피듯 해야 했다. 연두색 담뱃잎 군데군데가 황갈색으로 점이 박힐 즈음 이파리는 어른 팔뚝 만하게 자라서 땅위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 때 이파리를 따다가 지푸라기로 머리 부분을 엮어서 방에다 걸어둔다. 방 온도를 높여 건조를 빠르게 하기 위해 한 여름철에도 구들장에 연신 불을 피워대니 사우나탕이나 진배없었다.

땀을 흘리며 그 방에서 푹 자고 나면, 온 몸에서 담뱃내가 우러나왔다. 그 냄새도 그윽한 맛이 있었다.

중학교 때에는 호기심으로 담배를 피우는 애들이 더러 있었다. 학교 화장실 뒤켠에서 선생님 몰래 삼삼오오 패거리를 지어 ‘뽀꿈담배’를 피워댔다.

고교시절에는 학교 화장실이 쉬는 시간엔 아주 굴뚝이 돼 버렸다. 대놓고 너나 할 것 없이 피워대니 마치 불난 집 같았다. 선생님들이 이를 보고 득달같이 쫓아와서 단속을 해보지만 별무효과였다.

군대에 입대했더니 ‘담배 일발 장전’ ‘바가 바가 바∼알∼싸’가 시간마다 있었다.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오가며 권하는 ‘장초 한 대’로 전우애가 커졌다. 소대원 가운데 담배 안 피우는 자가 거의 없었다.

신문사 기자가 되니 편집국은 온통 연기 피워놓은 굴속이었다. 조간신문 마감시간인 오후 서너 시가 되면 참으로 가관이었다.
글이 안 나와 스트레스로 거침없이 빨아대는 애꿎은 담배 통에 편집국은 완전히 화생방 훈련장이 됐다.

책상위에 있는 어떤 재떨이에는 스트레이트 기사 리드문의 미로에 빠진 주인 잃은 쌩 담배가 타들어가 연기를 뿜어냈다. 여름에는 더 했다. 에어컨을 틀어 놓아 문을 꽉 닫아 놓은 상태에서 담배 연기는 빠질 틈새가 없어 더욱 시야를 흐리게 했다.

그러다 지천명의 나이에 접하자 담배 맛이 뚝 떨어지고, 숨이 가빠지는데다 어지럼증까지 겹쳐 금연을 결심하게 됐다. 그래도 식후 연초와 배변 연초만은 도저히 끊을 수 없어 몇 년 버티다 이순을 바라보며 완전히 절연하게 됐다. 가끔 속상할 때 입에 물어보는 ‘댐배’는 처음의 그것처럼 울렁거리고 아찔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내외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흡연 피해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소송의 쟁점은 흡연이 폐암과 인과관계가 있다는 정도를 넘어 담배회사가 담배의 중독성을 높이고 위해성과 중독성을 고의적으로 은폐했는지의 여부라고 한다. 건보공단은 담배의 결함이나 중독성 높이는 첨가물의 함유, 위해성 연구 은폐 여부 등이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고 있다.

건보공단은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한 소장에서 "손해배상을 구하는 근거는 첫째 피고들이 제조한 담배 제품들이 극도로 유해하고 또한 중독성이 있어 통상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안전성이 결여돼 제조물로서의 결함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담배회사가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해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에 대한 사실을 은폐해 흡연자를 포함한 일반 대중을 기망(欺罔)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흡연이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일 뿐이라는 담배 회사의 주장에 공단 변호인은 "담배의 중독성이라는 흡연행위는 니코틴 중독에 의해 니코틴의 혈액 내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일어나는 행위라는 중요한 본질을 무시한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공단이 소송을 제기한 가운데 충북 증평·괴산지역에서 이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증평군 여성단체협의회는 지난 16일 증평군 여성회관에서 건강보험공단의 담배 소송 지지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증평여협은 결의문에서 "흡연 피해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삶의 질 향상과 금연운동 확산을 위해 건강보험공단의 담배 소송은 마땅히 해야 할 소송"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폐해와 공단의 흡연 피해 구제 소송 추진에 대한 공감대 형성으로 금연운동 실천과 확산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날 담배 소송 지지 결의에 참여한 여성단체는 새마을부녀회, 아이코리아, 적십자부녀봉사회, 한국여성소비자연합, 여성의용소방대 등 11곳이었다.

흡연권, 행복권, 건강권, 금연권 등 여러 권리가 부딪치면서 쟁송 사태로 비화되고 있다. 담배 소송의 승패는 나라마다 엇갈리고 있다. 일단 사법부의 신중하고도 엄정한 판단이 또 다시 내려지겠지만 담배를 둘러싼 개인들의 추억과 일화는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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