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위에서 중증장애인 자립, 자활 위해 빛과 소금 자임

‘1030’. 언뜻 들으면 특정 세대를 일컫는 말 같지만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일(1)이 없으면(0), 삶(3)도 없다(0)는 의미다. 정덕환 에덴복지재단 이사장은 에덴의 동산에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중증장애인들을 모아서 직업재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중증장애인들은 거동하는 데 불편함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제한이 있다.

이런 상태에서 할 일이 없고, 또한 소득이 없다면 그야말로 장애인 자신에게는 실로 막막한 인생이 되고, 주위 정상인들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정 이사장은 강조했다. 즉 직업 재활, 재활 고용이 장애인들의 삶에는 더할 나위 없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자신도 1급 중증장애인이면서도 장애우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온갖 가시밭길을 헤쳐 나온 세월을 담은 그의 최근 저서 ‘행복공장 이야기’가 세간의 화제가 되어서 정 이사장을 만나봤다. 지난 1일 경의선 전철을 타고 금릉역에 하차해서 가는 길목에 철을 앞질러 꽃망울 맘껏 펼쳐 내보인 봄꽃들이 길동무를 해줬다.

▲ 정덕환 에덴복지재단 이사장은 휠체어 위에 앉아서 중증장애인 자립, 자활을 위해 온몸을 받쳐 헌신해 오고 있다.


다음은 정덕환 이사장과 일문일답 내용이다

-우선 이사장님이 최근 세상에 선보인 ‘행복공장 이야기’라는 책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장애우들은 물론 비장애우인 일반인들에게도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 책에 대한 소개부터 해주십시오.

한마디로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 일을 통해 찾아가는 행복한 삶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이 없으면 삶도 없다’는 대명제 아래 중증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어 행복하게 되는 그런 특별한 사람들의 스토리입니다.

저는 유도 국가대표 선수에서 하루아침에 전신마비장애인이 됐습니다. 평생 누워 지낼 줄 알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갔습니다. 중증장애인의 자립과 재활을 도와 국내 최대의 장애인 고용생산시설을 일궈 냈습니다. 저 스스로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지만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바꾼 한 남자, 정덕환의 휴먼 스토리입니다.

▲ 행복공장이야기

열심히 일하고 세금 꼬박꼬박 내는 게 즐겁다는 사람들. 목표는 수익이 아니라 고용이라는 회사. 완전자동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기계 대신 더 많은 사람이 일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터. ISO 품질경영 시스템과 ISO 환경경영 시스템을 획득하고, 장애인 복지시설의 바람직한 역할모델을 제시하여 UN 국제노동기구에 최초로 등록된 것 등 에덴 행복공장의 비밀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일은 단순히 밥벌이 수단이 아닙니다. 자존심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간에, 세상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든 아니든 간에 땀 흘려서 일하고 수고한 대가를 받는 삶은 고귀하다는 메시지를 이 책에서 전하고 싶습니다.

에덴 행복공장에서 거동이 불편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지적 장애인, 중증장애인, 복합장애인들이 모여서 이룩해 낸 기적이 어떤 것인가를 진정성을 갖고 보여 주고 싶습니다.

‘행복공장 이야기’는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공장, 에덴 공동체 사람들의 힐링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정 이사장님께서 복지 사업에 뛰어든 배경은 무엇입니까?

우선 제가 장애인이 된 사연부터 꺼내 놓아야 될 것 같군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최연소 유도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8년간 승률 85퍼센트를 자랑하는 유도선수로 활약하였습니다. 연세대학교 재학 중이던 지난 1972년 8월 1일, 동료선수와의 연습경기 도중에 경추 4번과 5번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당시 3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결과는 전신마비 지체장애 1급이었죠.

혼자서는 밥도 못 먹고 세수도 못 하며 대소변 등의 신변처리도 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는 전도유망한 국가대표 선수에서 하루아침에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듯한 좌절감을 맛보았던 거죠.

그러던 중 1976년이 되었습니다. 그 해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낭보가 전해졌죠. 후배 유도 선수들이 은, 동메달을 땄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모교인 연세대에 유도 코치로 임명해 달라고 청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연세대 백양로 길을 내려오면서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아- 장애인들 모두가 이 같은 슬픔을 느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단초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듣고 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생계를 위해 생활전선에 나서게 된 내용도 듣고 싶습니다.

뼈를 깎는 재활훈련으로 휠체어에 앉게 된 후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 행상과 동네 구멍가게 운영을 했고, 일을 하면서 비로소 ‘쓸모없는 존재’라는 열패감을 극복하고, 가족과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꾸려간다는 자긍심과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에 다른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에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1983년 10월, 장애인 5명과 함께 당시 구로구(현 금천구) 독산동의 세 평 공간에 일과 생활을 함께하는 장애인 공동체 ‘에덴복지원’을 설립했습니다.

-‘에덴복지원’이 에덴복지재단의 효시(嚆矢)이군요. 복지사업 초기에 어려움이 많으셨을 터인데 어떠셨습니까?

우선 일거리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일거리를 확보하는 영업은 제몫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에덴 공동체는 석 달 만에 첫 수입으로 36만 원을 벌었습니다. 3개월간의 생활비 지출은 35만 원이어서 남는 돈은 없었지만, 내 손으로 일해 내 밥벌이를 했다는 것으로도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운영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죠. 휠체어를 타고 구로공단을 누비며 더욱 본격적으로 영업에 나섰습니다. 공장의 수위가 막으면 문을 열어줄 때까지 매일 찾아가 졸랐고, 사무실 계단이 만리장성처럼 가로막으면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몇 층이고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담당자를 만나도 일을 따오기까지는 첩첩산중이었죠. 가장 힘든 벽은 장애인이 제대로 일할 수 있겠느냐는 사회적 편견이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열심히 정성들여 작업을 하여 주문업체들의 만족도를 높였습니다.

-사업이 풀리니 복지원도 확장되었겠군요?

예, 맞습니다. 에덴의 식구는 곧 30명, 5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건물주의 부도로 거리로 쫓겨나거나 홍수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일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장애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나요? 일이 잘 풀리는 듯하더니 난관이 생겼습니다. 식구가 80여 명까지 늘어났을 때 갑자기 구로공단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 엔저 등 3저호황이 끝나면서 구로공단의 전자제품 수출 산업이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전자제품 임가공을 주로 하던 에덴에도 일거리가 뚝 떨어졌고, 80명 대식구의 끼니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습다.

업종 전환이 필요했고, 아울러 장애인이 만들었다고 시장에서 차별받지 않을 ‘상표 없는 물건’을 만들자 했습니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끝에 비닐봉투로 결론지었습니다. 시장이나 가게, 길거리 좌판 등 어느 곳에서나 물건을 사면 비닐봉투에 담아주니 수요가 꾸준할 것이고, 브랜드 이미지가 필요 없으니 품질만 좋으면 판로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장애인이 만들어 부실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비닐봉투를 만들던 에덴은, 몇 년 뒤인 1995년 1월1일부터 시행된 쓰레기종량제 시대를 맞아 최고의 품질로 납품 경쟁에서 승리, 분리수거용 봉투 전문생산업체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작은 일을 열심히 하면 큰일을 해낸다고 하던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결국에는 도와주었습니다.

-방금 ‘장애인이 만들어 부실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는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정상인들의 제품과 정정당당하게 품질경쟁력과 가격 면에서 우수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웠나요?

우선 지난 2002년에 ISO 환경경영시스템과 품질경영시스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에덴하우스는 현재 서울 25개 구청을 비롯하여 서울과 수도권 36개 자치단체에 쓰레기종량제 봉투를 납품하는 한편 2년전 설립된 형원(馨園)은 OEM(주문자상표부착) 방식으로 연 4천 톤의 친환경 주방세제를 생산 납품하고 있습니다.

▲ 에덴복지재단에서는 중증장애인들이 어엿한 ‘근로자’로서 일하고 있다.

이 결과 연 매출액 규모는 150억여 원에 달하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일하는 170여 중증, 중복 장애인의 평균임금은 110만 원으로, 전국 중증장애인 평균임금의 세 배에 달합니다. 장애인 복지의 가장 바람직한 모델로 인정받아 국제노동기구(ILO)에 등록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소망하는 직업재활, 재활고용이 성사된 셈이죠.

-정부의 장애인 복지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장애인 복지에 대한 기본 패러다임이 생겨났습니다. 우선 김영삼 전 대통령 때는 ‘생산적 복지’였습니다. 그 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은 ‘실천적 복지’였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참여정부란 이름에 맞춰 ‘참여 복지’였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시기에는 ‘능동적 복지’라는 개념이 도입되었습니다. 현 정부에서는 우리 에덴복지재단이 ‘창조경제의 현장’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볼 때 장애인 복지정책에 비판적 잣대를 갖다 댄다면 일관성이 부족했다고나 할까요. 한마디로 장애인들이 피부로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복지 정책에는 아쉬움이 있다 하겠습니다.

-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해 특히 일자리 창출에 힘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변은 ‘1030’으로 가름할까 합니다. 언뜻 들으면 특정 세대를 일컫는 말 같지만 심오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일(1)이 없으면(0), 삶(3)도 없다(0)는 의미입니다. 여기 에덴에 있는 장애인들은 중증장애인들입니다. 이들 중증장애인들은 거동하는 데 불편함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제한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할 일이 없고, 또한 소득이 없다면 그야말로 정상인들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즉 직업 재활, 재활 고용이 필수적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중증장애인들에 대한 ‘평생 대책’이 수립되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에게 일시적인, 제한적인 혜택을 베풀거나 대안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해법을 제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 에덴에서 일하는 중증장애인들은 절대 ‘원생’이 아닙니다. ‘근로자’입니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여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여느 근로자와 신분이 같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중증장애인들 가족들은 장애인을 케어해줄(보살필) 부담이 줄게 되겠군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사실 한 가정 내에 장애인이 있으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을 받습니다. 그런데 장애인 스스로 자립해서 독립적인 경제활동주체로 굳건히 일어서면 이 모든 문제점들이 해결되는 셈이죠. 이런 맥락에서 저는 직업 재활이야말로 ‘평생 대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 정덕환 에덴복지재단 이사장은 ‘1030’을 강조했다. 일(1)이 없으면(0), 삶(3)도 없다(0)는 의미다.

-그동안 펼쳐온 사업과 앞으로 사업계획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직업 재활교육 현장은 일반적인 연수원과는 사뭇 상이합니다. 중증장애인들이 이렇게 행복하게, 또 완전하게 일을 하면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에덴 재활 교육은 현장에 많은 이들을 오도록 해서 한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장애인에 대해서도 ‘일할 기회를 못 가질 것이다’라는 체념을 버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북돋을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싶습니다.

◆정덕환 에덴복지재단 이사장이 걸어온 길

1946년 서울 출생. 성남고등학교 3학년 당시 최연소 유도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어 8년간 선수생활을 하다가 연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2년, 동료선수와 연습훈련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경추 4번과 5번이 골절, 전신마비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재활훈련 끝에 가까스로 휠체어에 앉게 된 그는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 행상과 동네 식품가게 운영을 했다.

일을 하면서 삶의 활력과 의미를 되찾게 된 그는 다른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1983년 10월, 장애인 5명과 함께 서울 구로구(현 금천구) 독산동의 세 평 공간에 장애인 공동체 ‘에덴복지원’을 설립, 오늘날 연 150억여 원의 매출을 올리는 국내 최대 장애인 고용생산시설을 일궈냈다. 현재 에덴복지재단에는 170여 명의 중증, 중복 장애인이 일과 생활을 함께하고 있으며, 이들의 평균임금은 110만 원으로 전국 중증장애인 평균임금의 세 배에 달한다.

현재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자문위원과 장애인 직업재활을 위한 국제단체인 WI(WORKABILITY INTERNATIONAL) 아시아 부회장 겸 WI 코리아 회장, 한국장애인 직업재활시설협회 회장, 장애인 평화인권 홍보대사(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등을 맡고 있다.

[시사포커스 / 김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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