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만능주의’가 만들어 낸 신종 범죄…도용 수위 심각

▲ 최근 타인의 SNS를 도용해 마치 ‘자신의 삶’인 양 살아가는 이들이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현대인들의 욕구 불만이 이같은 도용현상을 부추겼다고 말한다. /사진=페이스북 캡쳐

지난 2012년 개봉한 영화 ‘화차(火車)’. 이 영화는 주인공 장문호가 갑자기 사라진 약혼녀를 찾다가 그녀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가족, 경력, 주소…. 모든 것이 다른 여자의 것임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많은 상처를 안고 자라온 약혼녀는 ‘잘 자란’ 한 여성을 살해하고 그녀의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살아 온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약혼녀의 행각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며 이를 단순히 ‘영화’로 받아들였지만 현실에서는 의외로 이같은 일이 쉽게 벌어지고 있다. 유명인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단순한 ‘장난’에서 시작된 사칭행각은 어느 새 하나의 ‘범죄 행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피해자 올린 글·사진 도용해 내 것처럼 게시
공인·일반인 신분 가리지 않고 ‘무분별 도용’

평범한 20대 회사원인 A씨는 어느 날 친구로부터 “혹시 페이스북 계정이 두 개냐?”라는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계정은 단 하나뿐이었던 A씨는 이를 부인했고 친구가 보내준 페이스북 주소에 접속한 A씨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이 운영하는 페이스북이 아님에도 프로필 사진에는 버젓이 A씨의 사진이 들어있었고 이 씨가 자신의 계정에 올린 사진들이 고스란히 ‘의문의 계정’에 올라가 있었다.

심지어 A씨가 며칠 전 친구들과 만남에서 찍은 사진까지 고스란히 올려져 있는 것을 본 A씨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이름도, 사진도, 일상도 모두 자신의 것이었지만 정작 A씨는 계정의 존재 사실 조차 몰랐던 것.

A씨는 마음을 가다듬고 ‘의문의 페이스북’을 찬찬히 살펴봤다. A씨가 아닌 ‘누군가’가 A씨 행세를 하며 올린 글에는 A씨가 알지 못하는 이들의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려 있었다. A씨가 친구들과 떠난 여행지에서 수영복을 입고 올린 사진을 그대로 퍼다 나른 사진에는 남성들의 성적인 발언들도 종종 보였고, 이 같은 반응에 ‘누군가’는 이 같은 상황을 즐기는 듯 한 답글을 써 놓기도 했다.

▲ SNS를 도용하는 행위를 단순히 ‘장난’이나 ‘문화’로 봤던 과거와는 달리 하나의 ‘범죄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 뉴시스

A씨는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페이스북과 ‘의문의 페이스북’을 함께 찬찬히 비교해 봤다. A씨는 ‘의문의 페이스북’은 A씨가 글을 올린 지 2~3시간이 지나지 않아 같은 사진과 내용의 글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A씨의 페이스북을 항상 염탐하고 있었다는 뜻.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자신의 일상을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A씨는 이튿날 경찰서로 가 신고를 접수했다. 물론 증거를 남기기 위해 ‘의문의 SNS’ 화면은 모두 캡쳐해 둔 상태.

그러나 A씨의 자초지종을 들은 후 경찰에게서는 “신고 접수가 어렵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이에 “증거가 명백하고 정신적 피해가 너무도 크다”며 A씨는 신고 접수를 촉구했지만 경찰은 “페이스북 서버가 미국에 있고 재산상 피해가 없어 사실상 형사 고소는 힘드니 민사 소송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형사처벌이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경찰서에서 나온 A씨는 타 지역 경찰서에도 같은 내용으로 진정서를 접수하고자 했지만 모두 같은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나 ‘유일한 방법’이라며 경찰 측이 안내해준 민사소송을 위해서 감당해야 할 변호사 비용, 시간적 부담을 감당하기에 A씨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A씨는 불쾌하지만 자신을 사칭한 ‘누군가’에게 해당 계정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도용’ 발견해도 관련법 없어 처벌 어려워

한편 이같은 피해는 비단 A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스마트폰 등 무선기기의 발달로 SNS 사용자가 급격히 늘면서 누군가를 도용해 이를 마치 ‘자신의 삶’ 인양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 발생하면서 하나의 범죄 양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애꿎게 인생을 도용당한 피해자들이 나날이 늘고 있음에도 이를 처벌할 명확한 ‘법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피해자들은 상대방이 자진해서 계정을 삭제해 주지 않는 한 어떠한 규제도 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형법 상에도 ‘타인을 사칭, 상대방을 기망해 이득을 취하면 사기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 단지 ‘사칭’, ‘도용’에 대한 법적 규제는 아무것도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관계자는 25일 <시사포커스>와의 통화에서 “SNS에서 도용한 것을 갖고 무작정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성희롱이나 모욕, 명예훼손에 해당하거나 금전적 피해가 있다면 형사법상 처벌이 가능하지만 그저 ‘도용’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처벌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은 외국에 서버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국내 경찰이 수사할 방법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최근 공인들 사이에서도 이같은 ‘사칭’ 현상이 많음에도 처벌이 힘든 것은 처벌을 근거할 만한 법규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이름부터 사진, 스케줄 내용까지 상세하게 적어둔 인기개그맨 유재석 씨를 사칭한 SNS. 이 SNS는 한 때 친구가 5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사진=페이스북 캡쳐

이 관계자의 말처럼 연예인을 비롯한 ‘공인’을 사칭하는 일은 낯선 일이 아니다. 최근에도 많게는 하루에 수십 개씩 ‘연예인 SNS 사칭 경보’ 보도가 나오고는 한다. 특히 아이돌 가수를 사칭해 SNS를 개설하고 이를 진짜 가수라고 믿는 팬들과 소통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일례로 인기 개그맨 유재석 씨의 경우 ‘SNS를 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밝혀 왔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북 내에만 유 씨를 사칭한 계정이 5개가 넘는다. 해당 SNS에는 마치 유 씨인 것처럼 사진을 게시하고 촬영 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두기도 해 일부 네티즌들로 하여금 ‘진짠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청소년 ‘사칭놀이’…정체성 확립 저어하기도

이 같은 사칭·도용 범죄의 또 다른 양상으로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인기 아이돌을 사칭한 ‘사칭놀이’가 있다.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우상 연예인의 이름을 사칭해 SNS 계정을 만들고 다른 아이돌 가수를 도용한 ‘가짜 아이돌’과 친구를 맺으며 SNS 속에서 연인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좋아하는 가수를 향한 애정이라고 하기에는 이 같은 청소년들의 ‘놀이’가 자라나는 10대들의 정체성 확립을 저어하고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2월 중순에는 경남 모 중학교에서 여성 아이돌 A양을 사칭한 심 모(15)양이 남성 아이돌 B군을 사칭한 진 모(15)군과 SNS 상에서 연인관계로 지낸다는 이유로 같은 학교에 다니는 A, B의 팬인 동급생 9명이 심 양을 집단폭행해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놀이’를 넘어 ‘범죄’가 되어 버린 SNS를 통한 ‘사칭’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 “현대인 욕구불만, 도용현상 부추겨”

무엇보다도 SNS가 실명제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특히 최근 유행하는 대부분의 SNS는 해외 서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국내 포털사이트와는 달리 본인 인증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최근에는 개개인의 ‘개성’이 중요화 되는 경향인 탓에 가입 후에도 보여지는 이름을 수시로 변경할 수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도용’은 쉽게 가능한 것이다.

한편 전문가들은 이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 획일적인 가치만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를 꼽았다. 현대 사회에서 외모 지상주의와 고학력, 고수입 직업 등 직업을 평가하는 잣대가 너무도 평이하고 단조롭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이들로 하여금 이같은 도용현상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SNS가 타인에게 ‘나’를 공개하는 공간이다 보니 남들에게 ‘보여주기’ 식 글을 올리다 보니 마냥 좋아보이기 때문에 이를 자신의 삶으로 이입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한국정신상담센터 장하나 상담실장은 25일 <시사포커스>와의 통화에서 “현대인들의 성공 가치가 지나치게 협소하다 보니 성공 가치를 쫓는 현대인들의 욕구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장 실장은 이어 “현대 사회에서 ‘성공’이라는 것은 멋지고 예쁜 외모,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좋은 것만 보여지는 SNS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성공한 삶을 표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사이버 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사전 교육과 관련 법규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도 있다.

고려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김영옥 교수는 25일 <시사포커스>와의 통화에서 “SNS 도용·사칭 현상을 단순한 하나의 문화로 보는 시선이 있는데 사실 이같은 현상이 계속 되면 ‘현실속의 나’와 ‘사이버 공간 속의 또 다른 나’가 현실에서 충돌해 혼란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특히 최근 SNS가 급격하게 활성화 되면서 개인의 사생활이 너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도용하고 사칭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같은 일을 벌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이를 ‘장난’이나 하나의 ‘문화’로 보는 시선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면서 “이는 크게 보면 남의 삶을 염탐하고, 이를 도둑질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남이 올린 것을 너무도 쉽게 접할 수 있는 SNS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의식, 자세, 사용법이 전혀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단지 국민들의 성공을 좇는 의식을 바꿔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애초에 이같은 일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속적인 사이버 교육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시사포커스 / 유아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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