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향식 공천 이뤄져 다시 등원하면 소외층, 통일 위해 진력”

윤석용(63) 전 국회의원(서울 강동을)은 18대 때 국회에 들어가 의정활동을 펼쳤다. 초선의원으로서 장애인, 빈민, 노인 등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국회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기 위해 앞뒤 안 가리고 나서다 ‘군기반장’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런 그가 느닷없는 송사에 휘말리면서 정치 역정(歷程)에 험로를 만나 좌절하기도 했다.

굽은 것을 펴고, 휜 것을 바로잡기 위한 충정이 정쟁의 회오리에 휘말리면서 왜곡돼버린 채 실로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다행히 신앙의 힘으로 자신을 수습한 윤 전 의원은 다시 정계에 복귀해 못 다한 꿈을 펴기 위해 지극히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각오를 다듬고 있다. 그가 원장으로 있는 서울 천호동에 위치한 천호한의원에서 만나봤다.

▲ 윤석용 전 국회의원은 앞으로 국회에 입성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회통합을 위해 온 힘을 바칠 것이라고 강변했다. 사진 : 김경복 기자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이다.

-정치에 입문하시게 된 동기 좀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1세 때 소아마비로 2급 장애인이 됐습니다. 그래서 성장하고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부모님, 선생님, 주위에 계신 분들과 친구들 덕을 많이 봤습니다. 늘 사랑에 빚진 것을 갚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학교 다닐 때에는 유신 시절이었습니다.

대학 재학 시절 내 한 몸 희생하면 이 나라에 민주화가 올 줄 알고 민주화를 위한 학생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땅에 소외받은 사람들을 직면하게 되었고,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러던 중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복학을 하고 그러다 한의사로서 이웃에 봉사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야겠다는 각오로 학문에 전념,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한의사로서 무료진료하고, 빈민가 탁아소, 어린이집, 이동목욕차량 등 복지 관련 일을 했습니다. 하다 보니, 법과 제도가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법을 만드는데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어린이집을 하나 운영하는데 제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교재, 선생님 자격, 보육료, 식단 등 전무했습니다. 교육자재가 없어서 그림책을 직접 제작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입법 주체로서 국회의원을 생각하시게 됐습니까?

일정한 예산 배분, 그리고 법을 만드는 것도 국회가 하는 일이여서 뒤늦게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정치를 해보라고 주위에서 많은 권유를 했습니다만 제가 정치는 ‘따라지 인생들이나 하는 거다’라고 하면서 거부했었죠.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17대에서는 1000표차로 낙선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나라당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경제가 성장하고 그래서 파이가 커져야 복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보수정당을 택했습니다.

성장을 먼저 이룬 뒤에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는 판단에서였죠.
18대에 출마해서는 많은 표차로 이겼습니다. 우리 주민들을 위해 지역에 봉사한 덕도 있고 당시에는 한나라당 인기도 있었죠.

-국회의원에 당선돼 의정활동을 왕성하게 펼치셨는데, 그 내용 좀 말씀해 주십시오.

당선 후 열심히 했습니다. 국회의원으로서 기득권을 내려놓고 봉사하는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래서 국회 등원 일성이 장애인, 가난한 사람 등 소외받는 이들을 위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4년 동안 금배지 한번 안 달아봤고, 세비가 나와도 장학금, 불우 노인 쌀 기증 등으로 사용했습니다.

정치후원회 구성 안 했고, 출판 기념회도 안 했으며, 나랏돈으로 외유도 한번 안 다녀왔습니다.

임기 동안 법안 92개를 개정하고, 16개의 법을 발의, 제정했습니다. 주로 장애인, 노인 등 소외계층을 위한 법률이었습니다.

국회의원 가운데 활동도 가장 왕성했고 임기 종료 시 공약실천에 대한 모니터링 결과 전 의원 중 4위에 랭크됐습니다. 재개발 문제 하나 제외하곤 전부 저는 공약을 실천했습니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의정활동을 하셨는데 결과에 만족하셨습니까?

열심히 해 봐야 뭐 합니까. 줄을 잘 서야지. 저는 ‘친이’도 안 하고 ‘친박’도 안 하고 그냥 의원 직분에만 충실했습니다. 모름지기 국민들을 생각해서 일을 했는데 ‘친이’를 했다고 낙인이 찍히는 바람에 정치도 못하게 하고, 기회도 안 주고 그런 입장입니다.

정치인들이 정말로 국민들을 생각하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줄서기 바쁘고, 눈도장에만 신경 쓰고, 계파정치 일삼고 하는데 이런 거는 빨리 시정이 돼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개혁하기 위한 활동은 안 하셨나요?

저는 ‘민본21’(2008년 9월 4일 발족된 한나라당 내 18대 초선의원 모임)에도 동참하고 당내 개혁을 위해 적극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이를 왜곡된 시선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못 마땅하게 비쳤겠죠.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잘못 보여 져서 정치행로가 어렵게 된 것 같습니다.

-현재 지역구 상황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지역구가 부실지구당이 되고 사실 조직책을 구하는 입장인데 당연히 공모를 해서 조직책을 선정해야 함에도 이 지역만 유독 지명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이 지역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을 지구당 당협위원장으로 내려 보내는 등 과연 이게 민주 정당, 공당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지역에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몰라도…. 저에 대한 모함성 유언비어가 있었습니다. ‘윤석용이 조직이 없다’, ‘인기 없다’는 등 얘기가 있어 제가 주민 12000명에게 서명을 받아서 탄원서를 올려도 묵살해 버리고, 새로운 사람에게 지역을 맡기는 등 행태가 벌어지고 있어 이 지역 사람들은 섭섭함과 함께 공분을 느끼는 그런 입장입니다.

-강동을 당협 위원장 교체 가능성은 있다고 보십니까.

잘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특히 당 지도부의 행태가 국회 총선을 대비해 다수당을 차지해 국정을 안정되게 이 정부가 끝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우선 당권을 잡겠다, 다수세력이 되겠다는 목적으로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당협 위원장 지명 기준이 흐려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 받아야 되지 않나 그렇게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적 재기가 힘들지 않겠습니까. ‘친이’ 세력은 모두 없애는 방향으로 당무를 끌고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당에서 상향식 공천제도를 도입하고 있어 희망을 걸어봅니다. 그러나 일부 지역구에서는 상향식 공천에 역행하는 불공정한 행위가 있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현 국회의원이 대의원과 당원에게 모두 전화를 하고, 성향 분석을 모두 해 버리는 등 사례가 있어 상향식 공천 제도를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국회 폭력 방지법도 발의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회의원 중에는 우수한 분이 많이 계시는데 국민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공천시스템입니다. 당 지도부 한사람의 소속이 되어야 하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폭력, 폭언, 과잉행위 하는 의원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작용도 공천시스템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과잉 충성할 필요가 없어 사라지겠죠.

이를 제도적으로 막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발의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현행 국회선진화법도 식물국회를 만드는 등 문제점이 있으므로 개정해야 되지 않나 그렇게 봅니다.

-한의사로서 ‘한의약 활성화 방안’ 공청회 등도 개최했습니다.  개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의학은 민족의학이고, 100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 모두가 이 의학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위축되게 됐습니다. 한의학은 치료의학으로서 발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의학이라 함은 ‘일침 이구 삼약’(一針 二灸 三藥 ; 간편하고 신속한 효과의 침을 첫째로, 뜸을 두 번째로, 마지막으로 약으로 치료 하는 것을 일컬음) 인데도 약 분야가 제도권에서 제외되어 버렸습니다. 즉 의료보험이 안 된다는 겁니다. 약을 빼버리니까 침구사가 되는 겁니다.

현대병, 만성병도 한의학에서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불임병, 중풍 등은 한의원에서 치료합니다만 요새 젊은이들은 잘 오지 않습니다.

한의학 현대화를 위해 첨단 과학기자재를 사용해야 하고 한약을 먹기 좋은 형태로 만들어 신약 형태로 개발해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의약품으로 분류되게 됩니다. 의약품은 의사, 약사만 취급할 수 있고 한의사는 안 되는 게 현행법입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공청회를 열고 노력했습니다만 결국 의사, 약사 출신 의원들의 반대 등으로 좌절되었습니다.

-국회 ‘군기반장’이란 별명은 어떻게 얻게 되셨나요.

국회에 입성해 보니까 가관이었습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도 안 지키고, 회의 참석도 안 하고 점심 먹고 전부 없어집니다. 등원 후 사나흘 동안 자리 배치가 완료되기 전 당시 박근혜 대표가 제 뒤에 앉았습니다. 초선의원으로서 국회의 잘못된 관행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지적했죠. 그러자 박 대표가 ‘군기반장하세요’하더라고요. 그 후부터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대한장애인체육회장으로 활동하셨죠?

제2대 회장을 역임했죠. 가슴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주로 장애인 인권, 복지 운동을 저는 장기간 해왔습니다. 장애인 체육에 대해 나름대로 조예가 있었고, 지난 88장애인올림픽 이후 줄곧 이 분야에 관여를 해 왔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제가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어 맡게 된 거죠. 자화자찬 같지만 재임 기간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제 자신 판단합니다.

▲ 윤석용 전 국회의원은 소외계층과 통일을 위해 초선 시절에 다 못했던 포부를 계속해서 펼칠 것을 다짐했다. 사진 : 김경복 기자

-대한장애인체육회장으로 활동하시다가 고소, 고발 사건에 연루돼 심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결국 법원 판결 결과 대부분 무혐의 처분을 받으셨는데요. 그 전말을 말씀해 주십시오.

회장의 신분이었던 사람으로서 말하기 뭐 합니다만 대한장애인체육회에 들어가 보니 일 년에 400억 정도의 예산을 쓰는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들어가기 전에 한 번도 감사를 받아본 적도 없고 그랬습니다. 400억이나 되는 국민 혈세가 유용되는 것을 막아보고자 감사실도 만들고 회계법인의 외부감사도 받았는데 많은 비리가 적발됐습니다. 그래서 계도도 하고, 환수조치도 내리고 했습니다. 심지어 산하 한 연맹에서는 간부가 애인에게 차를 사주고 하는 등 비리가 심각했습니다.

이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이 단체 사무총장이라는 자에 대한 횡령 건을 아래 직원이 고발해 왔습니다.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저는 당사자들이 다치지 않게 온건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관련된 서류가 당시 상대 정당인 야당(민주당)에게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가 국정감사 기간이었습니다. 야당이 ‘윤석용 비리를 전해 주면 이를 국정감사에서 거론치 않겠다’고 유혹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사무총장)이 만들어 낸 것이 전기매트를 횡령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장애인에게 전기매트를 합법적인 방식으로 소개했는데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를 빌미로 당시 야당은 저를 정치자금법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 횡령 등의 혐의로 고발을 했습니다. 이밖에도 우리 직원들이 민주노총과 관련됐는데 거기에 폭력, 주민투표법 위반하고 같이 엮어서 고발한 겁니다. 앞의 세 혐의가 벗겨지면 뒤의 두 혐의를 갔다 대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 때 또 문제가 생겼는데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하는데 그 때 제가 직능총괄본부장을 했고, 나경원 후보(상대 후보는 현 서울시장인 박원순 후보)가 여기 체육회 이사를 했습니다.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 같은 혐의 내용을 야당 측에서 정치쟁점화한 것입니다. 윤석용, 나경원에게 막대한 대미지(damage)를 줄 수 있는 사안이다 해서 민주당에서 정치자금법 위반 등으로 고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론에 대문짝만 하게 나오고 해서 저희들은 매도당하고 엄청난 시련을 겪었죠.

-이 사건으로 19대 공천에서 배제되는 등 여야 갈등의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사실입니까?

이런 악재에다 친이계라고 분류돼 19대에서 공천도 못 받았습니다. 검찰에서는 당초 고발 건에 대해 기소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가 바로 공천 결정 당일에 기소를 해버리고 해서 커다란 낭패를 보게 된 것입니다.

모두 다 지금 무죄가 나왔지만 정치도 못하고, 체육회도 위상도 낮아지고 해서 결국에는 장애인체육회 입장에서는 자승자박에다 자해행위를 해버린 양상이 되었죠.

-이젠 사법부의 판결로 모든 게 정리됐습니다. 정계 복귀에 대해서는 어떤 복안을 가지고 계신지요.

인생이 뜻대로 되지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젊을 시절과 달리 여러 가지 고초를 겪다보니 신앙에 많이 의지를 하게 되고 또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최선을 하지 않을 수 없겠죠. 하여간 당에서 상향식 공천을 한다면 한 번 더 재기를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권토중래(捲土重來)해 볼 각오입니다.

많은 주민들께서도 이 같은 저의 뜻에 동조해 주시고, 억울한 사정으로 공천을 받지 못한 것 또한 지역 주민들이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재기에 진력(盡力)할 생각입니다.

▲ 윤석용 전 국회의원은 정쟁의 회오리에 휘말리면서 실로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진 : 김경복 기자

-정계에 복귀하신다면 어떤 의정활동을 펼치실지 궁금합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 같이 소외계층을 위해 의정활동을 열심히 펼칠 것이라는 점입니다. 장애인관련법을 임기 중에 많이 정비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있습니다. 장애인법, 사회복지법 등에 관해 너무 이해 당사자들의 상충관계가 심해 결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완결을 짓고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우리나라 급선무가 노인문제입니다. 고령사회를 앞두고 대응방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노인문제에 대한 좋은 대안을 제시해 정책화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셋째는 통일에 대한 준비과정입니다. 저도 한 때는 통일지상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걱정이 큽니다. 당장 통일이 돼 북한주민이 남한으로 오면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사례를 들어보면 북한주민의 의료보험료는 누가 냅니까. 연금은 어떻게 지급하고, 화폐 등등 문제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를 지금부터라도 차분히 정리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는 통일 후에는 재앙이 옵니다. 저는 30, 40년 동안 이를 연구해 왔습니다. 통일에 대비한 준비가 시급한 때입니다. 제가 가슴에 담고 있는 포부를 잘 펴 보이겠습니다.

넷째는 우리 사회 전반이 갈등구조라는 점입니다. 세대간, 지역간, 계층간, 도농간 갈등 등 이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는 제도가 없으면 나라가 안정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통합 문제를 국회에서 처리해야 하는데 난망합니다.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국민을 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앞장서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시사포커스 / 김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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