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 IQ 210,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김웅용 교수. 그는 단지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는 것 뿐이지만 세상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실패한 천재’라는 혹평을 내린다. ⓒ 시사신문

최근 개봉한 영화 <플랜맨>의 주인공 한정석(정재영 분)은 IQ 200의 천재다. 그는 어린 시절 TV 프로그램에도 다수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탔지만 많은 관심과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강박증에 시달리며 성장하는 ‘비운의 천재’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은 모티브로 삼은 실제 인물이 있다. 바로 ‘한국의 아인슈타인’ 김웅용(51) 신한대 교수.

그는 1살 때 한글을 이틀 만에 떼고 3살 때는 그가 쓴 글과 그림을 모아 책을 펴냈다. 5살 때는 영어·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6살 때는 미적분을 풀어내며 세상에 놀라움을 안겨줬다. 그리고 8살 되던 해 그의 천재성을 인정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며 나사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일본 후지 TV에서 실시한 IQ 테스트에서 그는 210이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기록하며 기네스북에 등재되며 세계적인 ‘천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쏟아지는 관심과 낯선 타지 생활은 그에게 부담으로 다가왔고 홀로 떠난 미국생활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던 그는 1981년 한 지방 국립대학교에 입학했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천재’로 불렸던 그에게 세상은 ‘실패한 천재’라는 혹평을 쏟아냈다.

그렇게 그는 점차 세상의 관심에서 잊혀져 갔다. 유년시절부터 받아온 세간의 관심, 그리고 어느 순간 쏟아진 혹평…. 그렇게 세상은 그에게 수많은 이름을 부여했지만 그는 그저 평범하게 세상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에 묻혀 살아가던 ‘실패한 천재’가 대학 강단에 서게 됐다. 2014년의 시작과 함께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세상은 그에게 ‘실패한 비운의 천재’라고 이름 붙였지만 그는 지금 ‘성공한 천재’로의 반환점에 서 있다.

또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해 나가는 ‘천재’ 김웅용 교수를 13일 <시사포커스>가 만나봤다.

“美 NASA 연구원 생활, 감옥에 갇혀있는 기분”
“‘실패’라 생각 안해…살고싶은 삶 사는 것 뿐”
“교수 임용 마지막 꿈 아냐…연구 매진 할 것”

[김웅용 교수와의 일문일답]

Q. 우선 교수로 임용 되셨음을 축하드립니다. 일각에서는 ‘교수’가 오랜 꿈이셨다고 말하는데, 교수로 임용되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 뭇 언론에서는 제가 교수로 임용된 것에 대해 ‘꿈을 이뤘다’고 표현을 하는데 사실 교수가 궁극적인 꿈은 아니었어요. 단지 일부 언론에서 제 오랜 꿈이었다고 하는데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 1977년 기네스북 43페이지에는 공식 IQ 수치 210을 기록한 김 교수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 시사신문

Q. 유년시절 미국 나사로부터 초청받아 연구원으로 일하며 승승장구 하시던 중 갑작스럽게 귀국하셨습니다. 세간에서는 교수님께서 돌아오신 이유에 대해 온갖 추측을 내놓고 있는데요. 귀국하신 이유에 대해 직접 들어보고 싶습니다.

- 저는 8살 되던 1970년에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매우 어렸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부모님 없이 혼자 떠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해외를 나간다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였어요. 지금은 항공편도 잘 되어 있고 비자 문제도 수월한 편이지만 그 당시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이 따랐던 시기다 보니까 미국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그냥 혼자 떠난겁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함께 의지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고 그래야 할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 저와 함께 있던 미국 학생들의 연령대는 적게는 18살부터 23살까지였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그들이 즐기는 문화를 함께 즐길 수가 없었죠. 그들은 운동하고 술마시는 문화를 즐기는게 대부분이었는데 전 그곳에 낄 수가 없었어요. 그들은 술 먹고 이런 문화가 당연스러운 것인데 저는 그 자리에 함께할 수가 없었던 때잖아요. 그렇다고 운동을 할 수도 없었죠. 물론 할 수는 있었지만 저랑 한 팀이 되는 쪽은 무조건 지게 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저도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도태되게 된 거죠.

잠깐이면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7년을 혼자 그렇게 보내다 보니 결국 어느 순간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사춘기도 왔습니다.

▲ 그가 1살 때부터 3살때 쓴 글과 그림을 모아 책으로 엮어낼 만큼 그는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다. ⓒ 시사신문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마음대로 전화를 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였고, 화상전화나 인터넷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니까. 외로웠던거죠.

저는 그 당시 정말 감옥에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혼자 공부를 해서 나온 결과에 대해 논문이라도 발표하고 할 수 있어야 뭔가 성취감도 느끼고 할 수 있을텐데 당시 상황상 절대 그런것들이 금기되어 있었어요.

그 당시는 미국과 구 소련이 냉전상태면서 양국이 우주 공간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 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온 나라에서 국방력, 군사력, 과학분야에 온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보니 하나라도 연구가 발표되면 자기들이 가진 정보를 유출한다고 생각해서 논문 유출을 금지시켰어요.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연구해서 결과를 내더라도 이를 밖에 낼 수도 없고 그냥 무용지물이 된거죠. 하나마나가 된거죠. 계속 그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고 싶어서 돌아온거에요.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급거 귀국’이라던가 ‘돌연 귀국’ 같은 것은 명백한 오해라는 것을 꼭 밝히고 싶어요.

저는 살고 싶어서 돌아온 것인데 남들은 참 쉽게들 묻더군요. ‘그 좋은 직장 두고 왜 나왔느냐’고.

Q. 만약 또 다시 그와 같은 제안이 교수님께 온다고 하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 저에게는 끔찍한 기억이에요. 다시는 안 갈 것 같습니다.

▲ 김 교수는 5살되던 해 이미 미적분을 풀어내는 등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을뿐 아니라 당시 측정한 공식 IQ지수가 210을 기록하며 ‘한국의 아인슈타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 시사신문

Q. 남들과는 다른 천재로서 주목받는 삶은 어떠셨나요?

- 결코 좋은 생활은 아니었어요. 저의 행동이나 생활 모두가 관찰 대상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구요.

Q. 미국에서 귀국 후 대학에 입학하신 이후 쭉 충북 지방에 사셨더군요. 본래 고향이 서울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충북에 연고를 두시고 계신 이유가 따로 있나요?

- 사실 관심 밖으로 피해 나간거에요. 제가 귀국한 후 보니 우리나라는 대학원은 무조건 대학 졸업을 해야지만이 진학할 수 있는 체계다 보니 제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더군요. 정확히는 초·중·고등학교 어디도 졸업장이 없는거죠. 그래서 대학 진학을 위해 검정고시 시험을 봤어요.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부터는 온 언론사의 기자들이 집 앞에 줄지어 서있고는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제가 대학도 못 나오고 하다 보니까 ‘실패한 천재’라는 둥 ‘부모가 가둬 키웠다’, ‘정신 이상자가 됐다’는 둥 말도 안되는 말들을 보도하기에 바쁘더군요. 그러다 보니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기자들을 피해다니다가 처음 접수한 검정고시도 제대로 못 치르고 결국 두 번째 검정고시 시험을 접수하고 충북 시험장에 내려가서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충북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그게 충북으로 떠나게 된 진짜 이유죠. 지금 제 아내도 충북사람이구요. 지금 저는 일 때문에 올라와 있지만 저희 가족은 모두 충북에 여전히 연고를 두고 살고 있어요.

Q. 그렇게 언론에서는 교수님을 두고 ‘실패한 천재’라는 혹평을 내리기도 했는데요. 그런 말들에 대해 상처를 받진 않으셨나요?

- ‘실패’라는 것이 극히 주관적인 얘기 아닐까요? 저는 제 자신을 굳이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굉장히 어렵고 힘들었던 곳을 빠져나와서 편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인데 그에 대해 굳이 실패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싶어요.

Q. 그렇다면 그런 억측에 굉장히 상처를 많이 받으셨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해명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 따로 없어요. 법적인 소송을 걸거나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살다 보면 다른 것에 신경써야 할 일이 더 많잖아요. 그러다 보니 그냥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냥 하지 않았던 것 뿐입니다.

▲ 김 교수가 30여년을 몸담아 온 전 직장 ‘충북개발공사’를 떠나오던 당일, 함께 일해 온 동료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전 직장을 떠나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오히려 고맙다”고 말한다. ⓒ 뉴시스

Q. 전 직장에서 꽤 오랜 기간동안 일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듯 갑작스럽게 이직을 하셔서 아쉬움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어떠신가요?

- 사실 갑작스러운 이직은 아니에요. 원래 교수가 되고자 30곳 이상의 대학에 출강도 나갔었고 틈틈이 연구도 하고 준비도 해 왔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운 좋게 이번 기회에 교수에 임용이 된 것이구요.

전에 다니던 직장은 충북개발공사인데 약 30년을 몸담아 왔던 곳이에요. 그 곳에서 일하면서 참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하고 당시 회사가 설립하면서 모든 체제와 기반을 마련했던 일명 ‘오픈 멤버’ 였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가는 것 같아요. 아쉽다기 보다는 지금은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제가 이번에 교수로 임용된 것이 이슈화 된 것은 전 직장에서 이 사실을 보도자료로 만들어 대대적으로 알려준 탓이거든요. 제가 다른 쪽으로 옮겨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해서 제 임용 사실을 알려줬다는 것은 저를 좋게 봤다는 것이니까요. 그저 고맙죠.

Q. 교수님께서 다섯 살 때 IQ가 210을 기록하며 기네스북에 등재됐다고 들었습니다. 여전히 유지하고 계신가요?

- 글쎄요. 그 이후로 따로 재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Q. 교수님만의 특별한 공부법이 있으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 특별히 없어요. 깨달음이란 선으로 표현하면 1차식이나 유연한 2차 곡선이 아니고 계단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지식의 크기가 커져 있다는것이죠. 다만 호기심과 흥미를 가지고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 김 교수는 교수로 임용되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강의가 가장 흥미있고 가치있는 수업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답했다. ⓒ MBC

Q. 그렇다면 앞으로 교수님께서 이루시고 싶은 꿈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 처음 시작한다는 것은 무한한 꿈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뻗어나갈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처음 교수 생활을 시작하는 만큼 학생들에게는 제가 가르치는 강의가 가장 흥미있고 가치있는 수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제게 배운 학생들이 장차 사회에 진출해 자신의 맡은 바 역할을 다 하는 우수한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그리고 연구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딱히 분야가 정해진 것은 아니에요. 제 전공과목인 토목공학이 될 수도 있고, 물리학이 될 수도, 수학이 될 수도 있죠. 이제부터는 저와 관심분야가 같은 국내외 저명한 학자들과 자주 만나 말씀을 나누고 조언을 듣기도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연구해서 사회에 바람직한 결과물을 내 놓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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