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만남'에도 성공은 있다

한국 코미디 영화에는 모종의 강박관념이 있다. 아주 간단하지만 어찌보면 아주 기묘한 것으로, 영화의 초반과 중반부에는 갖은 슬랩스틱과 비속어를 동원해 사정없이 웃기다가도 후반부에 이르면 짐짓 심각한 무드로 끌고가 관객에게 '눈물과 감동'을 선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칭 '이규형 공식'이라 불리우는 이 기괴한 쟝르교배 형식은, 사실 더 돌아가면 '얄개 공식'이고, '구봉서 공식'이며, 결국 해방 후의 '악극 공식'이다. 이 케케묵은 공식에서 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해선, 대중예술의 기본조건을 읊을 수 밖에 없다. 바로, 관객이 그런 구조를 원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정없이 웃겨대기만 하는 영화는 '가볍고', '무의미하다' 생각하면서, 결국 끄트머리에 생색내기처럼 진지한 톤으로 한번 빠져줘야만 '제대로 된 영화 한편 봤다' 소리가 나오는 이 맹랑한 구조. 웃음도 지성인이 내뿜는 날카로운 냉소는 싫어하고, 서민 계층의 말장난이나 슬랩스틱에만 박장대소하며 반응한다. 하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이미 산업적인 요소가 팽배해버린 영화라는 쟝르에서, 관객이 원하지 않는 영화는 나올 '가치'조차 없는 셈이니까.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이준익 감독, 박중훈, 정재영 주연의 역사 코미디 "황산벌"은, 기존의 한국 코미디 강박관념에서 털끝만치도 어긋나지 않는 영화다. 오히려 이런 부분이 강화되어 있다. 하지만, "황산벌"은 이런 '웃음+눈물'의 허접한 구조가 가장 설득력있게 조화되어 있는 케이스로서 부분적인 치하를 해주고 싶은 영화다. 말하자면, '한국 코미디 형식'에 반기를 든다기보다 개선을 꾀한 영화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잡종교배 형식의 한국 코미디가 본받아야할 좋은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일단 "황산벌"의 초반과 중반부를 보자. 이미 오프닝의 '4자 정상 회담' 장면에서 관객의 웃음보는 터져버린다. 현대어투와 과거어투의 혼합, 현대상황과 과거상황의 혼합으로 관객의 허를 찌르는 이 장면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실패해버린 바로 그 지점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기에 많은 바를 시사하고 있다. 이런 식의 과격한 '시제혼합'은 '웃기기 위해서'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이지,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는다니 하는 이유로는 용납되기 힘든 것이다. 여기에 물론, "넘버 3" 이후로 유행처럼 번진 '사투리 개그'가 한 몫을 더한다. 이 오프닝 후로도 "황산벌"은 재빠르고 아기자기하게 움직인다. 하나의 개그펀치를 지리하게 반복 사용하는 과오를 범하는 대신, 많은 아이디어들을 숨겨 놓고 하나씩 하나씩 보자기에서 꺼내어 쓰면서 관객들의 흥미를 꾸준히 유지시켜 주는 능란함을 보여준 것이다. 황산벌에서의 백제군과 신라군의 대치상황을 담은, '탐색전', '신경전', '맞짱', '심리전' 등으로 나뉜 섹션들에서 이런 풍부한 아이디어의 보유와 '하나씩 풀어내는' 여유가 잘 보여지는데, 여기에 '너무 오버하지 않는' 적절한 자제와 '너무 오버해 버리는' 폭발이 순차적으로 잘 꿰어져 있어 관객의 혼을 빼버린다. 이제 앞서 말한 '웃음'과 '눈물'의 부조화 매칭을 어떻게 소화해 냈는가로 들어가보자. "황산벌"의 초반부에는 관객들에게 당혹감을 선사하는 장면들이 몇 있다. 여유있는 모드로 꾸준히 웃기다가도, 발작적으로 이야기의 맥을 끊는, 다소 잔혹한 묘사들이 삽입되는 것이다. 중반으로 이르면 웃음의 농도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오버해 버리고, 이런 잔혹한 묘사들 - 특히 '심리전' 섹션의 인간장기 장면 - 도 도를 지나친 듯 보인다. 이미 유쾌한 코미디인지 잔혹한 시대극인지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상태가 되었을 때, 바야흐로 문제의 '진지한 톤'으로 넘어가, 웃음의 정도를 낮추고 잔혹한 묘사들, 드라마성이 크게 부각된 장면들이 몰아닥치는 것이다. 칼로 무자르듯 2:1 비율로 웃음과 눈물의 장면을 이어붙였던 과거의 '한국형 코미디'들이 범한 과오를, 이준익 감독과 최석환/조철현 각본팀은, 코미디만 강조된 파트도, 드라마만 강조된 파트도 없도록 치밀하게 구성해 놓아 깔끔하게 극복해낸 것이다. 이 영화는 이 밖에도 많은 장점들을 지니고 있다. 박중훈과 정진영의 '드라메디'(dramedy) 연기도 적절한 선을 잡은 뒤 꿈쩍않고 서로 좋은 대칭을 만들어내며, 이문식을 필두로 한 조연급 연기자들도 모두 개성있는 역할로 열연했다 - 이 영화는 조연들의 기량이 여실히 드러나는, 성공적인 '다중 캐릭터 무비'로도 칭찬받을 수 있을 법하다. 세트디자인과 의상디자인은 그 자체가 영화의 톤을 압도하지 않도록 소박하고, 조금은 투박하게 조정되어 있는데, 충분한 실효를 거둔 것으로 보이며, 유일하게 단점으로 작용하는 클라이맥스의 액션 씬도 비록 면밀히 계산되지 못해 난잡한 컷 이어붙이기라는 느낌이 들긴 해도, 상황전달마저 안 될 정도로 엉망인 상태는 아니다. 어떤 잘못된 시스템에도 성공사례는 있다. 15분마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30분마다 폭력장면이 나와야 하는 혹독한 로져 코먼 공식 내에서도 마틴 스콜세지는 "공황시대"를 만들어냈고, 성인적인 묘사가 절대 등장해선 안 되는 상황에서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만들어냈다. "황산벌" 역시 이런 맥락에서, 앞서 말한 가히 폭압적인 한국 코미디 내러티브의 조건 하에서도, 과거 성공사례를 답습하는 안이함 대신 도전적인 수정주의 의식을 지닌다면, 결국 해결책은 발견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시켜 주고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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