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점을 지닌, 그러나 근본적인 실패작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이하 "스캔들")는 독특하게 시작된다. 책장을 펼치며 책내용을 설명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액자식 오프닝은 적어도 한국영화에선 보기 드문 시도인데, 여기서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진다. 화려한 색채의 음화책이 펼쳐지며 옛 말투의 설명이 읊조려지는 가운데, 그만 바흐풍의 '왈츠곡'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독특한 시도일 수도 있다. 프랑스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담으며 조선시대의 무대와 의상을 '입히기만' 한다는, 마치 구스 반 산트의 컬러판 "싸이코"처럼 무의미한 몽상적 시도. 그러나 오프닝이 끝난 뒤 조원(발몽)과 조씨부인(메르떼이유 부인)이 마주치는 장면에 이르면 음악은 갑자기 조선시대의 타악으로 바뀌어버린다. 이런 기괴한 음악 배치가 또 있을까. 그러나 영화가 흘러갈수록 오락가락하는 음악 배치에는 더 이상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진다. 영화 전체가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혼란스런 과정 자체가 주제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이 영화는 끝없이, 마치 그 사실 자체를 즐기듯이 뒤죽박죽 댄다. 인물들의 대사만 봐도 그렇다. 어색하다 못해 실소가 터져나올 정도로 현대적인 어투와 사극 어투가 이리저리 뒤얽혀 있다. 지극히 고전적인 단어들이 나열되다가도 갑자기 '저자세'니, '희생자'니, '불가항력'이니 하는 현대식 한자조어가 등장하고, 이에 따라 배우들의 연기 톤도 현대극과 사극을 오고가며 엉망진창 쇼를 만들어낸다. 마치 한복을 입고 현대식 죠크를 지껄이는 TV의 단막 희극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런 혼란스런 모습이 '설정'일 수 있음을 암시해주는 장면이 한 컷 등장하긴 한다. 극중 인물의 방 안에 서양식 탁상시계가 놓여있는 장면이 그것인데, 이 장면을 내세우며 "서양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한 18세기 '변화의 시점'이 배경이기에, 이런 혼란감을 표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현대극과 사극의 요소를 뒤섞어 놓았다" 는 식으로 '해설'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설정이건 그것이 일반적인 센스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그 의도의 진지함이나 독창성 여부와 관계없이 그 설정은 이미 실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며, 이런 점에서 "스캔들"이 '의도했을 지도 모르는' 방향설정 역시 이미 시작단계부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기본 구조와 방향성이 흐트러져 있는 상황일지라도, 영화 전반부의 경우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18세기 프랑스가 무대인 원작을 18세기 조선시대로 끌어오면서 생긴 '변환점'들, 프랑스의 살롱문화와 달리 조선에는 남녀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이 없었다는 딜레마를 '비밀 천주학회'라는 장소설정으로 멋지게 해결해 버린 점, 생소하기만 한 조선시대의 책방 '서사'의 등장, 양반계급의 한가로운 삶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뱃놀이 장면 등, 다양한 '조선적' 상황 설정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해 흥미를 돋우고, 시각적으로도 화려하여 그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조선시대를 본다는 쾌감을 전해준다. 하지만 이런 기발한 '대체 아이템'들이 바닥나는 시점, 이제 무대 및 시대/사회 설정은 끝나고 굵직한 중심 줄거리로 흥미를 끌어 나가야 할 중반부에 이르면, 영화는 연출상의 역량부족과 배우들의 안이한 연기, 멜로드라마적 통속성을 요구하는 구시대적 상업주의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자멸해 버리고 만다. 기획상의 잇점이 다 팔리고 연출력이 요구되는 순간부터 영화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연출을 맡은 이재용 감독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돌려야 할 부분이다. 더군다나 몇 장면, 특히 조원이 소옥(세실)을 편지를 매개로 유혹하는 장면이나, 이 사실을 소옥이 조씨부인에게 고백하는 장면 등은 원작을 분석했다기 보다 스티븐 프리어즈 버젼의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이 짙어 불신감까지 불러 일으킨다. 이 영화에는 앞서 말한 대체작업에서의 기발한 아이디어들과 상당히 공들인 세트/의상 디자인, 유려한 촬영 등 장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단점들은 영화제작, 아니 예술창작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가장 근원이 되는 요소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실패작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 화려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잘 삽입된 아이디어들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 영화가 기본적인 영화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면, 지금의 상태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뿐더러, 훨씬 더 엔터테이닝하고, 훨씬 더 가치있는 번안작업이 되었을 것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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