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번에 죽어나 볼까? 자랑스럽게도 자살률 OECD 5위, 하루 36명씩 자살!

이제 급속히 변화하는 트랜드를 앞서나가려면 자살을 해라? 연일 신문에서는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살 사건을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로 방치해서는 안되며 사회가 나서서 체계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0년 만에 자살인구가 두 배로 증가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자살 동기의 70%는 생활난 비관·병고이기에 더 이상 자살을‘평소 우울증을 앓아왔으며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있는 이들이 충동적으로 내리는 결론’이라고 못 박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 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족동반자살. 지난 7월 17일 자신이 없어지면 고생할 것이 뻔하다면서“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린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한 주부의 비극, 또 빚을 졌다면서 부부와 아이들이 낚시터 옆에 세워둔 차안에서 함께 자살한 사건 등 생의 의지를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 여건이 IMF 위기 때보다 더 나쁘고 사회 불안이 심화되어 올해의 자살자 수가 2002년보다 훨씬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이 대로 방치할 순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사회 안전망을 대폭 확충하고 무한경쟁의 그릇된 사회분위기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 같은 사회정책과는 별도로‘자살충동은 충분히 치료 가능한 의학적 상태’라는 관점에서, 정신 상담 및 치료 시설 확충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종합적인‘자살 예방 대책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자살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 인간의 자살을 놓고, 1920년 프로이트는‘죽음의 본능’(thanatos)설을 내놓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악착같이 성공하여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죽고 싶은 본능도 있는데 이 양자는 인간생활에서 적절하게 혼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언가 격렬하게 증오하여 파괴하고 싶은 본능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 에리히 프롬은 경쟁이 지나치게 심하고 소외감, 고독감을 부추기는 사회에서는‘죽음의 본능’이 강하게 나타나고 마침내는‘집단적 자살 충동’내지‘집단적 적개심’이 퍼지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은 극심한 불황, 끝이 보이지 않는 실업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사회 속에서 만성적인 우울에 시달리고 있다. 희망 없고 우울한 사회. 거기서 자살 바이러스는 급속한 속도로 우리를 좀먹고 있다. 사람들은 최근 자살뉴스를 보면서 불현듯‘나도 죽어버릴까’하 는 생각과,‘이러다 나도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는 중이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소중한 생을 마감하려 할까? 과연 그들에겐 자살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걸까?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에 살아남는 것은 개인의 몫이 되어버렸고 주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빠진 사람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좌절을 견디는 힘이 약하다. 사실 어려운 시절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좌절에 약해진 사람들은 쉽게 절망하고 충동적이 되어간다. 마음에 안 드는 게임을 다시 시작하고 컴퓨터를 부팅하듯 인생 또한 그럴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는‘리셋증후군’의 일환으로 사람들은 자살을 택하게 된다. 더구나 자살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태도가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기도 한다. 사실 누구나 자살 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다는 설문조사를 보듯 인간은 자살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진다. 또한 매스컴은 자살 사건을 하나의 흥밋거리처럼 호들갑스럽게 보도한다. 자살 당시의 심리상태를 추정하고,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도하면서, 그들을 죽게 만든 사회를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살은 감상적인 것도 아니고, 누굴 탓할 것만도 아니다. 자살은 대다수가 우울증 같은 정신과적 질환의 증상일 뿐이다. 즉 희망을 상실하고 절망에 빠진 환자들이 고통을 표현하고 도움을 청하는 하나의 소통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전염성이 매우 강한 바이러스와도 같다. 그래서 경제적 위기가 확산될 때 같이 혼란스러운 사회에서는 자살은 공포에 질린 사람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확산된다. 우리는 자살에 대해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이 될 필요가 있다. 자살을 죄악시하거나 동정하는 태도는 자살의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뿐이다. 매스컴은 더 이상 사회 탓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자살은 병일 뿐이며 치료받으면 나을 수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들이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길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는 환자들이며,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살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나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살 권하는 사회? 자살예방대책이 필요하다 자살 연구의 효시가 된 <자살론>의 저자 에밀 뒤르케임이 개인이 사회집단과의 결속에서 끊겨 나온 결과 생기는 사회 심리적 고립 현상을‘아노미’(anomie)라 하고,‘아노미’가 현대사회에서의 자살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자살이 경제불황 때 증가한다는 보고 외에 실증적인 여러 연구에서‘자살의 책임이 사회에 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자살의 책임이 사회에 있다’는 협소한 인식이 정부의 정책, 사회제도나 사회집단의 문제를 비판하기에는 좋을지 몰라도‘자살을 예방 가능한 의학적 상태’로 보고 적극적인 범사회적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뿌리내리는 데는 오히려 장애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자살을 예방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비교적 안정된 서구사회에서 오히려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민생안정, 사회갈등 해소, 사회구조 개혁, 사회 안전망 구축 등의 사회정책이 저절로 자살률을 낮추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자살의 책임을 사회로 돌리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그리 타당할 것 같지 않다. 앞으로 경기침체, 사회적 변화와 갈등, 가정붕괴, 경쟁심화 등 여러 요인으로 사회 심리적 고립을 경험하는 개인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이 자살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별도의‘자살예방대책’이 필요하다 자살을 그 자체로 보고 사회정책과는 독립된 별도의 ‘자살예방대책’과 프로그램이 필요한 때다. 무엇보다 자살에 대한 사회 저변의 인식을 높이고 스스로 대처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실제 신경정신과 치료를 안 받는‘보통 사람’이 정신질환으로 치료받는 경우보다 더 많이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에 대한 의사 표시를‘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어서 하는 말이겠지’정도로 가볍게 보고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도 많다. 자살하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구조 요청’(cry for help)을 한다고 한다. 다만, 그러한 구조 요청에 우리가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의 책임’이 사회에 있다기보다는‘자살을 예방할 책임’이 사회에 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자살은 사회와 개인의 책임, 끝없는 불황 속 ‘자살 狂風’이 번져간다 사회를 향한 원망과 생명경시풍조가 맞물리면서 전염병처럼 번지는 서민들의 자살러시를 막을 대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지만 당국은 손을 놓고 있다. 최근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부의 책임 있는 대응을 촉구하고 나섰다. 참여연대, 한국노총, 민주노총,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7월 31일 낮 안국동 철학마당 느티나무 카페에서‘신 빈곤 해소를 위한 10대 우선 과제’를 발표했다. 이들 단체들은“IMF 외환위기 이후 장기실업과 서민층 몰락 등으로‘신(新)빈곤층’형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며 “최근 빈곤층의 자살사건이 잇따르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어 빈곤 문제 해소를 위해 10대 과제를 설정했다”고 밝혔다. 박상증 참여연대 대표는 “생존을 넘나드는 빈곤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IMF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 위기는 우리 사회가 개발독재형 성장패러다임에 근거한 고성장 시대를 마감하고, 이에 분배를 고려하는 균형적 성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며 “IMF 외환위기 이후 장기실업과 이로 인한 서민층의 몰락, 일하는 빈곤층의 출현 등 새로운 빈곤층 형성에 대한 사회적 경고가 이어져 왔다”고 지적하였다. 서민층의 몰락과 함께 벌어지고 있는 의지의 몰락. 이제 자살을 보는 시각은 사회적 타살로 변해 가는 듯 하다. 빈곤층의 생활고로 인한 각종 자살이 이어지는 요즘, 사회의 개선노력이 더 이상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이 아니길 촉구한다. 글/ 남정민 기자 njm8309@sisa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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