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특정 대기업 비난의 목소리 거세

재계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진지 오래 재계가 연일 몰골이 말이 아니다. 최근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10월 회장단 회의는 근래 들어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회의는 예상대로 삼성 이건희(李健熙), LG 구본무(具本茂), 현대차 정몽구(鄭夢九), SK 최태원(崔泰源) 등 4대 그룹 총수는 누구 하나 참석하지 않았다.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려고 강신호(姜信浩) 전경련 회장이 특유의 유머로 웃음을 유도하려고 했지만 참석한 8명 회장의 얼굴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 회장단 회의의 위상이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 모습이었다. 숨죽인 재계를 들여다봤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등 경제 5단체는 당초 지난 7월 말 단체장들이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대(對) 정부 건의문을 발표하려 했으나 이후 불거진 일련의 사태로 이를 취소해 버렸다. 눈치없이 목소리를 높일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13일의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도 자칫 정부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회장단은 최근 특정 대기업에 대한 비판적인 분위기가 지나치게 확산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기업활동의 위축과 세계시장에서의 기업브랜드 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하였다. 특히 글로벌 시장에서 크게 성공한 기업을 비난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가치와 질서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는 발표문의 삽입 여부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포함됐을 이런 구절의 삽입 여부를 놓고 고심할 정도로 전경련은 위축돼 있다. ■ 재계, 총체적 난국 안기부 X파일 사건, 삼성에버랜드의 변칙증여 재판, 금융산업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 논란, 두산그룹 오너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 세수(稅收) 부족을 이유로 강화되는 국세청 세무조사 등으로 재계가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다. 덩달아 재벌 총수들도 바짝 몸을 낮추고 있다. 이런 시기에 괜히 입을 벙긋했다간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미국 휴스턴의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정밀진단을 받기 위해 지난 9월 4일 출국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진단을 마친 뒤 허리케인을 피해 9월 20일을 전후해 거처를 옮겼으나 이후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삼성 측은 이 회장의 거처나 근황에 대해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다만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이나 윤종용(尹鍾龍) 삼성전자 부회장 같은 수뇌부와의 핫라인은 항상 열려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지난 10월 5일 국회 재경위의 국감 증인 출석요구에 대해 ‘정밀검사를 빨리 마치고 건강한 상태로 귀국할 수 있게 된다면 바람직하겠지만 담당 의료진에 의하면 최종 검사결과가 나오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돼 국회 재경위의 출석요구일까지 귀국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내용의 불출석 사유서를 냈다. 해외체류가 예상보다 길어질 것임을 밝힌 대목이다. 이에 대해 전경련 고위 관계자는 “이 회장이 미국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아무런 이상(異常)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이 회장이 귀국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 대외 접촉은 거의 하지 않아 이건희 회장이 코너에 몰려있다면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편이다. 하지만 구 회장 역시 평소 스타일대로 대외적인 접촉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LG는 이미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터여서 상대적으로 지배구조 논란에서 자유로운 편. 대신 구 회장은 가까운 사람들과 곤지암 골프장을 자주 찾는다. 최근에는 LG그룹 연구개발 담당 임원을 대거 곤지암 골프장으로 불러서 골프와 회식을 즐겼다. 하지만 DJ정부 시절의 ‘빅딜’ 이후 불참하고 있는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다시 참석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재계의 대표단체인 전경련에서는 구 회장의 이런 행보에 대해 매우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다른 재벌총수는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재계의 단합을 위해 성의를 보이는데 ‘구 회장은 재계 단합에 무관심하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LG그룹이 전경련 회비는 가장 충실하게 내고 있지만 구 회장 자신이 책임있는 재벌총수답게 보다 적극적으로 재계를 위해 뛰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겉으로는 가장 활발한 경영활동을 보이고 있다. 정 회장은 최근에도 6일간의 유럽 순방에 올라 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 건립 현장과 프랑크푸르트 연구소 등을 둘러보며 직원들을 격려하는가 하면, 체코에서 총리를 만나 현대차의 체코공장 건립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도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아 보인다. 삼성그룹에서 이재용(李在鎔) 상무에 대한 상속 문제로 홍역을 치르는 모습을 보는 정 회장의 마음은 무겁다. 사실 삼성가(家)의 상속작업은 상당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단 큰 틀을 마무리 지었지만, 현대차의 경우는 정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鄭義宣) 기아차 사장에 대한 실질적인 지분 승계 작업이 아직 진행되지도 못한 상태다. 그래서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에서는 지금 삼성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면 현대차에 대해서는 자동적으로 ‘사전 진압’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에서는 기어코 한다면 해내는 스타일의 정몽구 회장이 이 문제와 관련, 어떠한 묘안을 짜낼지 주목하고 있다. ■ 최태원 회장의 선택, 주목거리 최태원 SK 회장은 그동안 수감생활과 ‘2년간의 소버린 악몽’ 등을 통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경영자로서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 회장은 자신을 둘러싼 경영환경이 반드시 자기에게 유리하지 않음을 알고 내부적으로는 경영권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동생인 최재원(崔再源) 부회장이 SK엔론의 대표이사가 되면서 형의 경영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도 재계의 관심사다. 일부에서는 성급하게 ‘SK그룹의 분가(分家)가 시작됐나’ 하는 관측이 나올 정도여서 최태원 회장의 선택이 주목된다. ■ 두산의 ‘형제의 난’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일으킨 두산그룹 오너 일가는 지금 완전히 패닉 상태다. 이미 대부분 가족이 출국금지된 상태다. 검찰은 박용오(朴容旿) 전 두산그룹 회장을 진정인 겸 피고발인 자격으로 불러 조사한 데 이어 조만간 박용만(朴容晩) 부회장과 박용성(朴容晟) 회장 등 다른 오너도 불러들여 비자금 조성 여부와 사용처 등을 추궁한다는 방침이다. 두산은 박용성 회장의 장남인 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가 검찰수사에서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를 일부 시인한 것으로 알려지자 불똥이 박 회장에게까지 튀는 것 아니냐며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밖에 김승연(金升淵) 한화그룹 회장은 당초 10월 초 헝가리를 방문, 페렌치 듀르차르 총리를 면담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으나 국감증인 채택 문제로 출국을 하지 못해 듀르차르 총리를 만나지 못했다. 김 회장은 국감증인으로 채택된 상황에서 출국할 경우 증인출석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나갔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면담 약속에도 불구하고 계속 국내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삼구(朴三求)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도 민감한 시기에 자칫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는 참모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KPGA 등 비경제분야 외에는 대외접촉을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 국성호 상무는 “연말을 앞두고 현장과 재계 현안을 바삐 챙겨야 할 총수들이 계속 활동을 꺼리면 내년도 사업운용계획 등 향후 기업경영에 안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서 “하루빨리 재계에 대한 압박이 사라지고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안정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스타와 영웅 대접을 받는 우리나라 재벌총수들이 유독 국내에서는 범죄자 취급받는 분위기가 혼란스럽다는 것이 전경련의 하소연이다. 당연히 재계에는 기업체 총수를 판단하는 외부 잣대에 대한 불만이 많다. 이와 관련 최운열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어느 기고문에서 “국민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너무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윤추구라는 기업의 본질을 외면하고 성인군자에게 요구되는 지나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여 기업을 위축시키고 기업가 정신을 손상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삼성은 여전히 ‘비상사태’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는 다가오는 검찰수사의 칼날과 시민단체의 공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대목이다. 삼성은 검찰이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발행 사건과 관련해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의 남매에 대한 계좌추적에 착수하자 비상이 걸렸다. 삼성은 에버랜드와 관련된 검찰의 수사의지가 예상보다 강한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어디까지 수사가 확대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삼성은 검찰이 이 상무의 계좌에까지 손을 댄 이상, 이 회장 일가 전체로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이 어떻게 결론나느냐에 따라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삼성의 지배구조에 심각한 타격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삼성은 더욱 긴장하는 분위기다. 이 때문인지 요즘 이재용 상무의 안색은 어느 때보다 좋지 않다고 어느 삼성 임원은 전했다. 피부도 전보다 까칠해졌고 외부의 압력에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모습이 역력하다고 했다. 이 상무는 그동안 삼성의 해외공장을 돌아보는가 하면, 최근 매일경제 주최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도 참석하는 등 정상적인 활동은 계속 해왔다. 최근엔 미국에 아버지를 만나러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상무는 사석으로 돌아가면 괴로운 심경을 내비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매제 김재열(金載烈) 제일모직 상무와 비교적 자주 만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술이 세긴 하지만 최근엔 마시는 술의 양도 늘어났다고 한다. 한동안 이 상무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려고 종교계, 교육계 등 각계 유명인사를 만나 도움말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사태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는 얘기다. 한때 시중에서는 ‘삼성이 이재용 상무를 삼성전기나 삼성화재 사장으로 선임하여 본격적으로 경영무대에 데뷔시킨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 상무를 측면 지원해오던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은 헌법소원을 내는 등 일련의 ‘오버’로 인해 오히려 정부와의 관계만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들으면서 최근엔 많이 움츠러든 모습이다. 따라서 이재용 상무에 대한 법률적 지원활동도 많이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용 상무는 ‘비운의 황태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역경을 딛고 화려하게 최고경영자로 등극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