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 아드보카트 호. 이제 한경기를 치렀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의 남은 기간을 생각해 본다면 사실 시간은 촉박하기만 하다. 그러기에 불안요소도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거스 히딩크와 2006년 독일월드컵 ‘태극호의 선장’, 딕 아드보카트의 공통분모는 축구팬들에게 희망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 칭찬보다는 비난에 더 익숙했던 히딩크 히딩크 감독은 한국축구대표팀을 지휘하는 동안 칭찬보다는 비난에 익숙해 있었다. 본선 기간 한달을 제외하면 '전술훈련에 집중하라'는 축구관계자와 언론의 매질에 시달려야했기 때문.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본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체력훈련이 밑거름이 된 4강 신화를 쓸 수 있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묀헨글라드바흐, 또 한국대표팀에 부임하면서 "규율을 중요시하는 감독"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끈 유로 2004에서는 본인의 축구 스타일을 유지하려다 네덜란드 언론과 마찰을 빚었던 전례도 있다. 아드보카트의 강직함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 히딩크와 아드보카트의 승부사 기질 한일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에서 히딩크 감독은 한국이 0-1로 패색이 짙자 이후 수비수를 대거 공격수로 바꾸는 일대 모험을 걸었다. 결과는 설기현, 안정환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대성공. 어쩌면 토너먼트에서 당연한 대응이었는지 몰라도 당시 한국축구계는 놀라운 일로 받아들였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이란과의 경기에서 조원희, 이호 등 신예를 선발 출전시켰고 후반전에서 최진철을 빼고 백지훈을 투입,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포백라인을 점검했다. 데뷔전의 상징적인 의미를 고려할 때 승리라는 결과에 집착하기 마련인데, 아드보카트 감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실전 테스트를 과감하게 선택한 것이다. ▲ 아드보카트, “언론도 대표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히딩크 감독이 온갖 비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본인의 축구철학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연한 상황대처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베스트11 중심의 대표팀 운영으로 일부 선수들의 불만을 샀고 언론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본프레레 전 대표팀 감독과 비교되는 부분. 때문에 아드보카트 감독의 직선적인 성격이 우려를 샀다. 그러나 아드보카트 감독은 대표팀에 엄격한 잣대를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수들의 자율을 최대한 보장해 단시간에 선수단을 장악했다. 또 "언론도 대표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며 언론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전 감독과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 히딩크와 아드보카트의 축구 성향은 비슷해 아드보카트 감독은 이란전에서 예고됐던 대로 3-4-3 카드를 꺼내들었다. 다만 기존의 3-4-3 전술과는 성격이 달랐는데, 원톱 이동국부터 최후방에 위치한 김영철의 간격이 30~35m 수준으로 유지됐다. 쉼없는 압박으로 상대를 괴롭혔고, 공격시에는 빠른 공세전환으로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란전에 앞서 열렸던 태극전사들의 기자간담회. 대표팀 선수들은 하나같이 "아드보카트와 히딩크 감독의 축구 성향이 비슷하다. 아드보카트 감독 역시 압박과 밸런스를 강조한다"고 입을 모았다. 단 아드보카트 감독은 공격을 우선한다는 입장을 밝혀, 중앙 미드필더를 축으로 끈끈한 수비축구를 구사했던 히딩크와 차이를 두기도 했다. ▲ 한국에서 다시 주가 올리다!!! 98월드컵에서 네덜란드의 4강을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은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사령탑에 부임하면서 주가를 올렸다. 그러나 원칙없는 선수기용으로 비난에 시달렸고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레알 베티스로 적을 옮겼다. 2001년 한국행을 결정하기 전까지 햐향세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유로2004에서 네덜란드의 4강을 견인했지만 찬사보다는 비난을 들었고, 이후 묀헨 글라드바흐 개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휘봉을 잡았지만 6개월만에 경질됐다. 딕 아드보카트는 최근 아랍에미리트 감독에 오르면서 자신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해야 했고 결국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는 한국이라는 곳을 선택했다. 그들의 ‘코리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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