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잠적 했던 최씨 왜 들어왔나

삼성에 휘몰아치고 있는 폭풍이 심상치않다. 언론을 통해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주미대사의 1997년 불법 대선자금 제공 관련 대화를 도청한 ‘X-파일’ 내용이 보도되고 이에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여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명단이 공개되면서 삼성에 대한 압박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상태. 특히 2002년 대선자금 수사 당시 삼성이 사채시장에서 끌어 모았던 800원억대(일명,삼성채권)의 채권에 검찰과 정치권, 여론 등 다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는 당시 800억원대 채권의 ‘열쇠’를 쥐고 해외로 잠적했던 핵심인물이 지난달 20일 입국함에 따라 가려져 있던 삼성 비자금의 실체를 밝혀낼 새로운 계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대검찰정 중앙수사부는 19일 삼성이 지난 2002년 정치자금 제공을 위해 조성한 채권 중 사용처를 밝혀내지 못한 채권 500억원의 행방을 찾기위해 증원예탁원의 삼성채권 관련 계좌에 대한 입수수색에 들어가기로 밝혔다. 이에 따라 이번 압수수색을 계기로 검찰이 삼성의 지난 대선의 불법정치자금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어 삼성발 폭풍의 세력권은 정치권과 재계로 넓혀가고 있는 양상이다. 이 수사의 핵심은 최씨로부터 ‘삼성채권’의 실체를 밝혀내는 점이지만 검찰의 의지가 더욱 중요하다. 지난해 사실상 대선자금 수사결과를 중단할 당시, 검찰은 최씨 등에 대한 조사를 향후 주요 수사과제로 공언했다. 그러나 정작 최씨가 국내에 들어온 지 3개월이 지나도록 소재 파악도 못하는 등 미심적은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누가 지시했나, 어디썼나 지난해 중단됐던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다시금 탄력을 받고 있다. 검찰이 지난해 수사결과 발표에서 채권 매입의 당사자로 지목했으나 해외 출국으로 조사를 하지 못했던 2명의 전 삼성 직원이 모두 귀국해 국내에 있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 이들은 삼성이 2000~2002년 사이 사채시장을 통해 사들인 800억원대의 무기명채권의 매입 업무를 담당했던 전 삼성증권 직원들로 김씨는 2003년 5월 출국했다 지난해 9월 입국했으며, 최씨는 지난해 1월 출국한 뒤 올해 5월20일 귀국했다. 이들은 모두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에 제공된 것으로 확인된 302억원 채권 외에 용처가 규명되지 않은 ‘삼성 채권 500억원’에 대한 내사중지 조치와 함께 입국시 통보 조치가 취해진 바 있다. 검찰은 이중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최씨가 입국한 것을 계기로 현재 모 증권사에 근무 중인 김씨를 이달 초 한차례 불러 조사를 했지만 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지난 대선자금 수사 당시, 검찰은 명동의 사채시장에서 삼성이 800억원대의 채권을 사들인 사실을 알아냈고, 정치권에 건넨 대선자금 385억원 가운데 302억원이 이 중 일부라는 것도 파악했다. 이렇듯 사용처가 밝혀지지 않은 500억원대 채권의 행방과 함께 누구의 지시로 권의 매입이 이뤄졌는지 또 어떤 자금으로 사들인 것인지가 수사의 핵심 과제였다. 핵심인물이 해외로 잠적함에 따라 더 이상의 조사가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자 검찰은 최씨 등을 ‘입국시 통보’ 조처하고 이 부회장 등을 참고인 중지하면서 사실상 수사를 중단했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이 부회장 등이 채권을 이용한 범죄행위에 연루됐을 의심을 품고 ‘참고인 중지’ 처분했다”며 “최씨 등이 돌아오면 수사를 재개할 계획”이라고 수사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 500억 채권, 비밀의 열쇠 ‘최씨’? 삼성채권의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최씨가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확인된 만큼, 검찰은 최씨와 김씨를 상대로 채권 매입의 모든 과정을 적극 수사에 나서면 삼성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날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삼성 채권의 열쇠를 쥐고 있는 최씨. 그러나 그는 현재 입국한 뒤 종적을 감춘 상태로 입국 서류에 주소지와 연락처도 허위로 기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우선 최씨의 신병을 확보해서 당시 채권을 매입하게 된 경위와 사용처 등을 집중 추궁한 뒤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사라진 500억원 채권의 향방이 규명될지는 여전히 아직까진 회의적이다. 최씨가 구조본의 재무담당 박모 상무를 통해서 채권 매입을 지시받았지만 박씨는 지난달 28일 사망해버려 검찰이 최씨를 조사한다 해도 사실 확인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김인주 구조본 사장과 이학수 구조본부장을 상대로 추궁할 수는 있지만 지난번 수사 때도 "이건희 회장의 사재에서 지출돼 채권을 매입했는데 액수는 모른다"고 버텨 그 이상을 밝혀내지 못한 바 있어 수사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럼에도 최씨가 붙잡혀 조사를 받고 나면 사실 확인 차원에서라도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이 다시 대검 중수부에 소환될 것이 확실시 된다. 이 경우 이 부회장은 안기부 불법도청 관련 피고발자이기도 해 대검과 서울중앙지검에서 번갈아 조사를 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점쳐진다. 한편 검찰이 지난해 9월 입국한 김씨를 최근에서야 조사를 한데다 최씨도 입국 3개월여가 되도록 잡지 못한 점을 들어 수사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낳고 있다. 이와 관련, 검찰은 "최씨를 찾기 위해 수차례 수사관을 보내고 경찰에도 협조 요청을 해놓았다"고 해명했다. ◆ 최씨 잠적, 무슨 이유로... 더욱이 최씨의 잠적 배경에 대한 궁금증은 제기되고 있다. 최씨가 귀국한 날짜는 5월20일. 그는 입국하면서 입국기록에 자신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거짓으로 기재했다. 검찰의 수사를 따돌리려는 의도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검찰이 최씨의 자택에 2차례 수사관을 보내는 등 소재파악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미 잠적한 상태. 1년 만에 돌아와 가족도 만나지 않고 잠적한 최씨의 행동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검찰이 그가 세금을 포탈한 정황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입국 즉시 잠적’의 이유가 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 그의 출입국 배경도 의문거리다. 그는 지난해 대선자금 수사팀이 증권예탁원 등을 압수수색하며 삼성 채권 수사를 본격화하기 이틀 전인 1월14일 출국했다. 귀국 시점도 불법 대선자금 제공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사법처리 된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이 특별사면 된 직후다. 때문에 최씨와 삼성그룹 사이의 교감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전직 직원인 최씨의 출입국 사실은 회사로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최씨는 이미 2000년 10월에 퇴직한 사람이지만, 채권운용에 능력이 있어 단순히 채권매입을 부탁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중요한 것은 2000~2002년까지 최씨가 삼성의 돈으로 채권을 사들인 것으로, 전직인지 현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치권, 삼성이 500억 채권에 촉각 곤두세워... 검찰이 삼성의 500억원 채권에 대한 조사를 본격화하고 나서자 여야 등 정치권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500억원의 채권 향방이 이번 수사에서 새롭게 드러날 경우 정국에 미칠 파장은 실로 엄청날 수 있기 때문. 지난해 검찰 수사에서는 한나라당이 삼성 채권 300억원어치 및 현금 40억원을 받았다가 채권 138억원을 돌려준 것으로, 여당쪽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안희정씨가 채권 15억원과 현금 15억원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야당은 이미 지난해 불법 대선자금 수사 당시 편파 시비를 주장하며 용처 불명의 500억원 채권 중 상당액이 여당 후보였던 노대통령 쪽으로 흘러들어간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단 이번 검찰의 재수사 방침에 여야는 모두 미확인 500억원 채권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외견상으로는 촉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도청정국으로 정치권이 들썩이는 상황에서 여든 야든, 불법대선자금 수수 사실이 추가로 밝혀질 경우 어떤 파장이 미칠지 쉽게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더 이상 우리 것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당 핵심 관계자는 “이미 지난해 수사에서 확실히 나온 만큼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면서 “만일 검찰이 이번에 500억원 채권에 대한 수사를 정말 제대로 한다면 이제는 여당이 곤란에 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열린우리당도 “의혹과 문제가 제기된 사건에 대해 검찰이 성역없이 철저히 조사해 진실을 규명하라”고 촉구하고 나서 양측 모두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이다. ◆ 검찰의 고민은? 언론을 통해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주미대사의 1997년 불법 대선자금 제공 관련 대화를 도청한 ‘X파일’ 내용이 보도 이후 검찰은 그동안 도청행위와 테이프 유출은 발빠르게 수사했지만 삼성 의혹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나 지난해 검찰은 대선자금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해외로 도피한 참고인이 귀국하면 수사를 재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이번 삼성 채권 500억원의 수사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검찰은 잠적 중인 채권 매입자 최씨를 조사해야 채권의 흐름이나 사용처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추적 전담반’ 편성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해 지난해 “최씨 등이 돌아오면 수사를 재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해 수사에서 삼성측이 ‘모르쇠’로 일관함에도 불구, 300억원이 넘는 부분에 대해 증거를 찾아 유죄판결을 받아냈다. 97년 대선자금 제공 의혹에 대해서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 증거가 남아있지 않아 혐의 입증이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하지만, 2002년 대선자금은 많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다. 또 지난해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대선자금 수사의 최대 미스터리인 삼성 채권 수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자세는 검찰 내부에서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500억원의 사용처가 드러날 경우 97년 자금보다 훨씬 큰 폭발력을 지닌다는 점도 검찰에게는 고민일 수 있다. 500억원의 상당 부분이 한나라당은 물론, 당시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 캠프에도 전달됐다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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