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이라 부른 우리 경제 발전의 산증인, 故 남덕우 전 총리가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경제계 1세대 원로’로서 서강학파의 대부로 꼽힌다. 특히 그는 최근까지도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으로 우리 경제의 갈 길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의 별세 소식에 정·재계의 안타까움은 더 했다.

▲ 22일 오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故 남덕우 전 국무총리 안장식이 엄수되고 있다.

代이은 인연…“‘한강의 기적’ 큰 역할”
고인의 영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남덕우기념사업회’만들어 세계화할 예정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1970년대 경제개발을 이끌었던 남덕우 전 국무총리. 수년 간 전립선암을 앓아 온 남 전 총리는 최근 노환에다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지난 6일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다 18일 별세했다.

자유민주주의 신봉자

1924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남 전 총리는 1945년 국민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경제학 석사,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를 거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69년 박 전 대통령에 의해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대학 교수이던 그가 1969년 박 전 대통령에게 발탁된 일화는 유명하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회의에서 소신 발언을 하던 그를 눈여겨 본 박 전 대통령이 “경제정책에 상당히 비판적이던데 어디 한번 직접 맡아 해보라”며 재무부 장관직을 제의한 것이다.
이후 남 전 총리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거쳐 1980년 전두환 정권에서 국무총리로 임명되는 등 양지를 걸어왔다. 5공 말기에는 대통령 후보로 나설 뻔한 기회도 있었다. 그는 2009년 발간한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달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권유를 뿌리쳤다”고 밝혔다.
남 전 총리는 개발독재시대 한국 사회 주류 경제학자와 관료로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다.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박근혜 대통령 부녀와는 대를 이어 깊은 인연을 맺었다.
남 전 총리는  박 대통령의 의원 시절 후원회장을 맡았다. 특히 17대 대선을 앞둔 2007년 1월에는 당시 한나라당 유력 대선 주자였던 박 대통령의 경제자문단 좌장직을 맡아 ‘박근혜노믹스’ 입안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경제자문단에는 성균관대 교수 출신인 안종범 의원,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 김영세 연세대 교수, 김광두 서강대 교수 등도 참여했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에 합류해 지난해 대선에서 박 대통령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남 전 총리는 지난 3월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국가원로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1970년대 대통령의 딸과 경제 책임자로 만난 이후 청와대에서의 두 번째 해후였다.

“제2 한강의 기적”만들겠다
 
올 3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국가원로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박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아 주목을 받았다. 1970년대 대통령의 딸과 경제 책임자로 만난 이후 청와대에서의 두 번째 해후였다.
이 때문인지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고인이)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고 회상하며 “나라의 큰 어른이 이렇게 떠나시니까 마음이 허전하다”고 거듭 고인을 애도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우리가 이제 나라를 더 잘 발전시키고 국민행복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그 허전한 마음을 딛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제2 한강의 기적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먹고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남 전 총리는 기본적으로 시장주의자이자 성장주의자였다. 금융위기와 재정위기 이후에도 시장에 대한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2년 전 한국선진화포럼이 마련한 대학생 강연회에서 남 전 총리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발 재정위기의 근본 원인이 시장경제 자체에 있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적으로는 반북·반공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는 “북한 노동당에는 ‘선전선동부’가 있어서 지난 반세기 동안 공산주의 이념을 국민 뇌리에 새겨 넣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국민들이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적 가치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남 전 총리는 최근까지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원로자문단 좌장, 산학협동재단·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고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등을 맡아 보수 진영의 원로로서 국가 미래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회고록에서 “돌이켜보면 나는 성공한 정책가도 아니고 성공한 경제학자도 아니었다. 경제 전문가로서 주견이 있었으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행정적 수완이 모자라 주위 환경과 타협하는 정부관료에 불과했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정책 의지를 시장경제 이론의 틀 안에서 소화하려고 안간힘을 다한 것은 사실”이라고 스스로의 삶을 소개했다.
남 전 총리와 함께 ‘서강학파’를 이끌었던 이승윤 전 부총리는 “오늘의 대한민국 번영이 있기까지 반세기 산업혁명의 중심에 남덕우가 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느냐”면서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남을 비방하지 않고, 큰소리치지 않으며, 마음먹은 대로 꼭 해내고야 마는 ‘조용한 리더십’이 박정희 대통령과 10년간 호흡하며 나라 만들기에 성공한 비결”이라고 평가했다.
장례위원장인 한덕수 무역협회장은 “고인은 오일쇼크와 만성적 인플레이션 등 한국 경제에서 가장 어렵던 시기를 극복한 경제발전 모델의 입안자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남 전 총리는 장관과 부총리 시절 국제 수지가 나쁜 상황에서 국내 경기를 살려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소규모 주택 공급 정책을 강조했다”면서 “주말마다 허허벌판이었던 잠실벌 건설 현장에 나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남 전 총리와 함께 최근까지 선진화포럼에서 활동한 고병우 전 건설부 장관은 “경제 전반에 대해 항상 해답을 갖고 계시고, 박 전 대통령에게도 바른 소리를 굽히지 않았던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이셨다”며 애통해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혜숙씨와 장남 남기선 EVAN 사장, 차남 남기명 동양증권 전무 등이 있다.

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영결식은 22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에는 정홍원 국무총리,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나카소네 히로후미 자민당 참의원 의원,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 등 1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은 한덕수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추도사에서 “당신께서 이룩하신 경제발전과 무역입국의 토대 위에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겠습니다”라며 안식을 기원했다.
고인은 박태준 전 총리와 김준 초대 새마을운동중앙회장 등이 잠들어 있는 국가유공자 3묘역에 안장됐다.
한편 서강대학교는 남 전 총리를 기리는 ‘남덕우 기념사업회’(가칭)를 만든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장은 남 전 총리의 제자인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이 맡아 남 전총리가 남긴 업적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경제의 발전모델을 세계화할 예정이다. 또 서강대 학생들이 행동하는 경제학자로서의 남 전 총리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서강대 내에 기념실도 만들 계획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조문하면서 고인의 영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