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민심 이탈할까 전전긍긍 노 대통령 'DJ 달래기'

국가정보원 불법도청 사건이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현 여권과 김대중(DJ) 전 대통령간의 ‘정치게임’으로 변질되면서 권력의 불법 규명이라는 본궤도를 이탈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8일 긴급기자간담회에서 도청 사실 공개와 관련, 정치권 일각의 음모론을 강하게 부인했다. 정치적 의혹 제기는 모욕이라는 언급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국정원이“김대중 정부 때도 도청이 있었다”고 발표한 데 대해 “대통령이 파헤친 사건이 아니다. 전혀 음모가 없다”며 DJ를 향해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다시피 했다. 국정최고책 임자가 국가기관의 발표내용을 놓고 특정 정치세력을 의식해 음 모가 있느니 없느니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DJ) 측은 모독이나 음모 공작은 국민의 정부가 당했다는 말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건의 본말이 뒤집혔다고도 한다. 여기에 김 전 대통령 쪽에서는“본질은 김영삼 정부 시절 정치공작을 밝히는 것인데 완전히 뒤집혔다”며“김 전 대통령은 최근 심기가 아주 좋지 않다”고 전직 대통령의‘심기’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의 돌연한 입원소식은 정치권에 미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불법도청과 관련한 이른바 '음모론'이 확산되면서 청와대와 김대중 전 대통령 측 사이에 냉기류가 형성되자 여권이 파문 진화에 고심하고 있다. 음모론의 핵심은‘노무현 대통령이 불법도청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도 정치적 목적으로 발표 시기를 조절했다’는 것이다. 지난 5일 국가정보원의 자체조사결과 발표로‘국민의 정부에서도 도청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민주당이 처음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지난 7일 노 대통령이 직접 적극적인 반박을 펼쳤지만 음모론은 오히려 확산되고 있다. 특히 9일 김 전 대통령측은“(YS 정부 때의) 미림팀 도청은 흐지부지되고 하지도 않은 일을 국민의 정부에 뒤집어씌우고 있다. 본말이 뒤집혔다”며 “김 전 대통령의 최근 심기가 아주 좋지 않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불법도청의 최대 피해자인 김 전 대통령이 국정원 발표 이후 하루아침에 가해자가 됐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DJ 달래기’ 이같이 불법도청 음모론이 확산기류를 타자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가 끝난 직후 국무위원들과의 간담회자리에서“불법 감청(도청)은 군사독재의 불법적인 도구”라며 “정경유착은 군사독재가 만든 불법적 구조”라고 말했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와 국가정보원의 도청 사실이 밝혀져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원죄(原罪)는 과거 군사정부에 있다는 얘기였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을 놓고 정치권에선 여권이 정면 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음모론’에 대해 불법도청의 원 뿌리는 군사정권에 있다고 우회론을 편 것으로 대통령이 나서 ‘DJ 달래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노 대통령은 전날 기자간담회에서도“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과거의 원래 뿌리를 만든 사람들이 지금 이파리 몇 개보고 흥분하고 있는 상황 아니냐”고 한 구 여권의 주체인 한나라당을 직접 겨냥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 대통령의‘DJ 달래기’의 배경에는 호남 민심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호남의 민심이 자칫 음모론을 기폭으로 동요가 일 경우 대통령 자신은 물론 열린우리당 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여권은 불법도청 문제로 인해 김 전 대통령 측과 갈등이 심화될 경우 호남 민심의 이반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호남 민심의 이탈 양상이 가속화하면 당장 내년 지방선거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고 노 대통령의 힘도 급속도로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 호남민심 이탈할까 전전긍긍.... "DJ 노여움 달래라" 열린우리당이 '국민의정부 시절에도 불법 도청이 있었다'는 국가정보원의 발표로 촉발된 김대중 전 대통령(DJ)측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방안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다. 호남권 지지도가 급락하고 있는 우리당으로선 호남민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DJ측과의 갈등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풀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우리당은 우선 DJ의 오해를 풀기 위한 `동교동 진사'는 `동교동계' 출신의 배기선 사무총장이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10일 "빠른 시일 내에 (김 전 대통령을) 찾아뵐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오해가 생긴 점은 안타깝지만, 김 전 대통령도 (여권이) 국민의 정부의 공적을 조금도 훼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배 총장은 "국정원 발표에 의도는 없었지만 표현은 좀 신중했어야 했다"며 "시간이 흐르면 불법 도청을 뿌리뽑도록 지시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은 더욱 빛나게 될 것"이라고 거듭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미 DJ의 측근인 최경환 공보비서관과 전화로 접촉해 최근 상황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동교동의 이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이 지역구인 의원들도 지난 8일 회동을 갖고 국정원 발표에 따른 대책 등을 논의한 뒤 "김 전대통령의 충격이 크겠지만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며 "이번 일로 DJ와 호남민심이 상처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그러나 `음모론'을 연일 설파하는 민주당 등 야권과 일부 언론에 대해서는 지도부가 총동원돼 강도높게 비판했다. 문희상 의장은 이날 천안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DJ측이 주장하듯)본말이 전도된 상황은 맞다. YS정권하의 274개 테이프는 없어지고 모든 문제가 국민의 정부 도청으로 비화되는데 어떻게 그 분들이 참을 수 있겠느냐"며 "그러나 최근의 보도는 두 정부간 갈등, 지역주의를 불붙이려는 정략적 냄새가 난다. 그것을(그런 보도를) 부추기는 집단도 비판대상이 돼야 한다"고 야당과 언론을 싸잡아 비난했다. 정세균 원내대표도 "대부분 국민들은 불법 도청의 효시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정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확실하게 중단시킨 것이 김 전 대통령"이라며 "국정원의 발표도 명백히 그런 내용인데 일부 야당이 사실을 왜곡 정략적으로 이용하는데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DJ, 노 대통령이 섭섭한가" 지난 5일 국가정보원의 과거 불법도청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중간발표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듯 하다. 최경환 공보비서관을 통해 전달된 김 전 대통령의 심경은 "참담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일면으로는 고문, 도청, 정치사찰 등 국가정보기관의 불법행위의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인 김 전 대통령이 사실상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책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평생을 고문, 정치사찰 등 반인권적 행위에 맞서 온 나를 이렇게 모욕할 수 있느냐" 는, 현 정부에 대한 원망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의 말이다. 유 대변인은 최근 도청 파문의 초점이 YS가 아닌 DJ로 옮겨지는 것과 관련, 청와대의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확산되자 9일 국회 기자실을 찾아 이같이 밝혔다. 유 대변인은 DJ와 노 대통령의 관계를 '한랭전선'에 비유하며 "느닷없는 국민의 정부 도청문제가 뜨겁게 이슈화되는 데에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가 있다"며 "DJ도 청산되어야 할 '3김'인지 묻고 싶다"고 쏘아붙였다. '동교동'에서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최경환 비서관은 연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심(心)'을 전달하고 있다. 최 비서관은 "본말이 전도되고 있다"며 "그분이 역대 정부에서 불법도청의 최대 피해자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국정원의 이해할 수 없는 발표를 계기로 하루아침에 '가해자'가 되었다"며 "참으로 표현하기 어렵고 난감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격앙된 반응을 전했다. ◆DJ측 "국정원 발표보다 노 대통령의 태도가 더 서운해" 노 대통령의 '태도'에서 DJ측과 민주당은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5일 발표 당시 국정원은 국민의 정부의 불법 감청 사실을 적시하면서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사찰과 도청의 최대 피해자"임을 강조하면서 누차 "반드시 없애라"고 지시한 점을 발표문에 전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 감청이 이어진 데는 과거 관행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국정원의 문제라고 적어 김 전 대통령을 의식한 점이 역력했다. 반면 노 대통령의 8일 기자간담회에서는 그런 '배려'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 DJ측의 판단이다. 당시 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은 YS에서 DJ쪽으로 도청 사태가 옮아가고 있는 것에 관한 질문이 집중되었지만 노 대통령은 YS 정부의 정적 감시를 위한 '조직적' 도청과 DJ 정부는 차원이 달랐다거나 DJ가 도청 근절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졌다는 등 DJ에 관한 '변론'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노 대통령은 "내 자신의 정치자금 문제에 관해서 잘 보셨지 않나, 아무 관계도 없는 친구의 처제 집까지 상상할 수 없는 가혹한 수색을 당했어도 한마디 방어를 안했다"며 "나는 단 한마디도 국정원더러 정치에 관한 정보 모아오라고 한 일이 없다"고 자신의 결백에 대해선 재차 삼차 강조했다. DJ측에서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국가경영이 미숙한 탓"이라며 "국민을 안심시키는 차원이나 정보기관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이 정권에선 (도청) 안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것"이라고 노 대통령을 비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DJ돌연 입원 …“도청파문 심기 불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0일 갑자기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김 전 대통령측의 최경환 비서관은 이날 “김 전 대통령께서 며칠 전부터 기력이 떨어지고 미열이 있었다”면서 “염증 소견이 있어 이에 대한 검진이 필요하다는 주치의 장석일 박사의 권유로 오늘 오후 입원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측은 국정원 X파일 발표와 관련, “안기부 미림팀이 9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을 떨어뜨리기 위해 정치공작을 벌인 게 본질인데 이를 국민의 정부에게 뒤집어 씌우고있다”며 강력 반발해 왔다. 김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김 전 대통령이 도청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락하는 상황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겨진 것 같다”고 입원 배경을 설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돌연 입원 소식을 접한 우리당 지도부는 매우 당혹스런 분위기다. 문희상 의장은 "소식을 듣고 당장 병원으로 가려했으나 김 전 대통령의 상태가 외부인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인지 몰라 일단 배기선 사무총장이 먼저 갔다"고 박영선 비서실장을 통해 전했다. 이어 일단 배 총장의 보고를 받고 병 문안 일정을 바로 잡을 예정이다. 한 측근은 "문 의장이 매우 마음이 안좋아 보였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우리당은 국정원의 발표 이후 DJ와 현 정부의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발생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 소식에 사태가 더욱 나빠지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김부겸 원내수석부대표는 "DJ와 현 정부의 갈등이 있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그분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라며 "그릇이 큰 정치인을 함부로 깎아 내려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유선호 의원(전남도당 위원장)은 "국정원의 발표가 서툴렀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유 의원은 "국민의 정부는 도청 근절에 대한 원칙이 확고했다"며 "설사 도청이 이뤄졌다 해도 문민정부와는 질적, 양적으로 매우 달랐을 텐데 전 정권과 비슷하게 비춰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 의원은 "여러 가지 의문을 풀기 위해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며 "투명한 원칙 하에 조사가 이뤄진다면 인권의 가치를 누구보다 존중하는 호남 사람들이 동요할 리가 없다"고 호남민심이 악화될 것을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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