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이라도 당하면 ‘도청공포증’에 시달리기도

최근 국가기관의 불법 도청 의혹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도청은 이미 대한민국 전반에 걸쳐 만연해 있는 것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불, 합법의 논의를 막론하더라도, 정부에 의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도청에서부터 심지어는 연예인들에서부터 일반 가정집에서도 도청은, 지금 이 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결코 그 대과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에, 이제껏 붙어왔던 수많은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들을 제치고, 또 하나의 수식어가 붙는다. ‘도청공화국, 대한민국!!!’ ■ 도청 1순위는 주요 정부 부처와 유력 정치인 등 거물급 인사들...수시로 도청탐지 의뢰...청와대는 자체 감청팀 운영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도청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이 가중되는 가운데 도청의 실질적 타깃인 주요 정부 부처와 고위 인사들의 대응 방안에 세간의 관심의 쏠리고 있다. 청와대, 총리실, 검찰 등 주요 정부 부처와 유력 정치인 등 거물급 인사들이 갖는 그 영향력과 무게는 단연 도청 제 1순위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권력자나 권력기관은 24시간 불법 도, 감청과의 전쟁, 아니 사투를 벌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전언한다. 실제로 이들에 대한 도청 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는데, 지난 1977년 유신시절에 불거져 나왔던 박동선 사건 와중에는 행정부의 최고 수반인 청와대가 미국에 의해 도청당해 온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준 바 있다. 일명 코리아게이트사건이라고도 하는 이 사건은 그 해 10월 15일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에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였다’라고 보도한 것으로 촉발되었다. 당시 미국 의회와 국무부는 박동선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한국 정부는 미국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 삼아 송환을 거부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을 거쳐 1977년 12월 31일 한 ·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78년 2월 23일 미국으로 건너간 박동선은 미국 상 · 하원 윤리위원회 증언에서 한국에 대한 쌀 판매로 약 920만 달러를 벌어 이 중 800만 달러를 로비활동 등에 지출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4월 3일 공개청문회에서 그는 전(前) 하원의원 R. 해너 등 32명의 전 · 현직 의원들에게 약 85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72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R. M. 닉슨에게도 2만 5천 달러를 제공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의회와 법무성은 박동선 사건에 대한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해너와 3명의 민주당 의원만 징계하였다. 그 후 미국 의회가 미국 주재 한국대사를 지낸 김동조(金東祚)의 증언을 요구함으로써 한 · 미간에 새로운 갈등이 유발되었으나, 막후절충을 벌여 1978년 9월 19일 김동조가 미국 하원 윤리위원회의 서면질문에 답변서를 보내고, 10월 16일 미국 하원 윤리위원회가 조사보고서를 발표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가까운 예로는 지난 3월, 전남 해남의 이정일 의원이 총선과정에서 상대 후보측에 불법 도청을 시도한 사실이 검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주요부처와 고위층의 도청방지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보안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청와대를 제외한 주요 부처는 자체 도청방지팀을 운영하지 않고 있어 주로 국정원 증 정보기관이나 외부 탐지업체에 용역을 의뢰한다. 이때 도청탐지를 의뢰한 부처 관계자는 탐지업체의 담당자를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 가명을 사용하는 등 기관의 정보를 일체 공개하지 않으며, 1차 접선도 제 3의 장소에서 갖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담당자와의 몇 차례 대화를 통해 신뢰를 확보한 뒤에야 소속기관으로 안내하고 도청탐지를 맡기는 것이 정석. 대(對)도청탐지는 정기적으로 행하지 않고, 불시에 또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의 경우 특수부 등 주요부서를 중심으로 사안에 따라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해 도청탐지를 실시한다고 한다. 이때 도청탐지 업무를 경호실 내에 인력과 최고급 장비를 두고 대(對)도청방지 업무를 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기관보다 도청탐지 수요가 많은 것이 국회의원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다. 특히 선거를 앞둔 의원 후보들은 혹시나 모를 경쟁 후보의 도청 공포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징후가 포착되면 일체의 지체없이 탐지업체에 의뢰해 도청여부 확인에 착수한다. 아예 비밀스러운 대화는 예상치 못한 제 3의 장소에서 진행하는 경우도 많아, 룸살롱이나 호텔 비즈니스룸을 장소로 잡아 도청탐지업체의 사전 검사 뒤에야 비로소 미팅을 주재하는 사례도 많다. 쉐라톤워크힐호텔의 초호화룸 ‘애스톤 하우스’가 도청방지 시스템을 내장한 것이나, 주요 부촌(富村)의 리모델링시 동판을 삽입해 도청 전파를 흡수토록 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이나 사무실을 옮길 때 도청탐지 여부를 검사하는 것은 이제 상식으로 통한다. 탐지업계의 한 관계자는 “혹시 모를 도청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관과 고위층에서 탐지의뢰를 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며 “특히 과거에 비해 도청에 대한 경각심이 크게 향상돼 이들의 도청탐지 의뢰 건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 `안기부 X파일` 후폭풍 발길 뚝...매출 급락...종업원 입단속 등 부심 한정식집 등 서울 시내 고급 음식점들은 울상이다. 단골손님이던 정ㆍ재계 인사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 예약된 일정마저 취소하기 일쑤다. `안기부 X-파일` 후폭풍이다. 한여름 여파로 그렇잖아도 매출이 떨어지는 시기에 난데없이 된서리를 맞은 셈이다. 이들 고급 음식점들은 자구책으로 종업원을 대상으로 `보안교육` 강화에 나서는 등 예전에 볼 수 없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ㆍ재계 인사들 단골집으로 알려진 서울 여의도와 종로의 유명 한정식집과 중식당은 유력 인사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고 예약됐던 각종 회합일정도 줄줄이 취소가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이들 음식점들은 안기부 특수도청팀 `미림`의 불법 도청이 세상에 폭로되기 전에는 유력인사의 발길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B중식당 관계자는 "예전 같으면 식사시간에 단골 인사들이 밀려드는 통에 바짝 긴장했는데 지난주는 파리만 날릴 정도로 한산했다"며 "불법 도청 소식이 알려진 뒤 금요일 점심, 저녁 예약은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털어놓았다. S한정식과 I한정식, S일식집에 가면 유력인사들을 간간히 볼 수 있다는 것도 정확히 며칠 전 얘기다. 이집 단골로 알려진 HㆍCㆍK의원을 비롯한 재계인사 K와 S그룹 임원들도 발길을 돌린 채 얼씬도 하지 않고 있다. H의원이 단골로 알려진 I한정식 관계자는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들르던 `양반`들이 이번 주 들어 얼씬도 하지 않는다"며 "영원히 이곳에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며칠 전부터 종업원들의 보안교육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이나 여권 고위 인사들이 자주 찾는 장소로 알려진 한 지역의 고급 음식점들은 지난주 목요일 이후 각종 간담회와 유력인사의 예약 일정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예약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이다. 특급호텔 식당가도 도청공포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 정ㆍ재계 인사가 자주 찾는 것으로 알려진 모 호텔 중식당 관계자는 "이번 주 예약자 명단에 VIP는 단 한 명도 없다"며 "수요일 예정이던 모 의원의 예약도 취소됐다"고 말했다. ■ 공포감 확산...일부 정치인, 공직자들 수신ㆍ발신용 따로 따로 불법 도ㆍ감청에 대한 공포가 확산 일로에 있다. 들불과 같은 속도다. 휴대전화 도청공포 심리는 특히 심각하다. 사실 안기부 X파일이 터지기 전에도 여ㆍ야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는 수신용과 발신용을 따로 두는가 하면 소유자를 다른 사람 명의로 해뒀는데, 이런 현상이 일반인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경찰을 비롯한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요원들에 따르면 도청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공식 지급된 휴대전화 외에 별도로 1, 2개의 휴대전화를 이용하고 있다. 정부종합청사에 근무하는 A(33)씨는 지난달 경찰 정보형사로 근무하는 선배 B씨에게 휴대전화로 공직사회 동향 파악 이야기를 꺼냈다가 "`01X…`로 시작하는 다른 전화로 걸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황당했다. 지금 생각하니 도ㆍ감청을 걱정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A씨는 "회사에서 지급된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던 선배는 주머니에 항상 개인용 휴대전화를 따로 들고 다녔다"며 "잡음이 들리거나 통화음에 변화가 생기면 `다시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실제 경찰의 정보 보고는 국정운영의 자료로 널리 쓰이는 1급 정보다. 일선 정보과 형사를 시작으로 지방경찰청, 본청 정보요원이 세상 이야기는 물론 주요 인물의 움직임을 낱낱이 기록, 전화나 문서로 현장에서 보고하기 때문에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새어 나갔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국회를 담당하는 한 정보형사는 "우리(경찰)의 정보망은 국정원이나 검찰보다 우수한 정보의 양을 갖춘 게 사실이라, 혹시 모를 우려에 동료끼리도 전화보다는 직접 만나 정보를 교환한다"며 "우리가 담당하는 VIP의 동향 파악 등은 정보원들에게 차명으로 만들어진 개인전화를 통해 보고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전 안기부 직원이 기자들의 휴대전화도 도청한 것으로 들었다"며 여ㆍ야 정치인들도 막연한 불안감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 2001년 `긴급감청이 무차별적으로 남발되고 있다`는 정보통신부 국감자료 소식 이후, 여ㆍ야 의원 상당수는 아직 수신용과 발신용 휴대전화를 따로 들고 다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제 여의도 지역의 한 이동통신업체 관계자는 "대부분의 의원은 차명으로 보좌관 등을 통해 휴대전화를 새로 구입하는 것으로 안다"며 "최근 신규 가입자가 전월 동기에 비해 5%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L의원의 보좌관 K씨는 "통신업체에서는 휴대전화 도ㆍ감청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사람이 만든 기술인데 어떻게 도ㆍ감청을 못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뒤 "의원들 대부분은 차명으로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게 기본으로 도청에 항상 대비하는 게 사실"이라고 확인해 줬다. 한편 지난달 말 현재 국내 휴대전화 가입자는 모두 3735만명으로 `1인 1폰` 시대를 열고 있지만, 불법 도청사건이 터진 뒤 `1인 2폰`도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진 도청의 공포 과도한 의심 때는 TV, 인터넷 등 외부와 차단...편집증 등의 유발, 정상적 사회생활 불가능 취재 중에 서울의 Y씨가 인터넷 까페 게시판에 올린 글이 눈길을 끌었다. 내용인즉 Y씨는 최근 부쩍 자신과 닮은 이들이 방송에 자주 등장한다고 느낀다는 것. 심지어 탤런트 J씨가 마치 자신과 일란성쌍둥이가 아닌가라고 여기면서 그런 J씨를 보면 자신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고 Y씨는 주장한다. Y씨는 또 아는 이들의 이름이 자주 방송에 등장하는 것도 뭔가 꺼림칙하다. 누군가 불법 도청을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상세히 지켜본 뒤 이릉 방송소재로 사용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 했다. 국가기관의 불법 도청 의혹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불법 도청이 도청 피해자의 피해망상과 편집증 등 정신질환까지도 유발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이른바 ‘도청공포증’을 호소하는 이들은 주변의 사소한 움직임도 곧 도청의 징후로 판다하는 등 과도한 의심과 집착증세를 보인다. 자연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이어가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도청공포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도청에 대한 의심 때문에 TV나 인터넷, 휴대전화 등 외부와 소통하는 일체의 기기는 모두 꺼둔다. 천장이나 문틈 등 혹시라도 자신을 지켜볼 만한 공간이 있다 싶으면 테이프 등으로 봉해 놓는 것은 물론이며, 휴대전화나 e-메일의 스팸메시지도 도청자의 소행이라고 의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 정신과 전문의에 따르면 집 주위에 잠시 머무르는 차량도 자신을 감시하는 일당의 것이라 믿으며, 아나운서나 기자들이 자신을 도청해 드라마나 뉴스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소재로 한 방송을 하고 있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심지어 혹시라도 집을 비우면 새로운 도청장치가 설치될까 두려워 외출을 못하는 부부도 있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집은 온갖 간이형 도청탐지기로 도배되어 있다고 말했다. 대체로 한 두 차례 도청을 경험한 이들이 이같은 도청공포증을 겪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문제는 도청의 공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이들의 정상적 사회생활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상황을 수사기관에 전달해 봐야 마땅한 증거도 없는 상황이라 퇴짜맞기 일쑤. 따라서 이들은 도청을 차단키 위해 온갖 대비 수단을 동원하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점차 사회와 격리되어 가는 것이다. ■ "혹시 나도…" 도청 공포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1988년 8월 모 방송 뉴스 생방송 중에 웬 남자가 스튜디오로 마구 뛰어들어 난데없이 던진 말로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됐던 말이다. 17년이 다 돼가는 지금 ‘몰래 엿듣다‘는 뜻의 도청(盜聽)이 다시금 도마위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비밀도청팀을 가동해 정계 · 재계 · 언론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행했다는 ‘폭발력’을 갖고 ‘컴백’한 듯 보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도청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직접 “도청을 당한 사람”이라고 했고, 이회창 후보도 “도청, 감청이 된다고 해서 휴대전화를 서너개를 들고 다니다가 비화기가 달린 휴대전화를 구했다”고 했다. 그뿐인가. 지금도 기자들이 접촉하는 주요 취재원 중 상당수는 항상 휴대전화 2∼3개를 지니고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평범한 일상생활에도 도청은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의 강남지역과 목동 등 오피스텔을 도청할 수 있는 장비를 설치해 사생활을 엿보던 일당이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은 도청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기야 한풀 꺾였던 휴대전화 도청 가능성 여부 논란이 재연돼 ‘도청 강박증’까지 만연할 조짐이다. 하지만 이같은 도청 폐해의 심각성은 ‘X파일 내용’이 갖는 파괴력에 다소 묻히는 느낌이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법에 의하지 않고는 공개되지 않은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할 수 없다. 실정법상 이번 파문과 같은 도청은 엄연한 불법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X파일 내용의 진위를 가리는 수사 못지않게 이번 기회에 불법도청 방지를 위한 당국의 특단대책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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