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정경유착과 권언유착...‘종합판’ 권력커넥션

지난 97년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의 대선후보 지원에 대한 대화내용 공개는 정치권에 상당한 후폭풍을 몰고 올 전망이다. 정치자금을 지원받은 여야 두 후보는 모두 현직을 떠났지만, 재벌과 언론사, 관련 정치인들은 아직 현직에 있다. 불똥이 어디로 튈 지 가늠하기 힘들다. 특히 정황 상 홍 사장이 선거에 깊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 그의 주미대사직 수행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뿌리깊은 정경유착과 권언유착이 다시 도마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 'X 파일' '검찰 떡값' 내사 착수 삼성과 중앙일보가 명절 때마다 거액의 떡값을 제공하며 검찰인맥을 관리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와 관련해 검찰이 자체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이른바 ‘엑스파일’로 불리는 이 제보 문건에 등장하는 전, 현직 검찰 간부는 모두 10명이다. 이 가운데 5명은 당시 검사장급 이상의 고위 간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검찰 안팎에서는 전 법무장관이었던 K씨, 당시 법무부 고위 간부였던 C씨, 서울지검 간부였던 H씨, 수도권 지청 차장급이었던 K씨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삼성 임원과 중앙일보 고위 간부는 검찰 간부를 일일이 거명하며 액수와 전달 방법까지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에게 전달된 돈은 적게는 5백만 원에서 많게는 2천만 원까지. 추석 떡값 명목이라는 것이다. 검찰 수뇌부는 돈을 받은 것으로 거론된 검찰 관계자들에 대해 내부 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 삼성, 도청테이프 보도 KBS 상대 소송 검토 한편, 삼성은 대선자금 관련 문제 등이 담긴 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을 21일 보도한 KBS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 중 이라고 22일 밝혔다. 삼성 관계자는 "21일 밤 KBS 9시 뉴스에서 불분명한 도청 테이프를 근거로 관련 내용을 보도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보도 내용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법률적 검토를 한 뒤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측은 KBS측에 전날 보도 내용과 관련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을 인정하는 방송을 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KBS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삼성은 또한 이날 밤 MBC 9시 뉴스데스크에서 안기부 문건이라는 자료를 토대로 실명을 거론하며 대선자금 문제 등을 상세히 보도한 것과 관련,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은 채 "면밀한 검토를 거쳐 법적 대응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삼성 관계자는 "방송 보도 내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할지를 법무팀 등과 협의를 해야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밝힐 수 있는 입장은 없다"고 말했다. ■ 언론사주가 정재계 '돈 심부름꾼'이라니… 안기부 도청테이프를 통해 언론사주가 정재계의 다리 역할을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우리나라 언론의 권언유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22일 공개된 안기부 도청관련 자료를 보면 권력과 자본을 감시해야 할 언론사주가‘돈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장면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선을 석달 앞두 지난 97년 대기업 총수가 당시 여당 후보에게는 다른 사람이 아닌 언론사 사주가 직접 돈을 갖다주라고 지시하는 대목이나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사 사장은 매형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지시에 따라 돈을 전달하는 정황이 구체적으로 묘사됐다. 심지어 언론이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약점인 건강문제 취재에 나선 이야기도 보도됐다. 권력과 자본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본분을 망각하고 정치자금 전달 창구역에 나서는 것으로도 모자라 선거에 직접 관여하려 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유력 언론사주가 정경 유착의 심부름꾼이었다는 데 한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홍승하 대변인은 "홍 전사장은 재계와 사주의 양다리 걸치기 외에 97년 대선 편파보도 논란을 겪기도 했다”며 해당 언론사까지 공격하고 나섰다. 이번 사건은 재벌과 언론이 한통속이 돼서 정치권의 환심을 사려 할 때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다른 언론사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 안기부 도청 X파일 파문, 검찰 “대선수사 신뢰 훼손” 당혹 한편, 재벌기업 고위인사와 중앙일간지 고위층이 1997년 당시 나눈 대선자금 관련 대화 내용이 알려지자 검찰은 불똥이 검찰에까지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녹음 테이프에는 추석 명절을 앞두고 수백만∼수천만원씩 떡값을 제공할 유력인사 리스트가 포함돼 있고 이 문제의 리스트에는 정치인 뿐 아니라 전·현직 검찰 고위관계자들도 들어 있다. 검찰 내부에서는 이번 문제로 자칫 대선자금 수사로 쌓은 검찰의 신뢰가 흔들릴 수도 있어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현재까지 리스트에 포함됐다고 알려진 인물은 8명 정도로 대부분이 전직 검찰 간부들이지만 현직 간부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일단 사태를 신중히 지켜본다는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거명된 검찰 인사 등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 감찰이나 수사 등에 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다.”면서 “검찰이 공식적으로 테이프나 녹취록 등 안기부 불법도청 관련 자료도 입수한 바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고소나 고발이 들어온다면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종빈 검찰총장도 “(검찰 관계자들도 거론되는 것에 대해)아직은 그 부분에 대해 논평할 단계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 내부에서는 고소, 고발이 있어도 사실상 수사가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대검 관계자는 “이미 불법도청과 금품 수수 등의 공소시효가 다 지났고 검찰이 불법 자료를 근거로 수사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검찰 관계자는 “불법으로 얻은 자료를 수사나 재판에 사용할 수 없어 시민단체의 고발이 있어도 불법테이프를 바탕으로 한 수사는 어렵다.”고 밝혔다. ■ 철저한 진상규명 필요한 시점 이에 벌써부터 민노, 민주당은 “사건 본질은 불법정치자금과 관련한 정치, 경제, 언론권력의 유착”이라고 규정, 국회차원의 진상조사나 검찰 수사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 밖에도 각 시민단체들도 성역없는 수사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에 일단 청와대는 현직 주미대사가 의혹의 중심인물로 떠오른데 대해 곤혹스러운 분위기다. 김만수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아직까지는 홍석현 대사 거취문제를 거론할 단계는 아니다”면서 “국정원이 자체조사를 벌이고 있으니까, 결과를 지켜보겠다”고만 말했다. 주미대사라는 직위의 중요성과 한·미간 외교관계 등을 고려할 때 노무현 대통령이 홍 대사 거취를 쉽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청와대 안팎의 분위기다. 하지만 홍 대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일어날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여권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의 전개방향에 따라 홍 대사가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우리에게 일단 불리할 게 없다”는 반응이다. 파장이 확산되더라도 YS나 DJ 집권 당시 ‘추문’은 드러날 수는 있겠지만, 현 정권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인 휘발성은 크다. 우선 X파일에 언급된 인사들이다. 녹취록에는 당시 집권당(신한국당) 실세, 야당(국민회의) 국회의원, 전·현직 검찰 고위관계자 추석 떡값 리스트 등이 언급돼 있다. 당시 야당이었던 현직 여당 중진 의원 이름도 거론된다. 하지만 중진 의원측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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