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감사패와 사랑의 노래 선물한 서울대학병원 법무담당관 김영창씨(58)

지나간 세월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당신은 오직 가정의 안정만을 위해 헌신하셨으며 홀로 흘린 눈물은 가족의 웃음꽃이 되었소. 국가 최고 훈장보다 값진 당신의 아름다운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 감사의 마음을 이 패에 담아 바칩니다- 남편 김영창 드림. 각각의 전혀 다른 인생 속에서 서로를 만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쫓기듯이 달리며 이것이 최선이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길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결국 그들이 운이 좋으면 작은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도 있다. 그러나 박수소리가 그치면 남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나’하는 회한과 멀어진 가족들. 뒤늦게 자신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에 보상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원래 삶의 이면이 그런 것이라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마는 그들. 우리는 그들을 ‘가장’이라 부른다. 0점 아빠, 0점 남편의 뜻밖의 선물 이런 가장들의 슬픈 자화상에 잔잔한 파문에 던진 이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대학병원 법무담당관(부사12기) 김영창씨(58). 그는 2년 전 아내 오정희씨(58)의 생일날 그간의 희생과 노고를 치하하는 감사패와 직접 작사한 노래 <애정의 보답>을 선물했다. 아내에게 전해준 감사패. 아무도 그가 그런 것을 계획하고 있을 지 몰랐다. 무뚝뚝하고 일밖에 모르던 남편이 준 감사패에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올해로 아내와 결혼하지 34년째입니다. 그간 저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무서운 사람으로만 통했죠. 대학병원의 법무관 특성상 크고 작은 법률 문제들이 워낙 민감해서 이쪽저쪽 의견을 조율하기 힘듭니다. 의료분쟁 같은 일이 터지면 한 달에 반은 거의 집 밖에서 살다시피 하니 솔직히 가정을 돌 불 겨를이 없었죠. 그저 아내가 잘해주려니 하고 믿은 겁니다”라며 본의 아니게 아내와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하루종일 법원이며 병원을 다니며 일을 하다보면 집은 그저 옷 갈아입고 가끔씩 밥 먹는 장소로 되어갔다. 딸이 아빠 얼굴 기억하기도 힘들다며 불평해도 모두가 가족을 위한 일이라며 ‘0점 아빠, 0점 남편’을 자처했다. “아내와 결혼한 지 32년 되던 해, 정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 참 고생이 많았구나. 그 동안 아이들의 자잘한 학교 생활 이야기부터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휴일이나 무슨 날이면 남들은 가족 외식이다 뭐다 특별하다는데 저는 솔직히 그런 건 아내만 믿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그 흔한 동창회도 안가고 ‘희생’한 것에 무관심했죠” 사람이 나이 들면 철든다더니 이제야 뭐가 소중한지 구분하겠다며 웃는 김영창씨. 따뜻한 말 한마디, 그윽한 눈길, 다정하게 손잡으며 위로해 주지도 못했던 자신이 후회가 됐다. 이런 작은 것들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건만. 무심히 주위를 둘러보니 ‘무늬만 남편, 이름만 아빠’인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예쁘고 똑똑하게 자라난 네 딸들과 편안하고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집안이 있었다. 아내의 노고에 겉치레 섞인 인사말이나 별 의미 없는 선물 대신 뭔가 특별한 걸 해주고 싶었다는 김영창씨. 그는 아내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감사패 제작업소에서도 ‘아내를 위해 감사패를 만드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감사패 증정은 특별했다. 그리고 그 해 5월 말 아내에게 바치는 사부곡 <애정의 보답>이 담긴 트로트 음반 <추억의 나래>를 제작했다. 그가 직접 작사한 <애정의 보답>이란 곡은 그간 고생해온 아내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절절하다. ‘지난 세월 어려운 역경 속에서 가정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세월 그간 많이 남몰래 흘린 눈물이 행복의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가족 위해 노력하신 당신의 공은 올림픽 금메달 훈장보다도 더욱 값진 것이기에 빛난답니다. 지난 세월 어려운 역경 속에서 가정만을 생각하며 살라온 당신. 그간 많이 남몰래 흘린 눈물이 오늘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당신께 드린 말씀은 영원히 변치 말자 생각하면서 한평생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진솔한 고백. 아내는 그의 ‘애정’에 넉넉한 웃음으로 ‘보답’했다. 1등만이 살아남는 군인정신, 인생은 전투와 다르지 않다 그간 김영창씨의 인생은 다채롭고도 화려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해병대 하후 12기 출신인 그는 이른바 ‘귀신 잡는 김하사’였다. 그는 월남전이 가장 치열했던 시절 당시 21세의 나이로 해병대 청룡부대 소속 특공분대장으로 파병되어 2년 간 전쟁터를 누볐다. 온 몸에 파편을 맞는 중상을 입고도 무사 귀환한 덕에 참전공로 훈. 기장 국가유공 제21-041526 훈장을 수여 받았다. 또한 월남 특공대 7중대, 청룡 3대대, 청룡부대 특공대 등 많은 곳을 거쳤다. 청룡용화작전, 용주작전, 서룡작전, 서룡1·2·3작전에도 참여, 능력을 펼쳤다. 아내에게 감사패를 선물하고 직접 작사한 노래를 불러주는 다정다감한 그에게는 이렇듯 남다른 ‘남자다움’이 숨어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싸움과 분쟁을 일으키는 남자가 아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 김영창씨는 이렇듯 진정한 남자다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베트남이라는 전혀 생소한 나라. 한국에서의 한 달여 간의 훈련으로는 전쟁터에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는 그런 신병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민간인으로 위장한 현지 간첩을 색출하여 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적군을 포로로 잡아 새로운 정보를 얻어내는 등,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역할을 120% 이상으로 소화했다.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아무나 하지 못한다는 해병대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남다르다. 전투가 항상 아군의 승리로 끝났던 것은 아니다. 전투 중 많은 대원들이 전사하기도 하고 김영창 씨 자신 역시 팔 상단부에 총알이 꽂히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동료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죽어갈 때마다 ‘살아야겠다, 이겨야겠다’는 오기로 생과 사의 위기를 극복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강인한 군인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병대를 떠나 사회 어디서나 군인정신이란 필수요소라는 것. “전투에서는 1등만이 살고, 2등은 부상, 3등은 죽음뿐. 총알은 비껴가지 않는다” 는 그의 말은 그간 치열하고 후회 없이 살고자 하는 그의 인생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노래하는 공무원, 받은 사랑 불우한 이들에게 되돌리고 싶다 그는 가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근무처인 서울대학병원에서도 ‘무서운 사람’으로 통한다. 잦은 출장과 야근, 철야근무에 시달리면서 철저하고 꼼꼼한 일 처리로 이름이 높다. 제대 후 경찰서 수사관을 거쳐 서울대 의료사건 송사 담당으로 벌써 20년이 넘게 재직중이다. 40살이 넘으면 더 이상 직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요즘, 그의 이력은 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성실성을 입증한다. ‘대충’과 ‘적당히’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는 김영창씨. 하지만 그는 인생의 즐거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외곩수 공무원과는 전혀 다르다. 현재 김영창씨는 한국 연예인협회 창작위원회 위원이다. 어린 시절 악단을 쫓아다니며 막연히 느꼈던 음악에의 동경. 그는 어깨 너머로 악기를 배웠다. “음악은 콩나물 대가리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다”며 겸손을 보이는 그는 색소폰, 기타, 하모니카, 퉁소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그는 ‘바쁜 일’이라는 핑계 속에 자신의 끼를 숨겨두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작사, 작곡에 힘쓰며 자선행사와 구민을 위한 공연 등 크고 작은 무대에 올라 남성적이면서도 담백한 창법으로 열창하는 김영창씨. 아내와 딸들을 위한 선물이자. 중·장년층을 위한 독집 트롯트 앨범 <추억의 나래>를 만들면서 그의 끼는 더욱 빛났다. 앨범에 수록된 8곡 대부분이 자작곡이다. 그의 가슴속에 묻어둔 가수의 꿈을 작게나마 이룬 것이다. 또한 그는 음반 판매 수익금을 서울대학병원 내에 있는 <함춘후원회>에 지급하여 훈훈한 미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이 뭐 볼 것이 있냐고 주변의 과도한 관심과 칭찬이 부담스럽다는 김영창씨. 자신을 비롯해 우리나라 남자들 많이 반성해야 한다며 웃는 그는 가정과 일, 자신의 끼 등 인생에서 한가지도 이루기 힘든 것들을 행복하게 조화시켰다. 그저 무섭고 엄한 아버지인 줄 알았던 네 딸들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깊은 속마음과 사랑에 감사를 보내고 있다. 용맹한 군인으로, 능력 있는 공무원으로, 다정한 가장으로, 가수로 자신의 인생을 옥토로 가꾼 그가 계획하는 앞으로의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병원에 근무하면서 너무나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제 병원업무에서 벗어나 소외된 사람도 돕고, 진료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애환까지 모두 들어주고 싶습니다. 또한 작사, 작곡에도 몰두하면서 책을 펴내고 싶기도 합니다. 물론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야죠. 그 간의 아내의 고생에 보답하려 합니다.” 칭찬과 상만을 받아온 그의 인생.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과 하고싶은 일의 조화를 적절히 이루며 살아가는 그는 자신의 여러 가지 모습에 열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치열함과 순박함, 긴장과 여유, 남자다움과 부드러움을 두루 겸비한 그가 펼칠 앞으로의 인생에 주목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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