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측근들의 배신에 실망감을 일기장에 털어놔… 지워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한 그의 정치신념

 

박근혜 당선인은 육영수 여사 장례식을 치른 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청와대 안주인 역할을 맡았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6년 동안 퍼스트레이디로서 살았다.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1980년 5·17 조치 이후 새마음봉사단은 강제해산됐다. 박 전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헌법에서 ‘5·16 혁명정신’을 지웠고 하나회에 부정적이었던 공화당 실세는 권력형 비리 혐의를 씌워 제거했다. 점차 박정희 시대는 부정, 부패, 비리의 시대로 굳어져갔다. 유신 말기에 이미 박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경쟁할 지위까지 올랐던 김종필은 물론 정치 생명을 부지하려는 옛 공화당 인사들도 박정희 비판에 나섰다.

또 전두환 정권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식도 허용되지 않았다. 박 당선인 남매가 친지들과 함께 집안 제사로 대신했다. 국립묘지에서 첫 수도식이 열린 것은 1987년이었다.

아버지를 도왔던 이들의 계속되는 배신에 박 당선인은 아연실색했다. 정인숙 사건 등 아버지와 관련된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일기장에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1981년 2월), “자기를 은혜로이 돌보았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하여 총을 겨눌지, 욕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 또 그러한 사람들이 영웅시되는 사회는 도덕이 바로 설 수가 없다”(1981년 3월) 등 배신감과 불신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1979년부터 정치입문을 한 1998년까지는 대중들 시야에서 박 당선인이 사라진 시간이다. 그의 일기집과 몇몇 인터뷰 기록 외에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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