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달러화 약세와 한국은행의 힘

8-15해방이래, 우리나라는 영원히 미국의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는 것이,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얼마 전 한국은행의 실언 한마디에 세계금융시장이 요동쳤던 것을 떠올려 보면, 한국이 미국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일도 그저 한낱 꿈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 한은의 외화 보유자산 다양화방침에 대한 언급은 결코 의도적이 아닌 해프닝이었지만, 한은이 미국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준 사례다. 단지 한은의 보고서 한 줄 때문에, 당시 몇 개월 간의 하락행진에서 벗어나 겨우 상승세로 반전됐던 달러화 가치는 뉴욕 외환시장에서 6개월만에 최저치로 폭락했고, 미국 주식시장의 하루 낙폭은 2003년 5월 이후 최대치에 달한 반면, 채권과 금·석유 등 달러표시자산 가격은 급등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외화 보유자산을 다양화하겠다는 한은의 언급으로 미국 달러화 가치가 폭락한 것은 더 큰 (미국의) 경제위기에 대한 경고신호일 수도 있다”며, 달러 약세를 초래한 부시대통령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국가와 개인이 모두 긴축에 나서는 것이 달러화 급락이 초래할 경제위기를 막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부시대통령이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달러화 약세를 용인하고 있으나, 정권의 인기를 겨냥한 감세정책 유지를 위해 재정적자의 감축에는 손을 놓고 있어, 약(弱)달러의 약발이 먹히지 않고 무역적자가 확대 일로에 있다는 것. 뉴욕타임스는 “한은의 언급은 막대한 규모의 달러화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 등도 달러화 매각대열에 합류하리라는 추측을 불러 일으켜, 달러화 급락을 가져왔다” 면서 “이런 불안이 현실화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 월스트리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막강한 힘을 인식하게 됐고, 박승 한은총재의 이름을 분명히 인지하기 시작했다. 지금 월가는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혹시나 달러자산을 매각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최근에는 똑같은 유형의 외환시장 격동사태가 이번에는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입 때문에 발생했다. 고이즈미의 실언-환율폭락-일본정부 해명-환율반등이 몇 시간 사이 이어졌다. 리먼 브라더스의 이튼 해리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달러화 가치가 앞으로 수년 동안 20-40% 추가로 떨어질 수 있다”며 “쌍둥이 적자가 심각해지면서, 향후 3년 이내 미국경제에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겠다. 위기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3분의 1이 넘는다”고 분석한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의 문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위기 폭발의 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면서 “한국 등 거액의 외환보유국들이 달러를 모두 팔아치우지 않고 보유량만 점차 줄여나가더라도, 달러화 가치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확실히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은 마음만 먹고, 서로 힘만 합칠 수 있다면, 미국을 일순간에 경제위기로 빠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막대한 달러화와 미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말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2천21억6천만 달러에 달한다. 세계 제4위의 달러화 보유국이다. 또 한은은 680억 달러의 미국 국채(달러표시채권)를 보유하고 있다. 달러가치가 하락하면 할수록 앉아서 거액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손실회피를 명분으로 달러화 매각 또는 채권상환요구에 나선다면, 미국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또 외환보유고를 이용해 미국내 기업이나 부동산을 엄청나게 사들일 수도 있다. IMF 외환위기 때와는 정반대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미국의 멱살을 쥘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다면, 달러가치 하락에 따른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고이즈미 실언사태에서 보듯이, 외환시장규모가 작아 시세조종이 쉬운 점을 악용한 국제투기자본의 공격으로, 예기치 못한 엄청난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지금 적정 외환보유액이 얼마인지, 보유외환의 활용과 관리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런 논의가 주목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2005년 3월 14일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