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 비친 애잔한 풍경, 현대인들의 슬픔에 바치는 시

지난 연말 EBS <일요명화>시간에는 고전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을 패러디해 제 48회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과 타임지 선정 95년 세계 10대 영화에 선정된 그리스의 거장 감독 테오 앙겔라 포스 감독의 <율리시스의 시선>이 방영된바 있다. 이에 그리스의 영상 시인으로 불리는 본 감독의 또 다른 명작이며 심금을 울리는 그 주제곡 또한 매우 아름다워 심야 음악방송에서 우리나라 음악 매니아들의 리퀘스트 순위에서 메스트로 꼽히곤 하는 수작 <안개 속의 풍경>을 소개하고자 한다. 89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최우수감독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한 바 있는 <안개 속의 풍경>은 어린 오누이의 여정을 담은 서정시를 읽는 듯 몽상적이고 고통스러운 로드무비다. 어머니에게 부담되기 싫은 어린 두 남매는 아버지가 돈벌러 갔다는 독일을 향해 막연히 기차를 타고 떠난다. 실은 그들은 사생아이며 독일에 있다는 아버지도 모두 어머니가 지어낸 이야기로 누구인지도 모르는 부는 그 곳에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고 막막하고 두려우며 그들에게 닥친 삶의 여러 양태는 결코 닿지 못할 곳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그래서 오누이는, 무의식중에 세상에 대한 빛과 어두움이라는 종교적 화두를 안고 있다. 눈 내리는 결혼 축제의 들뜬 전경, 그 옆에서 죽어 가는 말의 터져 나오는 헐떡임에 힘없이 울기만 하는 소년, 동물적으로 소녀를 강간하는 트럭 운전사는 절망적이다. 자신이 새라고 믿으며 날아가길 꿈꾸는 몽상가 갈매기 아저씨, 수지 타산이 맞지 않은 순수 예술을 고집하며 공연장조차도 얻지 못해 헤매는 유랑극단, 그 노인들의 쓸쓸한 퇴장, 몰락과 소외, 좌절, 유아 강간, 성매매, 무책임한 성과 부, 어른으로서의 책임 회피, 힘겨운 미혼모 문제, 기차와 음식점에서의 금전 중심의 몰인정, 국경의 총성, 거리의 획일적인 군대 이미지 등의 어른들의 가련한 치부들이 알 수 없는 세계로 차갑고 음울하게 비춰진다. 순수한 영혼 어린 두 남매의 상처 입는 어른 되기, 혹은 부조리한 어른 세상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체 맨몸으로 상처받기라는 가혹한 통과의례로 다가온 미로다. 이 실존적 상황에서 온몸의 감성으로 떠는 애처로운 몸짓들이 영상으로 비춰진다. 그 방랑 길에서 오누이는 대리 아버지로 소녀에게 첫사랑을 주는 따스함을 지닌 청년과의 잊을 수 없는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다. 그는 몰락해 가는 유랑 극단의 단원이며 입대를 며칠 앞두고 불안 속에 삶의 의미를 회의하는 선한 청년이다. 순수한 영혼은 먼 곳에서도 서로를 알아보며 마침내 서로에게 이끌림을 당하고야 만다. 그리곤 서로의 상처를 한 순간에 이해하게 되고, 감싸안고 보듬으며 서로를 성숙시킨다. 여권이 없는 남매를 쫓아내는 기차에서 기진맥진 탈출하여, 청년과 함께 도착한 바다. 그 새벽바다에서는 거대한 손 조각상이 이끌려 떠오른다, 이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닮은 명상적인 낯섦. 장엄한 그 장면은 인간의 무언가 희망을 쥐고 싶어하는 근원적 욕망, 고독, 빈손으로 가는 죽음의 그림자 인간운명의 투영이 아닐까. 혹은 종교적 차원으로 천상에서 지상으로 좌초해 버린 신, 구원의 손이라고도 느껴졌다. 삶에 상처받은 쓸쓸하고 상처받은 순수 영혼들이 어느 새벽, 그 비밀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평론가들은 흔히 이 작품을 일련의 꿈 같은 이미지들로 하여 초현실적이다'라고 평한다. 그러나 아직 순수를 지키기 위해 온갖 상처와 고독을 감내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무의 필름 조각에서 아름다운 나루가 있는 안개속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깊은 응시로 얻은 생의 비밀에 대한 성찰 능력, 진실의 미학을 삶으로 체화할 수 있는 능력을 생리적인 삶의 방식으로 취하곤 한다. 감독은 아직 세상은 신비 그 자체, 유일 무이한 완전한 예술체라며 잠자는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두 남매의 여정의,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은 분명 아버지 찾기였지만 진정한 목적은 순례자 임무를 띈 그들의 세기말 세상에 구원의 이미지를 줍는 술래잡기 게임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그 배고프고 춥고, 지친 여행길 안에서 아버지란 이름으로 살짝 감춰진 상징은,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갈망인 것이다. 그 힘은 그들이 결국 국경의 강을 건너고 절망뿐인 세상에서 안개 속의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를 만나며 '태초에 빛이 있으라'란 두 남매가 즐겨 뇌이던 옛 이야기-(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서도 동일하게 제시되는 '절대명제'의 테마)처럼 점점 빛으로 싸이는 장면의 결말을 맞는다. 본 영화는 앞서 밝힌 본 감독의 또 다른 명작 <율리시스의 시선>속의 겨울 여행과 같이 목적지 없는 혹은 목적지를 향해 바르게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여행 속에 표류하고 있다. 두 작품에서 보여지는 여행과 방랑은 온 인류의 삶의 순례를 함축하고 있고 또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짊어지어진 고독과 어두운 현실, 그 속에서의 희망과 구원을 찾는 순수 영혼들을 수난사와 그 속에 제련되는 떨리는 영혼의 결정을 감성적 영상에 풀어놓은 인류에 대한 상징성으로 가득하며 있다. 세기말 이였기에 탄생할 수 있는 감성과 메시지였다는 느낌, 현대 사회의 공허함과 절망감에 지친 인류에게 바치는 잠언 시와 같은 영화, 이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인 모든 것을 중단하고 군상들이 바라보던 내려오는 순결한 눈과도 같았다. 어쩌면 강을 건네다 다른 차원. 내세에서의 빛의 공간으로의 분해, 꿈길로의 흡인이었을 지도 모르는 길 잃은 천사들, 두 오누이는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 끝없이 방랑하며 영원을 헤매다 우연히 마주 친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 걸어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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