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장 동력 확보에 사활 걸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오너들이 전문경영인(CEO)들을 집결시키고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중국으로 CEO들을 불러 호된 질책을 했고,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인문학적 성찰을 기반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밖에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도 5대 과제를 제시했다. 재계에서는 이 같은 오너들의 경영 전략과 관련해 글로벌 경기 침체로 연관 짓는 분위기다. <시사신문>에서 재계 수장들의 질타 이유와 그 배경에 대해 짚어봤다.

“장밋빛 전망만 말고 CEO 직접 나서라”

 

9월 12일 중국 베이징 ‘CJ글로벌 컨퍼런스’ 현장. 이재현 회장의 질타에 전문경영인(CEO)들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CJ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기 위해 수년 째 ‘강공 드라이브’와 채찍을 가했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이 회장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지금껏 화려한 보고서만 있었지 성과는 없었다. CJ그룹의 미래가 달려있는 글로벌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장밋빛 목표나 구호에 그칠게 아니라 CEO부터 직접 나서라.”

이재현 회장이 이날 자리에서 내뱉은 말이다. 얼핏 들으면 계열사 사장이 부서장급에게 하는 지탄의 목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이날 자리에는 이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CJ부회장을 비롯해 이관훈 CJ(주)대표, 김철하 CJ제일제당 대표, 이해선 CJ오쇼핑 대표, 변동식 CJ헬로비전 대표, 이현우 CJ대한통운 대표, 허민회 CJ푸드빌 대표 , 손관수 CJ GLS 대표 등 그룹 4대 사업군 전 계열사 최고 경영진 및 임원 70여명이 참석했다. CJ그룹을 이끄는 모든 경영진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 회장이 폭발한 것이다.

이재현 회장은 이 자리를 위해 전 계열사의 최고 경영진들을 중국 베이징으로 집결 시켰다. 이를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국내에서도 컨퍼런스가 가능하지만 글로벌 사업 확장을 하기 위해 최대 시장인 중국으로 불러들여 긴장감을 좀 더 높이는 효과를 원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분석에 힘을 실어주듯 이재현 회장은 글로벌 사업에 대해 유독 지적했다. 이 회장은 특히 이른바 ‘끝장정신’을 강조했다.

이회장은 “제2의 CJ 건설을 목표로 중국 사업을 시작한 지 17년이 지났지만 당초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이왕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글로벌 사업을 이끄는 리더들이 먼저 나서지 않으면 제대로 된 성과가 날 수 없다”며 “책상 앞에 앉아 화려한 보고서만 만들지 말고 CEO들이 직접 현장으로 뛰쳐나가 무엇이 문제인지,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일일이 점검하고 실행하라”고 지시했다. 계열사 CEO들의 인식전환 및 실행력을 강조한 것이다.

CJ그룹은 이 회장이 계열사 최고 경영진들을 강한 톤으로 꾸짖은 이유로 중국 사업에 대한 부진을 꼽았다.

그룹에 따르면 CJ는 지난 1990년대 중반 중국 사업에 나선 이후 식품ㆍ식품서비스ㆍ신유통ㆍ엔터테인먼트ㆍ미디어ㆍ바이오 등 그룹의 4대 사업군을 모두 진출시켰다.

그러나 바이오 사업을 제외하면 최근 성장세가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이에 각 계열사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통해 중국 사업 재도약의 해법을 찾고 ‘2020년 GREAT CJ’ 달성에 속도를 내겠다는 것이다.

이재현 회장이 중국시장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생산 기지 중심에서 내수형 소비시장으로 빠르게 탈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는 2020년 중국 내수 시장은 세계 소비의 21%를 점유해 세계 1위 시장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중국 정부 정책에 따라 서비스업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면서 제조업과 비슷한 수준으로 비중이 커졌다.

이와 관련 이 회장은 “중국이 세계 제조업의 중심으로 떠올랐지만 CJ그룹이 갖고 있는 생활문화산업, 특히 문화 콘텐츠 분야는 최소 10~20년간 중국에서 쉽게 따라오지 못할 사업”이라며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큰 수익을 창출해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인문학적 과제·5대 과제 제시

이재현 회장처럼 질타 수준은 아니지만 글로벌 성장과 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재계 오너들의 과제 주문은 끊임없이 제기됐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최근 CEO들에게 ‘인문학적 리더십’을 제시했다. 허 회장은 지난 14일부터 이틀간 강원도 춘천의 엘리시안 강촌리조트에서 열린 ‘GS 최고경영자 전략회의’에서 “시대와 문화의 흐름에 맞는 차별화된 경쟁력으로 변화를 선도하자”고 주문했다.

허 회장은 특히 ‘인문학적 이해와 리더십’을 주제로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을 비롯한 계열사 최고경영자와 주요 사업본부장 등 60여명이 참석해 인문학적 소양에 바탕을 둔 리더십을 강조했다.

허 회장은 “여러 방면에서 경영기반을 제대로 갖추자면 무엇보다 차별화에 성공해야 한다”며 “기술과 제품을 차별화하고 서비스까지도 차별화 한다면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시장과 고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날 회의에서는 정재승 KAIST 교수, 김상근 연세대 교수,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서희태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 지휘자 등이 참석해 인문학적 소양에 기반한 리더십에 대한 강의가 이뤄졌다.

GS그룹은 ‘인문학적 이해와 리더십’을 주제로 전략회의를 가진 것은 지금처럼 불확실하고 어려운 시대에는 성과 위주의 경영에서 벗어나 인문학적 접근을 통한 창의적인 리더십과 소통을 중시하는 조직문화로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그룹 회장도 미국 방문을 마친 뒤 품질에 대해 강하게 강조했다. 정 회장은 기아차 조지아 공장과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 힘만으로는 안된다”며 “협력업체 품질이 매우 중요하다. 협력업체와 유기적인 협조 관계가 시스템적으로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또 귀국 후 첫 업무로 부회장단과 주요 계열사 사장들이 참석한 전략회의에서 “미국 시장에서 일본차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라”고 지시한 뒤, “이를 위해 품질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잇단 오너들의 지시사항은 왜?

이처럼 최근 들어 그룹 오너들의 경영과 관련한 지시사항이 끊임없이 늘고 있는 이유로 글로벌 경기 침체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경기침체를 겪고 있기 때문에 전사적인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

국내 대기업들은 지난 몇 년간 글로벌 기업으로의 성장을 최대 화두로 삼았다. 대부분 포화상태를 이룬 국내 시장보다는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 신성장 동력을 확보한다는 것이 전략이었다.

하지만 ‘리먼 사태’ 이후 시장이 급격하게 얼어붙으면서 글로벌 시장 개척은 큰 난관에 부딪쳤고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인해 꾸준히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 시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기업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모르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CEO 및 경영진들에게 좀 더 강한 메시지와 ‘채찍질’을 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또 후계 구도와 시장 영향력 확대를 연관 짓고 있어 흥미롭다. 재계 한 관계자는 “2세를 넘어 3세, 4세로의 후계 전환을 위한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대선 정국 등으로 인해 기업의 확장 및 경제 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과거처럼 이미 정복이 끝난 시장을 후계에 넘겨주는 데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따른다”면서 “새로운 시장을 확보해 도전적인 기업 이미지를 후세 물려주는 전략도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후대에 갈수록 자녀의 숫자가 늘어나 물려줘야 하는 기업이 늘어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