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광기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검투사라는 뜻의 ‘글래디에이터’. 이 영화는 2001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작품상 의상상 음향효과상 시각효과상을 휩쓸며 대작의 위세를 과시했다. 글래디에이터는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한 검투사가 영웅으로 올라서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영화는 로마 5현제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쟁 영웅 막시무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을 담아 권력의 비정함을 알리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코모두스는 아버지와 누이가 자기보다 막시무스를 더 사랑하는 데 절망한 나머지 광폭해진다. 영화의 설정과 내용이 사실과 다른 장면도 많지만 코모두스는 무능하고 거친 황제였다. 프랑스의 비극작가 장 라신이 만든 연극 ‘브리타니쿠스’. 국내에서도 공연된 적이 있는 이 작품에는 폭군 네로와 어머니 아그리피나 사이의 기이한 모자관계, 이복 동생인 주니아를 사이에 둔 네로와 그의 이복동생 브리타니쿠스의 갈등이 잘 드러난다. 점차 광기에 빠져드는 네로는 브리타니쿠스를 견제하려고 그의 연인 주니아를 납치하지만 사랑에 빠져 이복동생을 독살한다. 이처럼 인류 역사에는 정신병자 같은 권력자들이 많았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칼리지 학장을 지낸 비비안 그린의 ‘권력과 광기’는 미치광이로 불려온 일부 권력자의 삶을 살펴보는 책이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이들의 광기가 국민과 역사에 미친 영향을 고발한 역작이기도 한 책의 원제는 ‘왕들의 광기’(The Madiness of Kings)다. 로마 시대의 칼리굴라와 네로에서 20세기 이탈리의 무솔리니, 소련의 스탈린, 독일의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절대권력자 26명을 분석 대상에 올렸다. 이들은 정치적 스트레스로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인 권력자들이다. 무엇이 많은 권력자들을 광기의 세계로 내몰았을까. 저자는 의심과 음모로 가득 찬 왕실 분위기가 어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통치자의 정신적 장애 유발에 한몫 했다는 데 힘을 싣는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분석을 빌리면, 어린 시절의 좌절과 상처가 있는 절대권력자들은 더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스탈린은 모두 비참하고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 헌신적인 어머니가 있었지만 경멸스러운 아버지도 있었다. 애정없고 불안정한 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보상을 얻기라도 하듯 권력을 좇고, 악용했다. 권력자들의 정신질환은 대개 뇌 기능 장애 때문에 생기는데, 대표적인 것이 뇌염이었다. 간질과 매독 등도 정신질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과대망상에 시달렸던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정신병은 뇌염에서 비롯됐고, 러시아의 이반 4세와 표트르 대제의 정신병은 간질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스탈린은 천연두를 앓아 보기 흉한 외모를 지녔고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매독에 걸렸으며, 이들은 한결같이 남성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오늘날 잣대로는 ‘파렴치한’과 ‘존속살해범’에 해당하는 중죄를 저지른 광기의 권력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붓 아들로 56세에 왕위에 오른 티베리우스는 술에 빠져 산 알코올중독자였으며, 심복을 독살하는 등 적과 친구를 구별하지 못했다. 동성애자이자 편집증 환자였던 네로는 자신의 어머니와 둘째 아내를 죽였고, 첫째 아내는 자살하게 만들었다. 무수한 사람을 죽이며 정신병자 행태를 보인 그도 별장에서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 8살에 왕위에 오른 영국의 헨리 6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세우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극심한 우울증 환자였다. 주변 사람들이 귀신에 홀렸다고 믿을 만큼 정신분열 증상을 보였다. 광기의 권력자들은 대부분 암살되는 등 권좌에서 불명예스럽게 축출됐으며, 이들의 정신 건강은 자신은 물론 국가와 세계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칼리굴라와 네로의 정치 행태는 로마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고, 영국 조지 3세의 광기는 방탕한 아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해 사회 혼란을 재촉했다. 그러나 저자는 정적들이 왕의 성격 결함과 통치 불안전성을 공격하기 위해 ‘미치광이’ 꼬리표를 붙였을 가능성도 높다고 분석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광기는 제대로 된 사람들이 주변에 더 많았다면 보다 제어될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유권자로 대표되는 국민들의 냉철한 판단이 ‘광기의 재발’을 막는 든든한 토대가 된다는 표현으로 대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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