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장사퇴 거부시 ‘국회 파행’ 불가피

거취 표명 없이 사죄하는 마음, 총선 불출마 밝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최고 해법…정치적 압박 불가피

▲ 박희태 국회의장

박희태 국회의장은 한나라당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돈 봉투 살포 의혹과 관련 “사죄하는 마음으로 우선 4월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박 의장은 지난 1월8일 일본·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스리랑카를 방문하기 위해 출국했고, 순방기간 중 일본에서 열린 제20차 아시아 태평양 의회포럼(APPF) 총회에 참석했다. 박 의장은 외국 순방 후 인천 공항 서편 VIP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검찰 수사결과에 따라서 소정의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모르는 일’사퇴 거부?

박 의장은 “이번 사건은 발생한지 4년이 다 돼가기 때문에 기억이 희미할 뿐만 아니라 당시 중요한 5개의 선거를 몇 달 간격으로 치렀다”며 “지난 2007년 여름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을 치를 때 선거대책위원장을 했고 그 해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4개월 뒤 국회의원 선거 때는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선거운동을 했으며, 2개월 뒤에는 당내 경선이 있었고, 그 후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며 “4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별로 없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또 “그래도 얘기 하라고 한다면 ‘모르는 일이다’ 이 말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다”며 “대단히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귀국한 박 의장이 돈 봉투 살포와 관련 “모르는 일”이라며 국회의장 사퇴를 거부하면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다”고 말해 당장 사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민주통합당은 물론 한나라당에서도 그동안 박 의장이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회의장직을 사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통합당은 이미 박 의장에 대해 사퇴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김진표 원내대표는 지난 12일 “박희태 국회의장이 자진사퇴하는 것이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밝혔고 오종식 대변인은 “국회의 권위와 엄정한 수사를 위해 박 의장 사퇴 촉구안을 이번 임시국회에 제출하기로 최고위원회의에서 결의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역시 박 의장의 자진사퇴를 촉구했다.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박근혜)는 이번 사건 발생후 지난 9일 “책임 있는 사람은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 달라”고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김종인 비대위원도 지난 11일 한 인터뷰에 출연해 박 의장이 버틸 경우 “그것은 상식 이하의 태도”라고 말하고 “정치인으로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즉각 의장직에서 물러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박 의장이 의장직 사퇴를 거부하면서 한나라당의 입장도 미묘해 질 것으로 관측된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야당이 제출하기로 한 국회의장 사퇴촉구 결의안을 처리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박 의장을 지키는 것 역시 난감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박 의장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최고의 해법이지만 이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정치적 압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당장 박의장이 사퇴를 거부할 경우 국회 파행 역시 불가피한 실정이다. 야당은 당장 박 의장이 사퇴하지 않을 경우 의장의 사회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親 이명박계 동반침몰?

여기에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친이명박계의 동반침몰로 이어지느냐는 것이다.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2008년 당시 ‘박희태 캠프’를 정조준하면서 친이계 인사들이 줄줄이 수사선상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검찰이 지난 11~12일 연이틀 조사하고, 구속된 안병용 한나라당 서울 은평갑 당협위원장은 당시 캠프에서 ‘실무 3인방’으로 자천타천 불려졌다. 또 한 사람은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 조정만 국회의장 정책수석이다. 이들 또한 검찰의 소환 대상 선상에 있다. 김 수석은 검찰이 박희태 후보 캠프에 돈 봉투를 돌려준 고승덕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온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박 의장 측근인 조 수석 역시 검찰은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검찰은 안병용 은평갑 당협위원장의 구속과 관련, 문제의 자금 출처를 캐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검찰은 안 위원장을 불러 돈 봉투 전달을 지시한 인사와 돈의 출처를 강도 높게 추궁했으나 안 위원장은 돈 봉투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안 위원장 이외에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 측으로부터 돈 봉투를 돌려받은 박 의장의 전 비서관 고명진씨 등의 통화 내역을 확보, 윗선을 밝히기 위해 통화 대상자를 찾고 있다.

이같이 당시 박희태 캠프 인사들이 연이어 수사 대상이 되자 한나라당 내에선 “검찰 수사에 따라 친이계 가 초토화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2008년 당시 박희태 캠프는 ‘범친이계’의 총 집결지였기 때문이다. 안병용 위원장과 김효재 수석은 친이계에서도 이재오 의원과 가까운 인사로 알려졌다. 최병국·안경률 의원 등 이재오계 인사들이 박 후보를 지지하거나 직간접으로 활동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이나 김문수 경기지사의 측근 인사들도 당시 캠프에 발걸음이 잦았다. 이상득계에서는 이병석·주호영 의원이 각각 경북과 대구에서 지원했고, 김문수계 차명진 의원이 공보 등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당시 캠프에 참여했던 친이계 의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특히 정치권 안팎에서는 당시 캠프 상황과 관련, 청와대의 당 장악력이 최고조인 상황인데 친이계 인사들이 총집결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2008년 4월 총선 전후 이재오계는 ‘안상수 대표 카드’를 생각했지만 이상득계 등이 반발해 원외에 있던 박희태 전 의원을 추천하는 수순을 밟은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에 우호적인 박희태 대표를 세워 집권 초 당정 관계를 청와대 중심으로 이끌려는 로드맵이다.

결국 2008년 친이계는 ‘박희태 당 대표 체제’를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정권 말 레임덕에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악재가 터져 친이계의 분위기는 더욱 더 무거울 수밖에 없게 됐다. 한편 전당대회 돈 봉투를 폭로한 고 의원은 앞서 검찰에서 “돈 봉투는 (2008년 7월3일)전당대회 2∼3일 전 검은 뿔테 안경을 쓴 30대 초중반의 남성이 가져왔으며, 전대 다음날인 7월4일 내 보좌관이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6층 대표실에 있던 박 의장 전 비서 고명진 씨에게 돈봉투를 돌려줬다”고 진술하며 박 의장을 겨냥했다.
 

 

 

장범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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