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정법원 “업무와 백혈병 인과관계 있다” 판단

▲ 삼성전자 탕정공장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유해성 여부와 백혈병과의 인과관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6월 23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직원 황 모씨에 대해 법원이 산업재해를 인정하면서 갈등은 깊어졌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임직원들의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8월 삼성전자는 ‘퇴직 임직원 암 발병자 지원 제도’ 방안을 발표하면서 암묵적으로 직업병 가능성을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재판부가 황 모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한 것에 불복한 근로복지공단은 항소했고 삼성전자는 변론을 지원하는 입장으로 ‘보조참가자’로서 재판에 참여했다. 구랍 22일 첫 재판이 이뤄졌고 다음 2심은 오는 3월 예정이다.


삼성전자 반도체라인에서 근무하다 희귀병·암·백혈병에 걸린 직원들이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백혈병 발병 이후 이들에 대한 대책은 과연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이들은 국가 기관인 근로복지공단에 직업병 신청을 했지만 모두 불승인 처리됐다. 암과 같은 질병은 사람들이 흔히 걸리는 것이기 때문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것 자체가 병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직업병 ‘인정한다 vs 못한다’

삼성전자 반도체라인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황 모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아들의 주검을 보고 반도체 직업병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딸과 2인 1조로 일한 선배가 같은 병에 걸리자 근무환경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언론사와 사회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몇몇 사회인권 단체들과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인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 구성되면서 논란의 실체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는 “황 모씨와 같이 백혈병에 걸린 반도체 노동자들과 희귀 질병자들이 반올림에 제보를 접수했다. 2010년 삼성전자 반도체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은 박 모씨가 수면위로 떠오르자 많은 이들이 ‘반올림’에 관심을 가졌고 지금은 무려 140여명이 제보한 상태다”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전자 측은 수백 명이 일하고 있는 반도체 공장에서 적은 수의 직원이 백혈병에 걸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반올림’ 회원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직업병 신청을 했지만 △증거 불충분 △암은 흔한 병 △희귀질병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기 때문에 불승인됐다. 
삼성전자 홍보팀 관계자는 “근무 환경 때문에 암과 희귀병에 걸린다는 것은 입증이 되지 않는다. 여러 차례 홈페이지를 통해 보도 자료로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공장 현장에서 병에 걸려 사망한 직원이 발생하고 불만이 접수되는 것에 대해 방관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퇴직한 직원들 중 아픈 사람들에게 위로금과 치료비를 주진 않는다. 회사에서도 최대한 복지를 위해 힘쓰고 있다”며 입장을 나타냈다.
입사 2년 만에 급성백혈병에 걸려 2007년 3월 23일에 23살의 나이로 숨진 황 모씨의 유가족들은 회사를 상대로 산업재해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고 2011년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 14부는 황 모씨를 포함한 근로자 5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황 모씨와 그의 선배 이 모씨의 손을 들어주며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반도체 사업장에서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다면 백혈병이 발병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또한 황 모씨와 이 모씨는 같은 경우 근무환경에서 지속적으로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된 것으로 보인 바, 업무와 백혈병과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시했다. 나머지 3명의 직원은 지속적인 유해물질 노출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청구를 기각했다. 4년 만에 일궈낸 결과였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불복했고 항소를 했다. 직업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지난 22일 첫 재판이 이뤄졌다.
이에 대해 이 노무사는 “4년 만에 처음 희생자 2명의 산업 재해가 인정 됐는데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취해 인정받은 2명과 나머지 3명에 대한 재판이 또 이뤄졌다. 다음 재판은 3월 달에 있을 예정이다”고 밝혔다.

열악한 근무환경 “발암물질 인지도 모르고…”

삼성전자 반도체라인에서 근무했던 직원들 중에는 자신이 사용하는 물질이 인체에 유해할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노무사는 “산업재해라는 것이 팔다리 잘리는 것과 외상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었다”며 “심지어 유해 물질이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들 이었다”고 말했다.
이 노무사의 말에 따르면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일했던 김 모씨는 입사 2년 7개월 만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 판정을 받고 사망한 피해자도 있다. 열악한 근로환경에 의해 피해 받은 산 증인이었다. 당시 김 씨의 부모는 삼성전자 측으로 부터 억대의 치료비용을 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산재신청을 취소하고 소송을 취하하라는 조건이 있었다.
‘반올림’ 회원 A씨는 “삼성전자가 환자나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한 적은 있다. 하지만 산업재해 신청은 취소해 달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심지어 제안을 받아들인 직원 유가족은 ‘반올림’과 연락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며 삼성전자의 무책임한 태도를 지적했다.
‘반올림’ 블로그 ‘제보게시판’에도 “근로자들은 안전설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곳에서 일했다. 심지어 장갑을 벗고 약품을 만지거나 알 수 없는 가스를 마신적도 많다”며 열악한 공장 환경에 호소하는 글들이 올라와 있다.
한편 지난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안전한 직종일수록 산재보험요율이 낮은데 교사가 8%, 아파트 경비원이 20%를 적용받는 반면 삼성전자는 3.5%에 불과하다”며 “이는 삼성에서 발생한 암환자가 산재 인정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질타했다.

백혈병 유발 과학적 인과관계 없다?

지난해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에서 근로자 두 명에 대한 산업재해를 인정하면서 사회적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대한 관심이 수면 위로 부각됐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는 지난해 7월 경 미국의 안전보건 컨설팅 회사 ‘인바이론’에 의뢰, 1년 동안 반도체 생산라인 근무환경을 조사한 결과를 공개했다. 당시 ‘인바이론’에 따르면 기흥공장의 반도체 5라인과 화성의 12라인, 온양의 1라인 등 세 곳을 정밀 조사해 생산 과정에서 유해물질이 배출되는지 여부를 살폈다. 백혈병에 걸린 근로자 6명 중 4명에게 암 유발물질이 검출되지 않았고 나머지 2명에서도 낮은 노출 수준을 보였다. 즉 백혈병 발병원인과 근무환경과의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올림 관계자 A씨는 “‘인바이론’업체는 세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회사다. 하필 그 회사를 선택 한 것도 의심이 간다. 또한 조사 결과를 발표할 당시 참여 할 수 없어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다른 사람 말에 의하면 ‘충분한 조사 자료도 없이 이상이 없다고 결정 내렸다’고 한다”며 “현재 진행되는 삼성반도체 사망노동자 5명을 관련해서 어떤 유해물질일 나올 수 있는지 조사했다고 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90년대? 2000년대 초반에 근무했던 분들이다. 현재 작업환경은 그 때보다 많이 달라졌다”며 형식상 이뤄진 현장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홍보팀 관계자는 “반도체 현장에서 근무하는 분들이 공장 환경에 대해서 많은 이의를 제기해 제3의 기간인 ‘인바이론’에 의뢰해 조사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 전에도 근로복지공단이 두 차례 근무환경에 대해 조사한 바 있고 특별한 원인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일축했다.
이 노무사는 “현재 삼성 기업이 ‘무재해사업장’으로 기네스에 등록돼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며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삼성, 백혈병 퇴직자에 1억원 보상

지난 8월 삼성전자는 ‘퇴직 임직원 암 발병자 지원 제도’ 세부 방안을 발표했다. 반도체, LCD 공정에서 1년 이상 일하다 2000년 1월 1일 이후 퇴직한 임직원 가운데 백혈병, 림프종 등 14가지 암으로 투병하는 퇴직자에게 10년간 1억원까지 치료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암 치료 도중 사망자에게는 사망 위로금 1억원을 따로 지급한다. 하지만 이는 산업재해 인정과는 별개의 것으로 선을 그었다.
이 노무사는 “삼성이 이제라도 근로자의 고통을 바라보며 지원에 나선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삼성이 산재 소송에 끼어들어 직업병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모순된 행위”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가 내놓은 ‘지원 제도’에는 90년대 퇴사한 근로자와 암 이외 희귀병에 걸린 퇴직자들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노무사는 “인도적 보상이라는 명목 하에 제도를 발표했는데, 인도적 보상이라는 것은 치료가 필요한 사람, 자격이 박탈된 가족 모두를 포함해 조건 없는 보상을 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특수건강검진 대상자에게만 해당 한다. 좋지 않은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내놓은 일시적인 카드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홍보팀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회사 입장에서 직원들을 배려하는 입장에서 복지를 마련한 것이다.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연관성이 없는 부분까지 회사가 책임질 순 없다. 직원들이 불평?불만을 표하는 부분을 충분히 섭렵하고 협의를 통해 제도를 마련했다. 직원들을 위한 복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재직 직원의 경우에도 회사에서 따로 치료비와 위로금 등 복지를 해주고 있다”고 반박했다.
‘반올림’ 단체와 사회인권 단체들이 반도체라인에서 일하다 병을 앓거나 사망한 희생자들을 강조하며 소리를 높여 산업재해를 인정받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노무사는 “공식적인 제도가 마련되지 않으면 어떤 이는 혜택을 받고 다른 어떤 이는 피해를 보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직업병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치료를 했지만 그 후 일어날 수 있는 후유증?장애가 생길 경우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 복지라고 주는 위로금과 치료비는 임시방편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최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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