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관련 공무원의 조사 잘못으로 심사에서 대거 탈락

쿠데타로 정권을 손아귀에 거머줬던 전두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노태우 정권하에 비로소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법이 처음으로 제정된다. 1988년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이하 민화위)에 의해 본격적으로 광주 5.18관련자 보상을 위한 대정부 건의가 논의화되면서 같은해 11월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 특별 담화문 발표, 광주 민주화 운동 1차 보상법(90.8.6)이 제정된다. 접수 기간(90.8.18-9.15)을 통해 148명이 신청, 11명이 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일정 기간 신문에 고시된 내용을 보고 신청을 접수함으로 이를 알지 못하거나, 정부의 보상 대책에 불만을 품고 신청을 거부한 관련자들이 많은 상태였다. 새로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문 발표(93.5.13)한다. 광주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93.5.29)하고, 2차 보상이 추진된다.(93.5.29) 이때는 행불자 116명이 신청, 생존자 1명을 포함한 9명만이 보상을 받게 된다. 송언종 시장 '특별법' 개정 요구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동안 (94-97년) 5.18묘지 성역화, 보상 혜택,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들을 구속하는 등 여타 정권에서 하지 못한 5.18피해 보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심사과정은 불성실한 조사, 왜곡, 허위조작 등이 얼룩졌으며, 5.18행불가족회(회장 김정길)는 줄곧 중앙부처 및 국회 등을 방문, 재심을 요구해 5·18 피해보상 및 명예회복에 대한 불만을 제기해 왔다. 96년 10월 7일 광주시청 국회 보건사회복지위원회 국정감사(위원장 신기하) 종료 10분전 김정길 회장이 김홍신 의원을 단독으로 만나 송언종 시장에게 108명의 행불 탈락자에 대한 특별법 구제 방안은 없는지 등을 질의해 줄 것을 긴급 요청해 질의가 이뤄졌다. 이에 송언종 시장은 5·18 당시 행방불명으로 추정되는 108명의 가족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90년도에 제정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로는 구제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또한 특별법 개정이 필요함을 강조,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현행법 테두리에서는 행불자를 인정할 방법이 없으니 기존의 재판절차나 심사절차와는 다른 특별 절차를 만들어 별도로 구제하는 법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답했다. 1997년 12월 17일 광주 보상법이 개정, 보상을 받지 못한 광주 민주화 운동관련자를 구제하기 위한 3차 보상법이 이뤄진다. 이때는 행불자 54명의 신청자 가운데 17명만이 인정받는다. 3차에 걸쳐 피해보상을 신청한 결과 구두닦이, 넝마주이 500여명이 제외된 300명 이상의 행불자는 이때까지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 2000년 1월 4차 보상법이 개정, 44명이 신청한 결과 '전원기각' 판정을 받았다. 이에 행불자회측은 심사당국인 광주시로부터 4차까지의 '기각 사유'를 밝힐 것을 요구, 2차례의 행정정보공개청구서를 넣었으나, '절대 불가'라는 광주시의 회신을 받는다. 행불자회 김정길 회장은 행자위의 광주시청 국정감사(2000.10.23)를 통해 '1∼3차까지 탈락자 기각 신청 및 처리자료' 제시를 요구했다, 이를 검토한 결과 5.18행불자 보상신청을 받아 심사하는 과정에서 담당공무원이 총 28명의 자료를 조작하거나 허위 작성 또는 누락시켜 이들을 관련자에서 탈락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행불인을 정신질환자로 몰아 이옥섭씨(차남)는 80년 5월 19일경 전남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 자택에서 광주에 있는 동생 이성섭씨를 만나러 집을 나간후 행방불명됐다. 담당공무원은 최한열씨가 행불자 이옥섭씨를 정신질환로 증언한 것처럼 기록했다. 행불자회에서 확인한 결과 증언자 최한열씨는 "심사위 관계자를 만난 적도 없고, 진술한 적도 없으며, 더욱이 이옥섭씨를 알지도 못한다"고 말했다.최한열씨는 증언이나 조사받은 사실조차 없다며 담당조사관과의 대질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막내아들 이이섭씨 대신 이옥섭씨를 정신질환자인 것처럼 바꾸어 허위로 작성했다. 두 번째 어머니인 박정애씨는 이미 78년부터 딸 이순희까지 데리고 들어와 이문선씨와 동거중이었으며, 79년 3월 5일 만덕초등학교에 행불자 이옥섭씨를 입학시켰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당시 광주시청은 지역 언론으로부터 집중 질타를 받았고, 고재유 광주시장은 당시 4차 보상 책임자였던 5.18 지원협력관실 배태웅 국장을 보상실무위원에서 제외시키고 이후 김기만 국장을 새로운 책임자로 선임했다. 담당공무원 조사 허술하게 작성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동생 오중환씨는 광주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넝마생활을 하고 있었다. 두 형제와 가까이 지냈던 황혼곤씨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전 우연히 양동시장에서 구두를 닦고 있던 오중환씨를 만났다. 당시 형제는 서로의 소식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형인 오명환씨가 부모님 묘소를 이장할 계획을 세웠고, 황혼곤씨는 오중환씨를 찾아가 중요한 일이 있으니 집에 가보라고 부착했다. 이장하던 날인 5월 17일, 두 형제는 부모님의 묘소 앞에서 만났다. 이장을 마친 두 형제는 승용차를 타고 광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 후 황혼곤씨는 양동시장 근처에서 오중환씨가 5.18진압군에게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4차 보상심사를 청구했으나 결과는 기각. 오명환씨는 5.18지원국의 무성의한 조사로 사실이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관련 공무원이 현장조사에서 작성한 진술서를 확인한 결과 황씨의 진술은 '이장할 때 두 형제가 만났다'는 부분에서 끝나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 즉 '황씨가 5.18진압군이 오중환씨를 끌고 가는 것을 봤다'는 부분이 생략된 것. 보증인 황씨는 조사 나온 공무원이 대강 묻는 말에 간략하게 대답만 했고,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늘어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오명환씨는 황씨의 진술을 재확인하고, 현재 행정소송 준비중이다. 가정 형편으로 부인은 가출을 하고, 이를 계기로 아들(황의승)마저 집을 나가 시장에서 넝마생활을 한다. 아들의 자취를 알 수 없었던 황경주씨에게 큰댁에 아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화로 듣는다. 서울에서 화순 큰댁으로 아들을 찾으러 내려갔으나, 친구를 만나러 간다던 아들(당시 15세)은 5월 17일 광주로 간 후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 병무담당 직원은 행불인의 친모(박광자)와 계모(김애순)를 만나지 않았음에도 이들에게 6세때쯤 가출한 이후 소식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기록, 인우보증인이 신청인과 고향주민이라는 이유로 '행불인을 보지 못했다'는 기존 증언을 번복하게끔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황경주씨는 "찾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죽지 않았나 싶다"며 "보상금은 원하지 않는다. 다만 광주 망월동 묘지 묘역이라도 묻히고 싶다. 죽은 자식으로 돈 받으면 뭐하나.이름이라도 걸어주고 싶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죽은 사람과 대화했다구(?) 이상민씨의 남동생 이상렬(행불인)씨는 5.18 당시 시위대에 가담한 아버지를 쫓아간 후 행불됐다. 관련공무원은 행불인 누나 이영란씨와의 면담 결과 서울 소재 공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동생의 소식을 알 수가 없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행불인의 누나는 2살 때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가족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이밖에 당시 이씨 집주인이 '5.18 당시 행불인 이상렬씨를 봤다'고 담당공무원에게 전해 잘못 기록되기도 했다. 사실은 집주인이 년도 계산을 잘못해 벌어진 결과였다. 또한 경찰 조사 과정에서 보증인에게 '거짓말을 하면 감옥에 간다'고 겁을 줘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이씨는 90년 1차 보상법 제정된 이후 신청기간을 알지 못해 접수를 못한 이후 4차까지 접수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기각사유에는 변동이 없는 채 사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이씨의 마음은 착잡하다. 김정길 회장과 함께 광주시청으로 내려가 '경찰 입회하에 재조사해달라'고 항의, 언성이 높아지면서 시청직원들이 순식간에 몰려나왔다. 이는 상호간에 합의된 사항이었다. 이씨는 "정말 억울하다. 법밖에 하소연할 데가 없는데 정부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공무원들의 잘못이 들통나게 생기자 이를 은폐시키기 위해 죄없는 사람에게 오히려 죄를 덮어씌우려 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관련보상법이 한시법이라는 점을 이용해 빨리 행불자 문제를 끝내려 들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하루속히 특별법을 제정해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희생자나 부상자들과 달리 행불자들이 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는 관련 공무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당시 공무원들의 부실한 조사와 왜곡된 내용 등이 포함된 문서는 기각 판단유무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인우보증인의 증언에만 매달리는 현재의 심사 체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심사 결과 '객관성이 없다'는 불충분한 설명 또한 행불자 가족들은 납득하기 힘들다. 이들의 한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특별법 제정 등 정부의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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