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넘게 거북이 걸음인 사재출연, 면피용이었나?

범현대가(家)가 8월 16일 공식 발표한 사회복지재단 ‘아산나눔재단’이 다른 대기업의 복지재단 설립과는 달리 오너가 자발적으로 사재를 출연해 호평을 받고 있는 가운데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이 약속한 사재출연이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어 비판이 일고 있다.

정 회장은 2006년 4월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 1조원 가량의 사재출연을 발표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6년이 지난 현재까지 1500억원의 사채만 출연했을 뿐 별다른 입장발표도 없이 약속을 제대로 지켜오지 않았다. 물론 사재출연이 법적인 효력은 없지만 대기업 오너의 약속인만큼 사회적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을 제외한 범 현대가가 故 정주영 회장 10주기를 맞아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기로 해 화제가 되고 있다.

범현대가 사회복지재단 설립

현대중공업 그룹과 KCC, 현대해상, 현대백화점, 현대산업개발 등 범 현대가 그룹 사장단은 16일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빌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5000억원 규모의 ‘아산 나눔재단’을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이 재단의 설립기금은 현대중공업그룹 6개사가 2380억원, KCC그룹 150억원, 현대해상화재보험 100억원, 현대백화점 그룹 50억원, 현대산업개발 50억원, 현대종합금속 30억원 등 법인에서 2760만원을 출연해 마련됐다.

또 정몽준 의원이 사재를 털어 2000억원(현금 300억원, 주식 1700억원)을 냈고, 정상영, 정몽근, 정몽규, 정몽석, 정몽진, 정지선 등 창업자 가족들도 240억원을 모아 냈다.

이날 모인 사장단은 앞으로 사업의 기본정책과 중장기 계획에 대한 심의·의결 등 재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재단이사회’를 구성하고, ‘자문위원회’와 ‘기금관리위원회’를 통해 재단을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운영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정 의원은 “아산 나눔재단을 통해 양극화 해소를 위한 나눔의 복지를 실현하고, 청년들의 창업 정신을 고양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아산 나눔재단에는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그룹이 불참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이에대해 “현대차는 정몽구 회장이 2007년 1500억원을 출연한 기금으로 사회공헌문화재단인 해비치재단을 운영하고 있어 아산재단 설립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몽구 회장의 사재출연 약속

이처럼 정 회장은 이미 이전에 1조원대의 사재출연을 약속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은 2006년 4월 정 회장이 검찰에 소환됐을 당시 ‘대국민 사과 및 사회공헌 방안’ 발표에서 정 회장과 아들 정의선 당시 기아차 사장 보유 글로비스 주식 2250만주를 포함, 1조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차는 당시 발표한 사과문에서 △정몽구 회장 부자 사재 1조원 상당 사회환원 △윤리위원회 설치 △기획총괄본부 조직 대폭 축소 개편 △일자리 창출 및 협력사 지원 등의 사회공헌 방안을 약속했다. 정 회장은 회사 돈 693억원을 횡령하고 1034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는 693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현대차 계열사에 2100억원의 손해를 입힌 혐의로 기소된 정 회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당시 재판부는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실형 선고에 정몽구 회장 측은 항소했고, 항소심에서 정 회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아울러 1조원의 사회공헌기금 출연 약속이행과 준법 경영을 주제로 2시간 이상 강연할 것, 국내 일간지와 경제전문잡지에 준법경영을 주제로 각 1회 이상 기고할 것을 부과했다. 사재 헌납은 해마다1200억원씩 7년을 출연해 모두 8400억원 가량을 내는 것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회봉사명령이 ‘노역’의 형태가 아니라고 판단해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했다.

법적인 사재출연 의무 사라져

이후 정몽구 회장은 2008년 6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등을 선고 받았고, 파기환송심에 대해 원하던 대로 집행유예 유예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상고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사실상의 파기환송심의 선고가 확정된 것이다. 이 판결로 사실상 법적인 사재 출연의 의무는 사라지고 도덕적 약속만 남은 셈. 게다가 그가 법원의 판결을 받은 지 겨우 두 달 만에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자에 포함되면서 ‘재벌총수 봐주기’ 논란이라는 모습도 보였다.

당시 참여연대는 “법원은 정 회장이 고령인 점과 8,400억 원대(판결 기준)의 사회공헌기금을 출연하겠다는 사실을 고려했다고 한다”며 “그러나 이러한 법원의 반복되는 솜방망이 판결은 ‘특수계층’ 재벌총수들이 비슷한 범죄를 계속 저지르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참여연대는 “법원이 불법행위를 저지른 재벌총수 등이 사회공헌기금을 출연하는 것으로 실형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주고 있는 것에 심각하게 우려한다”며 “실제로 월드컴이나 아델피아 등의 회계부정에 대해 외국의 법원에서는 전 CEO 버나드 에버스(63세)와 존 리거스(80세)에게 각각 25년, 15년의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법 앞의 만인 평등’을 실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 여론때문을 의식한 듯 정 회장은 사재출연은 일정기간 지켜왔다. 정 회장은 1조원 사재출연을 약속한 후 2007년 600억원, 2008년 300억원 2009년 600억원의 글로비스 주식을 해비치재단에 기부했다.
이후 2009년 12월 7일 600억원 상당의 개인 보유 글로비스 주식 51만2천여주를 해비치재단에 냈다. 약속(지난 2006년 비자금 조성과 횡령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 당시)대로라면 정몽구 회장은 오는 2013까지 1조원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하지만 약속기한은 다가오는데 2009년 이후 더 이상의 사재출연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의구심을 사고 있다. 재판판결인 금액으로 비춰볼 때 1조원보다 적은 8400억원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출연한 액수는 17.86%이다. 정 회장이 공언한 1조원 기준으로는 15%에 불과하다. 법적 의무는 없지만 당시 재판부가 사회 환원 기한으로 잡았던 2013년까지 불과 2년도 남지 않는 상황에서 보면 약속이행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사채출연 약속이 늦어지자 정 회장의 사재출연이 “유야무야되는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지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4년이 지난 현재까지 1조원 중 약 15%만의 기금으로 출연됐다”며 “이런 식으로 약속이 더디게 이뤄지고 기부도 슬그머니 안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일각 “경영권 승계 걸림돌”

그렇다면 정 회장의 사재출연이 늦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계에서는 사재출연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승계문제를 들었다. 2006년 3월 재판 당시 “글로비스 주식을 내놓겠다”고 밝혔던 정 회장이 5월부터 “현금이 될지 뭐가 될지 알 수 없다”며 글로비스에 대한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다. 글로비스 주가가 올라간 것도 이유 중에 하나지만 더 큰 이유는 글로비스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다.

글로비스는 현대기아차그룹의 부품이나 완성차 수송대행 같은 계열사 발주 물량을 독식해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글로비스는 지난해 총매출 5조 8334억 원의 89.3%에 해당하는 5조 2115억 원을 관계사 매출로 실적을 올렸다. 이에 일각에서는 정 회장의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31.88% 지분을 보유한 최대주주이기 때문에 글로비스 지분 매각을 통한 사회 환원은 경영권 승계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결국 남은 2년간 8500억원 상당의 글로비스 주식을 추가로 내놔야 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는 정 부회장의 지분 또한 발목이 묵인 상태.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작업에도 브레이크가 걸린 셈이다.

또한 법적인 책임이 없어졌기 때문에 사재출연을 이행하지 않아도 문제될 게 없다. 단지 사과의 뜻에서 밝힌 약속이기 때문에 일부만 사재출연이 이뤄지고 넘어갈 수 있다는 반응도 있다.

결국 이런 상황 때문에 정 회장의 사재출연을 두고 곱게 보는 사람은 드문게 사실이다. 이를 두고 여론무마용이라는 지적도 재계 안팎에서 나왔다. 재계 한 관계자는 “당시 판결을 앞두고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한 의도적 발언이라는 해석이 많았다”며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없는 이상 약속을 이행할 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급기야 정치인도 이런 비판대열에 합류했다. 박민식 의원은 17일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강화 공청회’에서  2천억원의 사재 출연을 자청한 정몽준 의원의 말을 인용하며 “기업인들이 경제발전의 선구자였는데 2,3대로 가면서 자기 주머니만 채운다”고 비판했다. 박 의원은 허창수 전경련 회장에게 “정 회장이 2006년 비자금 관련 공판 과정에 사재 출연을 약속해 놓고 6년이 지나도록 지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6년 지나도록 지켜지지 않은 약속”

박 의원은 “6~7년이 흘렀는데 그 약속이 제대로 이행됐다고 어떤 국민도 평가를 안 할 것”이라며 “그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서 대기업 전체에 나쁜 이미지를 남겼다. 대한민국 굴지 기업 오너가 사회적 공헌도 중요하나 자기 약속도 안 지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더 나아가 “그 사건을 보면 대중소기업 상생의 모든 문제가 거기에 다 있다”며 “일감 몰아주기의 가장 대표적 사례가 바로 글로비스(현대차그룹 계열사)다. 자기 아들에게 자본금 50억으로 시작해 1~2년 만에 일감을 몰아줘 1조원이 넘는 기업을 만든 것. 그러니 국민이 박수치나?”라고 편법적 상속을 질타하기도 했다.

정몽구 회장의 사회환원 약속을 겨냥한 여당 의원들의 지적은 과거에도 있었다. 지난 2008년 10월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주광덕 의원은 “지난 2007년 5월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 1년 안에 1200억원을 사회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던 정몽구 회장은 같은 기간 동안 600억원의 사회 환원밖에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주 의원은 “지켜지지도 않을 사회 공헌 약속을 바탕으로 법원은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법무부는 형 확정 두 달 만에 사면시켜 줬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박민식 의원도 법무부 장관을 겨냥해 “해외 도피, 불구속 기소, 집행유예 판결, 사면 등 회장님 구하기 7대 비책”이라며 법조계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관행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다.

현대차그룹 역시 정 회장의 사회공헌 약속과는 ‘거꾸로’ 가고 있다.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를 꿈꾸는 매출 30조 원의 거대 기업이 지난 2007년 내놓은 기부금은 불과 225억 원. 대기업 조사전문 사이트인 재벌닷컴이 2007년 12월 결산, 매출 1조 원 이상인 110개 상장법인의 2006~2007년 기부금 지출 내역을 자체 분석한 결과 현대차그룹은 10위권 밖으로 한찬 밀려났다. 그럼에도 현대차는 정 회장 사면 이후 기업이미지 방송 광고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있다. 사회환원보다는 기업 이미지 제고에만 힘쓰고 있다는 빈축을 사기에 충분하다.

주목되는 사회환원 이뤄질까?

현대자동차는 2011년 상반기 미국 시장에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이같은 성장 속에서 정 회장이 80% 이상 남은 사회 환원 약속을 하반기 안에는 이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이에대해 현대기아차그룹은 기업과는 별계의 문제라는 점을 들어 언급을 꺼졌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정 회장의 사재출연은 그룹 차원의 일이 아닌 개인적인 문제라서 언급이 힘들다”며 “점진적으로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며 언급을 꺼렸다.

이 관계자는 다만 “해비치재단을 통해 사회공헌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정 회장이 공언한 글로비스 주식을 통한 1조원 사회공헌기금 출연이 언제, 어떤 식으로 진행될 지가 주목되고 있다. 단순 면피용인지, 아니면 진정한 반성 차원에서 사회환원을 할지 이제 두고 보면 그 결과를 알 수 있게 된다.

재계 관계자는 “2013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 회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대기업 오너로서 국민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꼴이 된다”며 “정 회장도 이 부분을 신중히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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