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의 애환

▲ 지난 6일 KBS 정문 앞에서 ‘최저임금 및 근로기준법 이행 촉구’ 집회를 열고 있는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보조출연자들ⓒ 시사포커스 유용준 기자

 최근 MBC 월화드라마 ‘동이’에서 궁녀로 등장하는 보조출연자(엑스트라)가 ‘티벳궁녀’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를 낳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보조출연자가 화제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TV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은 잘생긴 외모와 특출한 ‘끼’가 있는 주연급 배우들이다. TV 출연은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막연하게 ‘TV 출연’이라는 꿈만 보고 보조출연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의 속사정은 알려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 6일 KBS 정문 앞에서 ‘최저임금 및 근로기준법 이행 촉구’ 와 관련한 규탄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는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에 가입된 100여명이 넘는 보조출연자들이 참석해 부당하게 받고 있는 임금문제를 성토했다.
이에 본지 기자는 이날 집회에 참석한 보조출연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속사정을 들어보았다.

드라마, 영화에서 행인1, 행인2, 행인3으로 불리는 사람들, 전쟁 소재 창작영상물에서 병사1, 병사2로 불리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장면에서 대사를 하는 주, 조연 배우들 외의 사람들이 바로 보조출연자다. 흔히 ‘엑스트라’(Extra)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드라마, 영화에서 출연자들의 역할을 주연과 조연, 단역으로 나누는데 역할비중으로 따지자면 단역 아래 위치한 게 보조출연이다.
이들에게는 대사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역할이 결코 무의미 한 것은 아니다. 보조출연자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빈곳을 채워주며 극의 리얼리티를 살려 완성도 있는 그림을 만들어주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보조출연자들은 촬영현장이 아닌 거리로 나섰다.
“우리는 개, 돼지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
집회에서 만난 보조출연자 임모씨의 울분에 찬 목소리다.
30년간 보조출연을 해왔다는 임모씨는 생업을 포기하고 집회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임씨는 ‘경찰청 사람들’ , ‘사건25시’ 부터 현재 방영되고 있는 ‘김수로’작품까지 보조출연자세계에서는 맡 언니로 통한다. 임씨 말고도 이날 본지 기자가 인터뷰를 청하자 보조출연자들이 앞 다퉈 자신들의 문제를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자이언트’, ‘산부인과’ 등 7년 동안 보조출연자 생활을 했다는 최모씨(64), ‘제중원’,‘연개소문’,‘김수로’ 등 사극에 전문적으로 출연했던 이모씨(55), ‘전우’에 출연했던 새내기 보조출연자 이모씨(35)와 김모씨(33)까지.
이들은 왜 TV가 아닌 거리로 뛰쳐나왔을까.
맡 언니 임씨는 “보조출연자의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은 4곳의 기획사와 방송사간의 최저임금에 대응하는 임금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현재 한 곳의 기획사를 제외한 다른 3곳의 기획사는 임금을 협약대로 이행하고 있지 않고 있다.
임금 협약은 그동안 하루 일당(일과시간 기준)으로 받던 3만7000원을 4만원으로 인상하고 근로기준법에 따라 연장, 야간, 철야수당을 받기로 한 내용이었다. 이들은 협약 체결 전에는 24시간 촬영 현장에 있더라도 3만7000원을 받을 뿐이었다. 협약 후 24시간 일했는데도 손에 쥔 건 5만1000원이 고작이었다. 일당 4만원에 야근 비 1만1000원이 붙은 돈이다. 시간당으로 따지면 2125원. 최저임금 시간당 4110원의 절반 수준이다.
임씨는 “그동안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표현 못한다”고 말하며“임금 협약을 체결하고 형편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길 기대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임씨는 “헛된 기대”였다고 한탄했다.
임씨에 따르면 체결한 임금대로 받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두 달 임금이 체불된 체 나왔다고 밝혔다.
임씨가 소속된 기획사(캐스팅업체)는 방송사에서 임금을 주지 않아서 못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각 방송사들은 협약한대로 임금을 기획사에게 모두 지불한 상태라고.
임씨는 “임금뿐만 아니라 보조출연자들이 촬영현장에서 받는 대우도 열악하기 그지없다”고 보조출연자들의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온갖 욕설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뿔난 보조출연자들
보조출연자, 감독의 모친상, 부친상에도 불려나가 일해...

촬영현장에서 보조출연자들을 통솔하는 사람을 일명 ‘반장’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기획사 직원으로써 현장에서 자기 기획사에 소속된 보조출연자들을 관리한다.
임씨는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반장’한테서 ‘야!’란 소리부터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을 듣기가 일쑤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임씨는 “이런 심한 욕을 들어도 어디 하소연할 수 없다”고 말하며 “항의하는 순간 다음 출연 기회는 사라진다”고 항변했다.
보조출연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기획사뿐만 아니라 출연하는 배우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임씨는 촬영현장에서 보조출연자역할 말고도 배우들 밥을 해주기 위해서 일을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임씨가 동료와 식사 준비를 다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현재 원로 유명 배우 S씨가 술이 잔뜩 취한 채 와서 술안주 내놓으라고 방문을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중년배우 A씨는 앞에 버젓이 있는 물도 떠달라고 한 적도 있으며 나이 지긋한 B배우는 ‘자신이 코를 골아 왕따를 당하니 아줌마들하고 같이 자야겠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임씨는 보조출연자들을 무시하는 것은 감독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임씨는 “감독들은 특히나 여자 보조출연자들에게 꼭 이 X, 저 X를 붙여가며 부른다”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임씨는 현재 피부병에 걸려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며 기자에게 환부를 보여줬다. 임씨의 다리에는 가려워서 긁어서 생긴 딱지가 가득했다. 드라마 ‘김수로’를 찍고 생겨난 피부병이라고 말했다.
임씨는 더운 여름날 촬영 하고 땀에 절은 의상을 세탁하지 않고 그대로 박스에 쑤셔 넣어놨다가 다음날 또 그 옷을 입고 촬영하기 때문에 피부병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인터뷰 내내 임씨 옆에서 이야기만 듣고 있던 보조출연자 김모씨는 피부병 얘기가 나오자 자신도 피부병에 걸렸다고 환부를 보여줬다. 김씨의 목둘레에는 두드러기가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김씨는 보조출연자들을 마구잡이로 부려먹는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촬영현장에서 스턴트맨들이 해야 할 분량을 즉흥적으로 보조출연자들에게 시킨다”며 “보조출연자들이 단가가 싸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시키고 있다”고 말하며 본인도 여러 번 위험한 역할을 소화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한 두 마디 있는 대사는 단역을 쓰지 않고 보조출연자들을 쓴다고 했다. 언뜻 보조출연자들을 대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속셈이 있다고 김씨는 귀뜸했다.
대사가 있는 단역배우에게는 최소 20~30만원의 일당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보조출연자들을 쓰게 되면 임금을 안줘도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보조출연자들을 이곳 저곳에 부려먹는다는 것이다.
임씨는 기획사의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임씨는 “심지어 감독의 모친상, 부친상에도 불려나가 일을 해줬다”며 “그때마다 제대로 된 수고비 한 번 받아 본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기획사가 다음 프로그램을 따내기 위해 잘나가는 감독이나 방송사에 잘 보이기 위해 보조출연자들을 이용한다는 것.
한편, 얼마 전 KBS ‘다큐멘터리 3일’ 에서 보조출연자에 대한 이야기가 방송됐다. 보조출연자들을 3일 동안 밀착취재하며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리얼타큐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정작 이날 집회에서 만난 보조출연자들은 ‘다큐멘터리 3일’은 드라마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 거짓방송이었다고 주장했다.
방송에서 보조출연자가 기본급여라고 말한 80000원도 하루 24시간 꼬박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며 이날 방송에서 보여줬던 화기애애한 촬영현장은 꾸며낸 거짓방송이라는 것이다.
‘전우’에 출연했던 보조출연자 이씨에 따르면 “물 한모금도 마시기 힘든 상황이 연속인데 수박이 어딨냐”고 반문하며 “설령 수박 같은 게 있더라도 보조출연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씨는 “‘전우’촬영을 하면서 동료 보조출연자가 군화발로 명치를 얻어맞아 뒤로 나자빠질 뻔 한 것을 옆에서 부축해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며 “나는 그 이후로 맞는 게 무서워서 촬영장을 나가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이어 보조출연자가 하소연했던 인터뷰는 모두 삭제된 상태로 나갔다고 강조했다.
 

아들뻘 되는‘반장’에게 반말부터 심한 욕설까지 들어
음식이 썩어나가도 보조출연자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그림의 떡

이밖에도 보조출연자 최씨는 음식가지고 장난치는 게 가장 서럽다고 울먹였다.
최씨는 “감독과 스텝, 배우들이 먹고 남은 음식이 설령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에게(보조출연자)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운 여름날 촬영을 해도 바로 옆에 쌓아놓은 물만 쳐다보고 있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보조출연자들은 자신들에게 배당된 5000원의 식비라도 아끼려고 밥을 일부러 굶는 날도 있다고 보조출연자의 애환을 토로했다.
현재 노동부에 제출한 진정서에 이름을 올린 23인의 보조출연자들은 기획사로부터 캐스팅이 중단된 상태다. 이날 집회에서 만난 보조출연자들의 말에 의하면 노조에 가입된 것만으로도 캐스팅에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날 집회에는 노조에 가입된 인원의 10분의 1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언제 일 꺼리가 주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보조출연자들이 일이 들어왔을 때 하루라도 나가야 한다고 해서 촬영현장을 갔다는 것이다.
임씨는 “우리 노조의 결집력이 아직도 많이 약하다”며 “노조가 캐스팅에 협박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할 때가 지금이다”고 노조의 응집력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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