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무총리 대권 수난사

 김태호 내정자 낙마로 다시 한번 입증
이회창 전총리 본선 진출이 가장 최고
일각 “집권자 ‘아바타’로 여겨지기 때문”

‘40대 젊은 총리’로 ‘세대교체론’을 몰고 올 것처럼 보였던 김태호 전 총리 내정자가 낙마함에 따라 새삼 역대 국무총리들의 대권 도전 수난사가 정가의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역대 국무총리들이 임기를 마치고 대권에 도전할 경우 모두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다만 최규하 전 대통령 경우는 국무총리 시절 비상 대권을 이어 받아 예외적으로 보고 있다.
정가 분석가들은 이를 두고 “국민들의 정서상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키워주거나 방패막이를 위한 ‘아바타’로 인식돼 한 묶음으로 평가 받을 수밖에 없어 독립적인 인물로 각인되지 않는 것이 주된 요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차기 대권 주자로까지 거론되었던 김태호 전 총리 내정자의 낙마를 계기로 지난 국무총리들의 대권 도전 수난의 역사를 돌이켜 본다.

역대 국무총리 출신 중 지난 2002년 대선 때까지 30여년간 대권의 기회를 잡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인사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였다.  그는 길게는 박정희 정권 탄생 시절부터 짧게는 지난 ‘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 대통령 이후까지 후계자를 노리며 끈질기게 1인자 자리에 올라보고자 했지만 ‘영원한 2인자’로 정치 생명을 마쳐야 했다. 일종의 국무총리 대권 도전 수난의 서곡을 연 셈이었다.

김영삼 정부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경쟁
노무현 정부 고건, 이해찬, 한명숙 출사표

국무총리 출신들이 본격적으로 대권에 뛰어든 것은 민주적 대통령 선거가 확립된 ‘문민 정부’ 시절이었다.김영삼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전 총리가 이른바 신한국당 ‘9룡’을 이루며 대권 경쟁에 가세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고건,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가 대권 경쟁에 나섰다.
현 정부 들어서는 지난해 정운찬 총리가 내정 당시부터 여권내 차기 대권구도와 맞물려 여러 해석이 나왔다.
이번에 낙마한 김태호 내정자도 ‘40대 총리, 세대교체론’을 내세워 여권의 대권 잠룡 후보군에 단숨에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들 역대 총리 출신 대권 후보군 가운데 대선 경선에서 승리하고 본선에까지 갔던 인사는 이회창 전 총리가 유일했다.
나머지 인사들은 당내 경선에서 대부분 낙마하거나 일부는 그나마 중간에서 대권의 꿈을 모두 접어야 했다.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이홍구·이수성 후보를 통해 신한국내에 이른바 ‘9룡’ 체제를 만들어 이회창 후보의 독주를 막으려 했지만 이회창 후보는 김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당내 경선에서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이 후보는 그뒤 김 대통령의 강한 견제로 결국 본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패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도 철저히 자신의 후계구도에 간섭하지 않는 태도를 지켰지만, 결과적으로 고건,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가 자천타천으로 대권 경쟁에 나섰다.
하지만 고건 전 총리는 노 대통령의 견제로 중도 하차했고,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는 대통합민주신당 당내 경선에 나섰다가 정동영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다.
현 정부 들어서는 정운찬 총리의 발탁이 여권의 대권구도에 영향을 주려는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세종시 파동’으로 사실상 대권 후보군에서 멀어졌다.
이번에 내정된 김태호 총리 후보자도 ‘세대교체론’의 주자처럼 비춰졌지만 ‘젊은 늙은이’라는 오명만 남기고 추락했다.


그렇다면 역대 국무총리 출신들은 왜 예외 없이 대권 도전에 실패했을까. 이에 대한 정가의 분석가들은 대체로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우선 국무총리는 국민들 시각에서 대통령이 키워주거나 방패막이를 위한 ‘아바타’로 인식돼 한 묶음으로 평가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정가 한 평론가는 이에 대해 “국무총리가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대통령이 지명해 발탁되었다는 점에서 국민들 정서상 독립적인 인물로 각인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평론가는 “국무총리는 대개 관료 출신들이 많아 온실 속 화초처럼 보인다”면서 “국민들 눈에 자생력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질 경우 대선 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선택 기준은 미래의 비전이라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기대치가 사라진다”고 덧붙이고 있다.
다른 평론가는 “그런 의미에서 ‘문민 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 아래서 총리를 맡아 김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고, 나중에 당내 경선에 뛰어들어 김 대통령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대선 후보를 거머쥔 이회창의 케이스를 한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평론가는 “이회창의 케이스는 현직 대통령과 각을 세워 당내 경선에서는 성공했지만, 본선에서 각을 세웠던 ‘살아 있는 권력 대통령’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실패했다는 점에서 좋은 모델은 아니다”고 보고 있다.


다음으로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이후 2000년에 도입된 인사청문회 제도로 국민의 고위층에 대한 도덕적 의무 요구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검증 과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추락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 시절에 장상·장대환 내정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했으며, 이번에 김태호 총리 후보자도 도덕성과 거짓말 논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인사 청문회 도입 이후 총리급에서만 벌써 세 번째이다.

김 후보자 고뇌 끝 스스로 물러나는 결단
‘젊은 총리’ ‘세대 교체’ 모두 ‘한 여름밤 꿈’

이러한 가운데 김태호 총리 내정자는 “각종 의혹에 대해 억울한 면도 있지만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라며 사퇴의 변을 밝히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진솔하게 말씀드리려 했던 것이 잘못된 기억으로 말실수가 되고 또 더 큰 오해를 가져오게 됐다”며 자신을 꾸짖었다.
그는 사퇴 뒤 자신의 트위터에 “비는 내리고 어머니는 시집간다”며, 마오쩌둥이 남긴 어록을 인용하며 담담한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이번에 김 총리 내정자의 낙마를 재촉한 쪽은 친이계 소장파였던 것으로 알려져 주목되고 있다. 사실상 이 대통령의 의중을 거스르는 ‘반란’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 후보자에 대한 한나라당의 반대 기류가 표면화된 지난 의원총회에서 정두언 최고위원을 비롯한 친이계 소장파 의원들이 적극 ‘인준 불가’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 대해 일각에선 “이들이 2012년 4월 차기 총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정권의 안정적 국정운영 보다는 눈 앞에 닥쳐오고 있는 자신들의 선거 때문에 들끓는 바닥여론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또 6월 지방선거 참패 뒤 계속해서 요구해왔던 수평적 당·정·청 관계가 제대로 통하지 않은데 대한 잠재적 불만도 폭발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번 개각에서 당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의외의 인물들이 갑자기 나타난데 대해서도 불만이 내재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에다 여권내 잠재적 대권 주자 진영의 보이지 않는 견제도 김 후보자의 낙마에 한 몫을 한 것으로 진단된다.

박근혜 전 대표측은 물론이고, 김문수 경기도 지사를 비롯한 수도권 의원들의 반대가 예상외로 거셌던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결국 김 후보자는 고뇌 끝에 스스로 물러나는 결단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40대 젊은 총리’로 ‘세대 교체론’의 가능성을 열면서 단숨에 대권 후보군에까지 올라 정치권의 판도를 뒤바꿀 것 같았던 그는 ‘한 여름밤의 꿈’을 꾼 것이었다.
그리고 “총리급에서 대권은 없다”는 말이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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