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해봐야 귀 기울이는 사람 없는 세상, 억울해서 죽을 수도 없다"

나의 인생에서 9년 동안은 부산역광장의 풍경이었다.
달랑 기타하나를 들고 노래하고, 나눠먹고, 싸우고, 절규하는 풍경.
욕구불만 일수도 있고 무일푼의 몽상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자였고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가진 것 없는 무일푼으로 오갈 데 없어 부산역에 늘어 붙어있는 나는 무숙자다.
하지만 오늘도 버릇처럼 노래를 할 것이다.
그것이 매너리즘에 편리주의에 우선주의에 합리주의에 종교주의에서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내가 매일을 대면하는 인물들이며 소설의 구성상 미화시킨 부분이 있지만 사실이다.
매몰찬 세상인심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길 위를 누비고 있는 식구들에게 행운이 따르길 바라며 먼저 세상을 저버리고 간 식구들에 명복을 빈다.
-부산역 광장에서 이호준-
 


청결주의

노숙부랑인들에게 술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청결주의다.
밥 한술을 빌어먹으려 해도 밥주걱을 휘두르며 복음을 강요하는 청결주의의 세뇌를 견뎌 내야하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선 밥 한 그릇, 떡국 한 그릇, 라면 한 그릇이 영생이고 구원이며 죄수복 같은 잠바, 럭키치약, 칫솔, 인삼비누 한 개가 신의 축복이다.
필요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거룩한 소통, 신의 이름으로 구어 먹었는지 삶아먹었는지 흔적도 없다.
길거리에 나앉기 전에 믿었던 종교는 온대간대 없고 입맛대로 수정, 분리하고픈 비계 덩어리들의 주절거림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돈 없고 빽없는 죽음에 믿음, 사랑, 소망은 침묵의 서약일 뿐이다.
 

침묵은 가해자 없는 살인

등장인물.
1.노숙인
버러지 같은 노숙인들, 대책으로 일관하는 정치적 방관, 자본우선주의에 잘 적응한 종교적 오만, 박쥐같은 자본가들의 이중성, 이기적 배금주의와 편리주의에 편견과 판단....................
미래를 꿈꾸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매너리즘의 스펙터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교묘한 투정이며 공허한 외침일 뿐인 것이다.
한탄해봐야 귀 기울이는 사람 없는 세상, 억울해서 죽을 수도 없다.
그래서 앉은 자리에서 눈을 뜨면 술이요, 세상 천대에 지치면 보약 같은 잠을 잔다.
배고프면 게걸스런 식당이요, 깨달음의 경지에 들면 배설의 판타스틱이다.
복음주의를 맹신하는 청결의세상은 무일푼들에겐 존엄에 무덤이며 이해와 배려에는 우선권을 주지 않는 자본우선주의의 이중성인 것이다.
그런 종교는 청결의 바로미터를 들이대고 정치와 자본은 대책이란 교묘함 뒤에서 방임과 방관으로 일관하며 우리들은 사회적 청산을 요구하는 손가락질을 한다.
그리고 주저하거나 놓아주질 않는다.
노숙자는 목적을 위한 적당한 도구였으며 좋은 자본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본우선주의 사회에서 가난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해야하는 의지박약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없는 천박한 냉소주의인 것이다.


증언

“명우야, 세탁기 돌릴 건데 니 옷도 같이 빨자.”
대답 없이 열리는 문틈 사이로 뭉친 옷가지들이 튕겨져 나온다.
숨쉬기 고약한 풀썩거림으로 심술궂게 뭉쳐진 옷가지들이다.
준은 본능적으로 돌린 얼굴을 찡그리며 냉장고 옆 빗자루와 부삽을 이용해 쓸어 담아든다.
그리고 세탁기가 있는 뒷마당을 향한 조심스런 걸음 질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려움을 참지 못하는 습관처럼 덜 마른 머리를 비벼 털며 사무실에 들어서는 명우다.
“어! 시원하다.”
여위어 길고 뾰족한 콧대가 멍들어 붓고 터진 상처와 어우러져 프랑스 영화배우 알랭드롱(Alain delon)의 멜랑꼬리한 느낌이다.
그런데 명우가 덜 마른 머리를 비벼 털 때마다 차가움을 뒤집어 써야하는 준이다. 악보 정리하던 손을 멈춘 채 소파에 등을 기대며 올려다보는 곁눈질이다.
하지만 호들갑스런 명우와 눈이 마주치자 알듯 말듯 한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다홍색 탁자 위의 음료수 캔을 건넨다.
마당에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주방 밖 냉장고에서 꺼내온 음료수다.
명우는 머리 터는 걸 멈춘 채 음료수 캔을 받아들며 준의 맞은편 소파에 앉는다.
“어! 시원하다. 근데 그 주둥이 길고 다리 짧은, 시커먼 강아지 어디간노?”
“둥이, 말마라..... 집 나간지 오래다.”
“그래! 그래서 암만 불쌍해도, 버린 강아지는 안되는기라. 지금까지 몇 마리고?”
“근데 웬일이냐? 얼굴은 왜 그렇게 개판이고?”
“참! 니, 지훈이라고 알제.”
내뱉는 비음 섞인 명우의 동문서답이 넘실거리다 부딪치는 파도 같다.
“서면에 지훈이, 잘 알지. 왜?”
“지훈이가, 레슬링 한 아덜 둘 데리고, 앵벌이 아덜 찾아다니며, 뒤지게 패고, 꼬지(구걸) 본 돈 뺏고 다니는데, 니 아직 모르나?”
“꼬지 본 돈을, 지훈이가 왜? ”
“야~ 말도 마라. 그 새끼가 아덜 얼마나 괴롭히는데, 내도 그 새끼들 숙소(여관)로 끌려가, 왼쪽 옆구리에 칼을 보여주는데, 와! 살 떨리데, 밤새도록 쳐 맞다, 그 새끼들 조는 틈에, 겨우 도망 나왔다아니가.”
술이란 자기중심적인 표현수단 중 으뜸이다.
준은 명우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
그런 준의 의중을 꾀 뚫어 본 것인지 몸서리를 치며 말끝을 흐리는 명우의 모습이 제법 갈고 닦은 연기파 배우 같다.
“아니 근데 지훈이가 왜 너를?”
“니~ 그것 모르제? ‘서면3대악인’이라고, 차~암 나, 지훈이 그 아하고 호삼이 동만이 이 세 놈이, 크흐응~~ 글쎄 ‘서면3대악인’이란다.”
바람 새는 적절한 탄식으로 말을 이어가던 명우가 자신의 모습이 밀고자인 것 같아 겸연쩍은 코웃음이다.
그래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준이다.
그래서 며칠째 가슴에 담아 놓았던 응어리라도 풀어 볼 작정으로 소파에 기댄 몸을 바로 잡으며 긴장 풀린 목소리를 양껏 돋워보는 명우다.
“니 내말 못 믿겠제? 근데 사실이다. 차~암 나, 형이라 부르질 말던가. 새끼들, 형형...하면서 때려대 쌌는데, 와! 위아래도 없는기라.”


짭짭한 돈벌이?

앵벌이
 

앵벌이는 주로 지하철을 무대로 구걸을 하는 꼬지꾼을 중앙에 두고 앞과 뒤에서 망을 보는 앞방과 뒷방, 보통은 이렇게 세 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벌이를 한다.
꼬지꾼은 대부분이 중증 장애인들이며 망 잡이는 술, 밥, 담배 값에 따라나선 신체 건강한 노숙부랑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두목역할은 수입의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꼬지꾼들이 한다.
무엇보다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문제일 뿐 계급화 되고 조직화 되어 범죄화가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앵벌이의 꼬지꾼으로 이용당하면서 법의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어린아이들이다.
앵벌이는 풍요로운 직업적 선택이기 보단 하루를 연명하기 위한 최후의 생존수단이며 평등이란 탈을 쓴 자본우선주의의 유산인 것이다.
그래서 무섭다.
배고픔의 해결에서 짭짭한 수입에 길들여지면 그 무엇도 우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을 예전에는 앵벌이가 아닌‘꼬지꾼이라 불렸다.
거리생활이란 것이 두목을 뺀 나머지 식구들은 일정한 역할을 해야 했다.
그것은 정해진 액수나 술, 담배, 먹을 것 등을 사는 상납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둑질이건 강도질이건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해야했다.
하지만 범죄행위가 싫은 이들은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에서 꼬지 즉 구걸을 했다.
그런데 1974년 서울에 지하철이 개통 되면서 구걸하는 형태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주로 유동인구가 많은 역 주변에서 하던 구걸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하는 것이다.
이들을 앵벌이라 불렸다.
구걸을 하기위한 약 먹은 혀를 굴리며 “차안에 계신 신사숙녀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꼬지꾼들의 일장 연설을 한참 듣다보면‘앵앵...’우는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생계형
돈?
그것은 자본우선주의의 법과 제도를 누리는 어느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는 규범이다.
법과 제도의 통제에서 버림받고 나앉은 거리 또한 그렇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돈이 떨어지면 먹고 자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풍요가 넘치다 못해 쓰레기가 되는 첨단문명사회에서 생명에 대한 원시적인 위기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물배를 채우며 버티어보지만 보통 3~4일이 지나면 자존심이고 뭐고 노숙부랑인들을 따라 무료급식소며 지원센터를 들락거리게 된다.
이러한 선택권이 없는 일상의 반복은 '인간답게라는' 의지력을 무력화시키며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답습된 야비하고 무기력한 매너리즘에 젖어 거리에 알맞은 계체로 재생산 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젊은이들은 꼬지로 생계를 유지해야하는 장애노숙부랑인들에겐 좋은 파트너감이다.
어떠한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하든 신체적 열악함을 대신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배며 술, 밥 등을 사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한다.
결국 미안해서라도 앞방, 뒷방 하는 역할로 앵벌이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반복되는 학습과 사회적 무관심에 의한 고립감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양질에 교육을 받았던 젊은이들이다.
도덕적 바로미터가 무너지는 과정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 월등함을 내세워 실질적인 주도권을 잡게 되면 삶을 고민하고 도전해야 할 열정이 빈곤과 소외의 구렁텅이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한 범죄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게 동요하거나 뭐라 하는 사람은 없다.
되돌릴 수도 없지만 되돌린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인생들이기 때문이다.
강한 놈은 뒤에서 밟고 약한 놈들은 앞에서 짐승 부리듯 부리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벌이 같은 경우도 CCTV나 지하철이용객들의 신고나 제보로 인해 신변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지역이라도 요일별, 시간별, 조별로 나눠서 하고 일정기간동안 다른 지역 패거리들과 아예 구역을 바꿔가며 한다.
 

범죄형
하지만 배고픔을 충족한 앵벌이는 축적과 착취란 자본우선주의 경제개념을 벤치마킹한 사업이 된다.
대부분은 생계를 위해 시작한 앵벌이가 변질된 경우이다.
그런데 문제는 앵벌이 경험이 있는 젊은이들이 독단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지능적으로 행사하는 감금, 갈취, 매춘, 협박, 폭행 등의 범죄행위다.
이들은 우선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고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일자리를 구한다.
큰 기술 없이도 취직할 수 있고 비교적 정리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자리들이다.
그리고 앞방, 뒷방을 해본 경험으로 구걸을 내보낼 꼬지 꾼을 물색한다.
여성장애노숙인, 남성장애노숙인, 가출청소년이나 가출여성 등의 순서다.
그래도 가출청소년이나 가출여성들은 부담스럽다.
환각제를 먹이고 폭력과 협박에 감시를 해도 도망쳐 신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현력이 뒤떨어진 장애여성노숙인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
노숙할 때 친분이 있으면 '금상첨화' 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먹을 것과 잠자리 정도면 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렇게 숙소로 유인하는데 성공하면 온갖 감언이설을 동원, 혼인신고를 한 다음 짭짭한 수입을 기대하는 교육으로 설득과 감금, 협박, 폭력 등을 행사한다.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온갖 폭력에 동화된 장애여성노숙인은 남편을 부양해야하는 의무감으로 앵벌이를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부부관계로 생긴 아이 또한 앵벌이용이다.
출산 전엔 배부른 채로 출산 후엔 갓난쟁이를 등에 업힌 채로 앵벌이를 시킨다.
그래서 앵벌이경험이 있는 장애여성노숙부랑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몇 번의 이혼 경력에 이름만 기억하는 자식이 보통 2~3명씩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알았다 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 도망은 생각 할 수도 없다.
앞방 뒷방 하는 이들이 잠자는 시간외엔 붙어 다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용케 도망친다 해도 표현력에 한계가 있는 이들이라 소통에 귀기우려 주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장애인에게 자본우선주의의 법과 제도는 사회안전망인 동시에 좌절을 교육시키는 주홍 글씨인 것이다.
그래서 갈취가 동원된 폭력을 받아드리고 역류하는 분노와 텁텁한 빵 쪼가리를 씹어가며 피곤한 몸을 쉰다.
그것이 경험으로 터득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나 삼촌으로 나서는 자들은 십중팔구는 술과 여자, 도박에 미쳐있다.
돈이야 일상화 된 협박에 감금, 감시, 폭행이며 얼마든지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 대부분은 전과기록이 비교적 깨끗하고 사지육신 또한 멀쩡하며 뉴스에도 정통하여 언변이 좋고 사람사귀는 재주도 남다르다.
사회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과 사고를 가진 호감이가는 이웃이며 언어소통 안되고 성질까지 안 좋아 오갈 데 없는 장애인을 보살피는 아름다운 시민인 것이다.
모든 것이 탄로 난다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미미한 법적 처벌과 제도도 문제지만 다른 도시로 가던가, 잠잠해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시작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괴리현상으로 매너리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앵벌이는 분노보다는 손쉽고 짭짤한 돈벌이며 권력인 것이다.
하지만 자본우선주의사회에서는 필요악이며 된다.
그렇게 방임과 방관으로 필요성을 합리화하는 사이 음성적으로 지능화 된 폭력, 갈취 등의 범죄는 상식 밖의 권력과 자본으로 형상화되어 인간의 존엄 적 가치를 무시하고 사회를 혼란케 한다.
그래서 보다 더 엄중한 사법적 처벌과 병행되는 치료와 공론화가 이뤄져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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