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000이다”라는 질문에 대해 해답을 단번에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려고 예전부터 여려가지의 어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말이 독일출신 ‘철혈재상’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의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것.

보수적이며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주재대사, 프랑스 주재대사가 되면서 안목을 넓혔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였을 때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취임 첫 연설에서 이른바 ‘철혈정책(鐵血政策)’ 즉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여 의회와 대립한 채 군비확장을 강행하였다. 당시 비스마르크의 생각에 대해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강하게 밀어부쳐 결국 여러번의전쟁에서 승리하여 독일 통일을 이룩했다. 이후 1871년 독일제국 총리가 되어 1890년까지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1888년 빌헤름1세 이후 황제에 오른 빌헤름2세와의 의견차이로 1890년 비스마르크는 재상에서 물러났다. 비스마르크가 물러 난 후 독일은 제국주의경쟁에 돌입하고 비스마르크가 만든 비스마르크 제체는 붕괴되어 갔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패배하게 된다.

비스마르크가 어떠한 인물 이었지는 알 수 있게 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비스마르크가 어느 날, 친구와 사냥을 나갔는데 그만 친구가 늪에 빠지고 말았다. 늪에 빠진 친구는 움직일 때마다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었고, 비스마르크가 총대를 내밀어도 닿지 않았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 온 것이다. 힘이 빠진 친구는 ‘자포자기’ 하며 더 이상 빠져나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삶을 포기하려 했다. 그 때 비스마르크가 총알을 장전한 총구를 친구에게 들이대더니 방아쇠를 잡아당기려고 했다. 깜짝 놀란 친구는 자신을 조준한 비스마르크의 총대를 피해 허우적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친구는 늪 가장자리까지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말했다. “오해하지 말게. 난 자네에게 총을 겨눈 게 아니었어. 바로 좌절하고 체념하는 자네의 나약함에 총을 겨눈 거라네” 비스마르크가 말한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란 말 역시 위의 일화와 ‘일맥상통’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건 그것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라는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았다면 비스마르크의 친구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바로 어려움에 처했을때도 포기하지 않고 끝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판에서는 이 말이 잘못 받아 들여지고 있다. 대다수의 한국 정치인들은 이 말을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합리화’하는 말로 ‘곡학아세’ (曲學阿世)하고 있다. 여의도에서는 ‘가능성’이란 핑계에 기대 온갖 시나리오들이 떠다닌다. 미래를 내다본 통찰도 있지만, 상대방의 딴지를 걸기 위한 음모도 교묘히 뒤섞여 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란 이름 아래 나오는 각종 설들은 대부분 상대 후보의 발목을 잡기 위한 음모가 대부분이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 이기전에 우선적으로 희망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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