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문화방송 월하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김유신과 김춘추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의하면 “김춘추는 나이 60이 되었는데도 중국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백제와 고구려를 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모양이 측은하기 그지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김춘추는 당나라를 찬양하는 사대주의의 극치인 오행시 ‘태평송’을 지어 바쳤다. ‘태평송’의 내용은 당나라 황제의 위업을 훼손하는 고구려를 ‘오랑캐’라 지칭하며 단 칼에 쳐 물리쳐 달라는 내용이다. 651년 김춘추는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지명도 순 우리말에서 한자로 바꾸는 동시에 유교를 적극 도입하여 국학이란 교육기관을 세웠다.

여기에 감복한 당 고종은 소정방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660년 백제를 향한 대 공격을 단행한다. 김춘추와 친척관계인 김유신은 신바람 났으며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내가 지금 죽기를 서슴치 않고 험난한 판에 달려 온 것은 큰 나라(당)의 힘을 빌려 두 나라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삼국사기 42권 김유신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모든 사람이 김춘추와 김유신 같지는 않았다. 진평왕은 원광법사에게 출사표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나 원강법사는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없애 버리는 것은 승려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왕의 나라에 살면서 어찌 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지식인의 고뇌를 토로한다. 또한 원효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주장하며 신라만이 아니라 세 나라가 같이 살아 평화 공존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 유명한 원효의 ‘불난 집의 비유’도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집에 불이 났는데도 방안에서 어린 아이 셋이 철모르게 놀고 있다면 수레를 사준다고 소리쳐 다 밖으로 나와 위기를 피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원효의 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만을 방에 남겨 두고 뛰쳐나왔고 그래서 나머지 두 친구는 불에 타 죽게 하고 말았다는 비유이다.

660년 소정방의 10만 대군은 백마강을 타고 올라와 무방비 상태에 있던 백제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고구려도 668년 9월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당은 백제에 웅진 도독부, 고구려에 안동 도독부 그리고 심지어는 신라에까지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려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사대주의의 결과가 빚어낸 뼈저린 교훈을 그제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막상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선봉장이 된 사람들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었다. 신라 사대주의는 두 이웃 친구를 불사른 데 그치지 않았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는 신라에게 목구멍의 가시와 같았다. 계모에게 전처의 자식은 자기의 정통성을 비웃는 존재일 것이다. 해동성국 발해는 신라로부터 721년 그리고 733년 공격을 당하였으나 의젓하게 물리쳤다. 결국 발해도 망했지만 신라 역시 사대주의에 찌들어 자국의 안위와 중국의 안위를 분별 못하고 자주적 인식을 하지 못해 멸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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