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의 잔재 ‘귀무덤’을 찾아서


최근 64주년 광복절을 맞아 일본에서 뜻 깊은 행사가 진행됐다. 우리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가 재일민단 오사카 지방본부와 함께 “일본 경도 이총 위령제 및 대판동포 강연회”를 개최한 것. 하지만 일본 오사카에 모인 1000여명의 재일동포들은 비통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오사카와 멀지 않은 곳인 교토에 임진왜란의 잔재로 알려진 ‘귀무덤(耳塚·이총)’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 귀무덤이란 글자 그대로 귀(耳)의 무덤을 뜻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정유재란인 1598년까지 일본군이 우리민족의 귀나 코를 잘라 죽은 사람의 숫자를 세서 묻어두었던 데서 유래된다. 이에 본지가 광복절을 보내며 일본과의 남은 잔재인 ‘귀무덤’의 실체를 파헤쳐보고자 한다.

▲ 일본 교토의 교토국립박물관의 귀무덤 앞에서 지난 13일 ‘위령제’가 진행됐다.


귀무덤은 일본 교토에 있는 교토국립박물관 주변에 안치돼있다. 한국 도자기 등이 전시돼있는 곳에서 동으로 100여미터 걸어가면 정면 동네 놀이터 옆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귀무덤(耳塚·이총) 또는 코무덤(鼻塚·비총)으로 불리는 언덕엔 일본어로 적혀있는 안내문이 있다.

64주년 광복절 맞아 ‘일본 경도 이총 위령제 및 대판동포 강연회’진행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잔재 귀무덤, 우리민족의 귀나 코를 잘라 묻어

그 아래에 직역한 한글 번역문을 요약하면 “이 무덤은 16세기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에 침공한 당시(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1598)와 관련된 유적”이라며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 조선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갖고 돌아왔다”는 유래를 전했다. 대체 왜 일본은 우리민족의 귀나 코를 베기 시작한 걸까.

▲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의 한양원 이사장이 '귀무덤 위령제' 관련 개회사를 하고 있다.

유래 없는 ‘코’베기 만행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이전까지 불안했던 일본의 히데요시 권력은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700여척의 병선과 15만명의 왜군들이 한반도를 침략한 것. 전쟁이 일어난 지 20일 만에 한양이 점령되고 2개월이 지나면서 전라도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선민중은 가만있지 않았다.

2만5000명의 민초들과 23전23승한 이순신의 활약으로 왜군은 초기 병력 3분의1만이 살아남을 정도의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히데요시는 곧 7개 조항을 발표하며 한반도의 침략을 발표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히데요시는 매년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공지하며 “사람의 귀는 둘이고 코는 하나다. 조선 사람들을 죽인 후 코를 베어 함께 소금에 절여 보내라. 병사 일인당 코 한 되씩 수량이 찬 후에야 생포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말로 인류역사상 유래가 없는 코베기 만행을 저질렀다”고 전했다.

‘코’에서 ‘귀’로 이름 바꿔

물론 코베기가 처음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여설하의 ‘코무덤 귀무덤’이란 자료에 따르면 “임진왜란 초기에는 목을 베어 갔고 그 다음에는 귀를, 그리고 마지막에는 코를 베어갔다”며 “이러한 내용은 일본 특유의 악행 남기기를 좋아하는 산본안정의 일기에 나와 있다”고 요약했다.

실제로 산본안정에 따르면 “임진년에 주로 조선인의 귀를 자르다가 코를 자르기 시작한 것은 정유재란 때”라고 언급돼있다.

유래 없는 일본군의 만행, 목을 베다가 귀를 베고 마지막엔 코를 베어
일본 문화재 된 귀무덤, 반환제의 했으나 거절, 범국민적 숙제로 남아

베어진 코들은 전과보고서를 첨부하여 히데요시의 코 수집관에게 전해졌다.

이때 일본군 부대장들은 코가 상하지 않도록 소금이나 석회, 또는 식초에 절여 나무통이나 항아리에 1000개씩 넣어져 보내졌다.

그렇게 하여 코 영수증이 발부된 것.

운동본부 관계자는 “이러한 일본인의 만행은 지금까지도 야마구찌현 문서보관소를 비롯해 야마가시의 아끼즈까 향토관,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등에 보관돼있다”며 “베어진 코가 일본에 도착하면 히데요시는 ‘코 몇 개를 받았다’거나 전과를 치하하는 ‘치하장’을 보낸 다음 무사들의 호전성을 과시하기 위해 오카야마현 천인비총에 따로 보관한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그들이 전과로 내세운 기록에는 “1598년 1월 조선사람의 코 18만5738개, 명나라 사람의 코 2만9014개, 합계21만4752개의 코가 매장돼있다”고 나와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더욱이 히데요시는 조선정복을 꿈꾸며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기도하기 위해 호코지(방광사)라는 절을 지었다.

그는 죽기 1년 전에 조선침략전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절 앞에 조선에서 베어온 코를 모아 ‘코무덤(귀무덤)’을 만들었다.

실제로 1957년 9월26일 히데요시의 부하 쇼오다이가 지은 비석에는 잔혹성을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 중의 한 부분을 발췌하면 “장병들이 적의 목을 베어 보내야 하난 바닷길이 너무 멀어 조선군의 코를 베어 오게 했다”며 “히데요시는 이를 원수라 생각하지 않고 가엽다는 생각에 친한 사람 대하듯 공양했다”고 나와 있다.

이에 대해 국민운동본부 관계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가증스러운 일본인의 단면이 드러나고 있다”며 “일본의 잔혹성을 과시하고자 만든 것을 호도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히데요시가 죽고난 뒤 새로운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의 학자 하야시 라산은 ‘코무덤’이라는 잔인한 명칭에 고민하다가 ‘귀무덤’으로 이름을 바꿔 ‘고베기 전쟁’의 잔혹함을 조작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위령제 헌화한 일본관계자

이처럼 귀무덤은 왜장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왜군들이 조선인 12만6000여명의 귀와 코를 전리품으로 베어온 민족사의 슬픈 현장이다.

그러한 귀무덤 앞에서 지난 13일 ‘위령제’가 진행됐다.

이날 위령제에는 한국에서 간 국민운동본부 임원과 집행부 35명, 오사까 민단 동포 50여명, 교토 민단 동포 40여명 등 120여명과 인근 주민 150여명이 현장을 가득매운 데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그동안 귀무덤의 위령제는 초라한 수준이었다.

교토에 사는 재일동포 몇몇이 모여 조촐하게 제를 올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오사카와 교토에서 재일동포 150여명이 참석한데다 한국에선 추모 공연단도 건너갔던 것.

염경애 명창은 귀무덤 앞에서 판소리로 추모시를 읊었다.

약 7m 높이의 커다란 귀무덤 앞에서 흰 저고리와 흰 치마, 흰 수건이 서로 섞이고 펄럭이고 돌아가는 살풀이도 올랐다.

남원국립민속국악원 무용수들은 ‘승천무’를 추며 혼을 부르고 위로했다.

이날 위령제를 개최한 국민운동본부 한양원 이사장은 “멀리는 임진왜란, 가까이는 일제침략기에 이르기까지 한·일 관계는 전쟁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건 무력과 전쟁에 의지해 천하를 얻으려는 서세동점(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옴) 시대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세서점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며 “역사 속에서 맺혀버린 영령들의 한을 풀고 새로운 미래를 맞고자 위령제를 연다”고 취지를 밝혔다.

▲ 이날 위령제에 참석한 재일동포들이 헌화를 했다.


이날 위령제의 헌화는 국민운동본부 임원, 김동규 종무국장, 오사까와 교토 민단 임원, 박강수 시사신문 사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교토시청 카지까와 토시오 문화재보호과장의 헌화가 눈길을 끌었다.

▲ 헌화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민족의 넋을 기리는 '위령무' 이어졌다.


이는 일본정부를 대표한 헌화로, 시사신문 박강수 사장은 이에 대해 “일본 정부 관계자가 이총 위령제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일본 측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증거”라며 “이런 좋은 취지의 위령제를 계속해서 확대해 나가 일본의 만행을 일본인에게 인지시키고 잘못을 뉘우치는 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각에서는 귀무덤 위령제를 더 큰 행사로 지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과 풀어야 될 잔재

사실 이총비총의 제사는 지난 1997년 9월9일 교토민단 낙동지부에서 천도공양을 올리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면서 국민운동본부가 지난 2007년 8월15일 이후 두 번째 참배제사를 올린 것.

특히 위령제를 지낼 때마다 귀무덤 위에 있는 석탑 모양의 석물이 얹혀져 있는 것이 눈에 띠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조선인 원혼들의 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운동본부는 이러한 귀무덤을 고국으로 옮기는 방안을 고대했다. 더욱이 귀무덤은 일본 문화재로 지정돼있어 일본과의 풀어야 될 숙제로 남아있는 것.

이에 한 이사장은 “임진왜란 때 울독목 전투에서 숨진 왜군이 해안가로 떠내려 왔다. 그때 조선 백성이 왜군의 시신을 거둬 진도에 묻었다. 지금도 진도에 100여개의 무덤이 있다. 당시 이 지역으로 출정했던 왜군의 후손들이 요즘도 와서 제사를 지낸다”며 진도의 왜군 무덤과 교토의 귀무덤을 서로 반환하자고 제의했다.

실제로 귀무덤은 일본의 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직접 관련된 교토의 문화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5월 국민운동본부는 도쿄의 문화청을 방문해 귀무덤 한국이전을 타진해 본 것.

하지만 일본 문화청은 “연구해볼 만한 제안이다. 그러나 귀무덤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며 “국회에서 문화재 관련법규를 바꾸지 않는 한 귀무덤의 이전은 어렵다”고 말했다.

때문에 일각에선 “한국정부가 직접 나서서 일본정부에게 이러한 내용을 개진해봐야 한다”며 “우리국민 역시 이러한 귀무덤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 범국민적인 숙제로 확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귀무덤 위령제'를 마치고 이날 위령제에 참석했던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 한양원 이사장[미니인터뷰]
교토관광의 필수코스 돼야 할 ‘귀무덤’


▲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 한양원 이사장.

본지는 지난 21일 서신을 통해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의 한양원 이사장에게서 ‘겨레얼을 살려야 하는 목적과 이유’ 그리고 ‘귀무덤 의령제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의 근본적 취지는 무엇인가.

우리가 지난 2003년 4월부터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밖으로 민족적 위기상황에 대처해 우리의 주체성과 생존권을 지키자는 의미다. 물론 안으로는 정신적 가치관의 혼돈으로부터 겨레얼을 되살려 다가오는 태평양시대에 평화의 주역국으로서 태세를 갖추자는 거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

서울을 비롯해 전국 대도시를 순회하며 한국인으로서의 바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대국민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국내성과를 바탕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중국 연변 등지에서 순회강연회를 열어 해외동포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이번 ‘일본 경도 이총 위령제 및 대판동포 강연회’도 그러한 활동의 일환인가.

그렇다. 과거 임진왜란으로부터 가까이는 일제침략기에 이르기까지 한일관계는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일본과는 풀어야할 과제가 많다. 특히 재일동포의 경우 해외동포가운데서 가장 많은 고통을 인내하면서 살아온 동포들이다. 이들은 실제로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동포의 권익신장과 한일우호증진, 조국의 평화통일운동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진행되는 행사는 더욱 뜻 깊다.

‘귀무덤 위령제’는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됐나.

1997년 귀무덤이 만들어진지 400년이 되는 해에 당시 재일한국경도민단동산지부(현재 낙동지부) 김동출 지단장이 지부 주체로 음력 9월9일, 무연고조상의 공양일에 맞춰 대대적인 공양제를 지냈다. 그 이후 낙동지부가 공양하고 있다. 히데요시가 자행한 조선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 현세에 전하자는 의미였다. 이로 인해 한국에선 공인들이 개별적으로 많이 참배하러오거나 여행자의 교토관광 코스에 넣어 참배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귀무덤 위령제’의 의미는 무엇인가.

재작년에 이어 올해도 교토에 있는 조선인 이총을 참배하고 봉행했다. 400년이 넘도록 고국산천에 돌아가지 못하고 계신 이총의 영령들을 생각할 때 아픈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일본에 계신 원혼들이 조국의 품 안에서 길이길이 편하게 잠들 수 있을 때 비로소 조국이 있고 후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올 수 있도록 국내외 동포들이 일치된 마음으로 노력하자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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