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드러내는 ‘박연차 리스트’

소문만 무성했던 ‘박연차 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정·관계가 떨고 있다. ‘참여정부의 후원자’이자 ‘여야를 막론한 마당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리스트’에 노무현 정권 실세들은 물론 현 여권 인사와 검찰 등 권력기관에 대한 로비 내역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로비 대상과 금품이 전해진 정황이 밝혀지면서 관련자들이 속속 소환되고 있는데다 서울 서초동 법조계와 여의도 정가 일대에서 수십명의 정치인과 금융권, 검찰 출신 인사의 이름이 포함된 ‘박연차 리스트’가 나돌고 있어 이번 사건이 정국을 뒤흔들 뇌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은 커져만 가고 있다.

박연차 회장 “검찰·여야 의원 등 70여 명에 금품 전달”
노무현 정권 실세 비리 넘어 여권·법조계에도 사정칼날

지난해 1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비리 수사에서 시작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베일 벗는 ‘박연차 리스트’

지난해 박연차 회장이 정·관계 인사들을 ‘관리’해 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건 자료를 입수한 검찰은 금품 수수관계를 확인한지 4개월여 만에 ‘박연차 리스트’의 실체에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연차 회장이 정·관계 인사 70여 명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진술을 한 것. 박 회장은 당초 여야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 등 40여 명에게 금품을 건넸다고 진술했으나 자녀들이 출국 금지를 당하는 등 검찰의 압박이 강도를 높여가자 검찰 간부 등 관계 인사 30명 가량을 추가로 거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은 검찰 고위간부 등 검사 5~6명에게 거액을 건넸으며 노무현 정부 실세였던 민주당 이광재 의원 등 정치인들에게도 금품을 전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박 회장은 지난 2000년부터 한나라당의 재정위원을 지냈으며 출신지역인 경남 밀양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부산·경남 출신 정치인들과 오랜기간 친분관계를 유지해오면서 참여정부 실세 뿐 아니라 현 여당인 한나라당 소속 전·현직 의원들과도 관계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박 회장이 전·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은 물론 정부 각 부처와 금융권 인사들에게도 금품을 줬다는 진술과 정황을 확보, 집중 확인 중이다.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일부 언론에 ‘70여 명에게 돈을 줬다’는 식으로 보도됐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현재 정치권 로비 리스트 수사 관련해서 씨를 뿌리고 있는 단계”라고 말해 여야를 막론한 ‘사정 폭풍’을 예고했다.

먼 곳부터 차근차근

박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은 정대근 전 농협회장의 구속 기소를 시작으로 ‘박연차 리스트’의 공포를 알리고 있다.
검찰은 정대근 전 농협회장의 홍콩 차명계좌에서 발견된 250만 달러(37억원)가 박연차 회장이 준 돈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지난 2007년 6월7일 박 회장이 홍콩 현지법인인 APC 등을 통해 조성한 해외자금 중 250만 달러가 정 전 회장의 친척 명의 홍콩계좌로 유입됐으며, 이 돈 중 150만 달러가 작년 6월 홍콩 침사추이의 아파트를 구입하는데 사용됐다는 것.
홍만표 수사기획관은 “박 회장과 정 전 회장 모두 250만 달러를 주고받은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고 말했다.
정 전 회장은 검찰 조사 결과 박 회장에게 250만 달러를 받은 혐의 외에도 해외 납품업체에서 뇌물 2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정 전 회장의 뇌물수수액은 2005년 12월∼2006년 2월 세종캐피탈 홍기옥 사장으로부터 세종캐피탈 인수와 관련 사례금 명목으로 50억원, 2006년 5월 현대차로부터 서울 양재동 농협 빌딩 매각 리베이트로 3억원, 농협 자회사인 휴켐스 매각 과정에서 박 회장으로부터 20억을 받았다 돌려줬던 것 등을 합하면 110억대에 달한다.

정치권을 향한 사정의 칼날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정욱 전 해양수산개발원장이 구속됐으며 송은복 전 김해시장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이 전 원장은 2005년 경남 김해시 4·30 재보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기 전 박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3억원 가량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박 회장으로부터 확보한 진술을 토대로 계좌추적을 벌여 물증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송 전 시장이 선거 출마를 전후로 박 회장으로부터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 전 시장은 지난 1995년부터 2006년까지 경남 김해시장을 지냈으며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남 김해을 후보로 출마했다.
정치권은 이 전 원장의 구속과 송 전 시장의 구속영장 청구에 대해 “시작일 뿐”이라며 검찰 조사를 주시하고 있다. 이 전 원장과 송 전 시장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는 했지만 정치권과 큰 관련이 없는 인물로 정가를 향해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기 전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4월은 잔인한 달”

‘박연차 리스트’ 조사가 활기를 띄면서 박 회장이 돈을 줬다고 진술한 여야 정치인들에 대한 소환조사도 빨라지고 있다. 검찰은 현역 의원들에 대한 수사를 4월 임시국회 전까지 속도감있게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거론되고 있는 인물은 민주당 이광재, 서갑원 의원과 한나라당 허태열, 권경석 의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정대근 전 농협회장, 이정욱, 송은복 등 ‘시작일 뿐’
현역 여야 정치인 소환조사 예정 “4월은 잔인한 달”


이광재 의원은 “합법적 후원금 외에 불법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서갑원 의원도 “2006년 태광실업으로부터 영수증 처리한 합법적 후원금 500만원을 받았을 뿐 다른 정치자금을 제공받은 적이 없다”면서 “이는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검찰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 것처럼 진술을 흘렸다”고 반발했다.
허태열 최고위원은 “박 회장을 알고는 있지만 10년 이상 본 적이 없고 후원금도 받은 일이 없다”고 말했다.
권경석 의원은 “2002년 경남부지사를 그만두면서 김혁규 전 경남지사가 환송회를 열어줬는데 그 자리에서 박 회장을 만났다”며 “김 전 지사에게 전별금 명목의 봉투를 받은 적은 있지만 박 회장으로부터는 한푼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박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을 수사 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이인규 부장은 “4월은 잔인한 달. 차라리 겨울이 따뜻했다”는 말로 향후 정치권 인사들에 대한 강도높은 조사가 이뤄질 것임을 시사했다.
한편 검찰의 ‘박연차 리스트’ 조사는 스스로를 향한 칼날이기도 하다. 그동안 박 회장의 수사와 관련 법조계의 비호를 의심하는 소문들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단행된 검찰 간부인사에서 박 회장과 친분이 있거나 접촉한 정황이 있는 검사장급 간부 2~3명은 주요 보직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홍만표 수사기획관은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받은 인사 중에 전·현직 검사장이 포함돼 있다는 말이 있는데 전혀 언급된 바 없다”며 “누가 포함돼 있든 성역없는 수사를 벌이겠다”고 말했다.
이인규 부장도 전·현직 검사들이 박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과 관련 “내부 인사가 얽혀 있어 수사가 멈칫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지만 아는 사람이 더 무섭고 독하게 수사한다”면서 “수사과정에서 무엇이 나올지는 나도 모른다. 어떻게 흔들어도 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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