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성폭행범 ‘신길동 발바리’ 비공개 수사논란



영등포 특정지역, 신길동… 만 5개월 사이 7건의 성폭행 사건
3건은 동일범? 나머지 4건 개별소행? 흔들리는 피해자의 증언


작년 9월에서 12월, 서울 영등포 특정지역인 신길동에서 동일범으로 추정되는 7건의 연쇄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이렇다 할 단서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만 5개월을 보냈다. 하지만 이 일이 화두에 오른 것은 불과 며칠 전인 지난 3일 이라는 것. 일각에서는 사건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경찰이 이제와 공개수사를 할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고 있다.
연쇄 성폭행범에 대한 주민들의 불안이 극에 치닫고 있는 가운데 경찰은 왜 지금까지 사건을 비공개로 한 것인지 경찰의 수사과정을 들여다봤다.


▲ 본 사진은 사건과 관련없음



지난해 9월 말,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남성이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연립주택에 침입해 A(여)씨를 성폭행하고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남성은 주방에 있던 흉기를 사용해 A씨를 협박했으며, 이불 등으로 눈을 가리고 성폭행을 했다.
이처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는 혼자 사는 20·30대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폭행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영등포 경찰관계자에 따르면 열흘 간격으로 이 지역 연립주택 1층과 반지하에 혼자 사는 또 다른 여성 2명이 비슷한 수법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작년 7월부터 12월까지 5개월간 8건의 연쇄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경찰은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했더라도 신고하지 않은 사건까지 고려한다면 이보다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왜 신길동 발바리인가


경찰은 피해자의 비슷한 진술들을 토대로, 한 명의 범인이 다수의 성폭행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이 가운데 작년 8월, 대림동 범행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신길동에서 발생했으며, 주민들 사이에 이른바 ‘신길동 발바리’라 불리며 그의 출현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범행 현장에서 수거한 범인의 체액(범인이 남기고간 물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맡겨 감정한 결과, 지난해 9월말과 10월 신길동에서 발생한 3건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지난해 7~8월에 일어난 다른 성폭행 4건은 유전자 감식결과 모두 개별 범행으로 추정됐으며, 12월 사건은 체액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DNA(유전자) 감식으로도 범인의 신원이 나오지 않는데다 피해자 진술 외에 용의자를 특정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뚜렷한 단서가 없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가 진술한 인상착의와 사투리를 쓰는 점 등을 토대로 이 지역 동종 전과자를 종합해 용의자를 압축하고 있다”며 “가용 인력을 동원해 최대한 빨리 범인을 잡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범인 대부분은 자신들의 인상착의를 확인하지 못하도록 피해자의 눈을 가린 채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져 수사에 혼란을 주고 있다.
특히, 신길동 일대는 소형 연립주택이나 원룸 등 독신자용 거주지가 많아 그동안 혼자 사는 여성들을 노린 범죄에 취약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DAN 수사 원점으로


대검찰청 이승황 보건연구관은 18일 발간된 ‘형사법 신동향’ 2월호에서 수사 효율성은 물론 범죄예방 효과를 위해 범죄자의 DNA 정보를 수집,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관이 작성한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DB)의 이론과 국제 현황’에 따르면 ‘유영철 사건' 등 현대 강력범죄의 가장 큰 특징은 뚜렷한 동기 없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범행이 이뤄진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범죄자 유전자은행 구축의 목적은 용의자가 없는 사건에서 용의자를 검색해 지목하는 일로, 범죄 현장에서 지문을 찾기는 어렵지만 강력범죄의 특성상 DNA는 남기 마련”이라며“범인 검거 및 수사의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신길동 발바리 남긴 체액으로 DNA 검사 BUT 수사는 장기화
경찰…공개 수사 VS 비공개 수사, 고민하는 사이 피해자 속출



신길동 발바리의 경우도 용의자를 추려내기 위해 말투, 연령대, 성폭력 전과 여부를 근거로 범행 발생 인근주민 3100여 명 중 일부에 대한 DNA 감식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실제로 범인의 DNA를 확보한 것일 뿐 경찰이 모든 성범죄자의 DNA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경찰의 DNA조사는 유사범죄자들로써 DNA정보가 수사기관에 존재하는 내에서 진행됐다.
이는 우리나라 모든 성인의 DNA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성범죄자의 경우 DNA정보를 사용하여 용의선상에 오른 자들을 대상으로 범죄자를 찾아낼 수가 있어 수사에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성범죄자들의 대부분이 습관성 범죄를 일으키기 때문).
하지만 초범일 경우 DNA 데이터가 없어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때문에 작년 12월에 일어난 신길동 사건처럼 아무런 근거도 없고 용의자로 추정되는 자들마저 없다면 가지고 있는 DNA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장기화 된 수사


지난달 2월, 혼자 사는 여성만 골라 연쇄 성폭행을 저질러 온 일명 ‘발바리’가 잇따라 검거됐다.
피의자 최모(28)씨는 주로 관악구 일대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신림동 고시원에 살아 동네 지리에 익숙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오던 최씨는 훔친 승용차 열쇠를 범행 장소에서 흘렸다가 덜미를 잡힌 것으로 경찰은 발표했다.
첫 범행 이후 6년 만에, 이미 12명이 피해를 낸 뒤에 붙잡힌 것이다.
또한, 피의자 김모(27)씨는 서울 중랑구와 광진구 일대에서 연쇄 성폭행을 일삼았지만, 5년 만에 경찰에 검거됐다.
두 사건의 관련 경찰들은 “별다른 물증을 확보하지 못해 전과자 수 만 명을 대상으로 수사망을 좁히다보니 검거가 지연됐다”며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특히, 미국은 성폭행범이 8차례 범행 뒤에야 비로소 체포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는데다 우리나라도 100여명을 성폭행한 ‘대전 발바리’가 10년 만에 검거된 사례처럼 성폭행 사건은 수사의 장기화가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신길동 발바리의 경우도 만 4개월이 넘는 지금까지 특정 용의자조차 선별하지 못한 상황이라 위 사건의 전처를 밟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은 추가 범죄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안고 언젠가 경찰이 사건을 해결에 주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뒤늦은 공개, 주민 전혀 몰라



이러한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경찰은 한결같이 ‘비공개’ 수사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추가 범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공개수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2008년 8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마포구 등 서울 강북일대에서 연쇄 성폭행사건을 일으킨, 일명 ‘보일러 발바리’(보일러공을 가장해 혼자 사는 여성들을 잇달아 성폭행)도 아직 검거하지 못한데다, 신길동 발바리의 경우 연쇄성폭행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그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길동 사건이 공개되기 전인 지난 3일, 이 일대 주민들은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B(54·여)씨는 “얼마 전에 경찰이 와서 가게에 CCTV가 몇 대냐고 물어 본적이 있는데 성폭행과 관련해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좀 더 조심해야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경찰이 연쇄성폭행 사건에 있어서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국적으로 몇 명의 성폭행범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지 가늠하기 힘들 것이다.
때문에 더욱 큰 문제는 경찰이 비공개 원칙을 고수하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들이 성폭행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와 ‘공개수사’ 논란


경찰은 지난 1996년 검거된 원조 발바리를 비롯해 대부분의 연쇄성폭행범 수사에서 공개 수사를 꺼리다가 피해가 급증하거나 언론에 사건이 공개될 경우 뒤늦게 공개 수사로 전환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경찰청 관계자는 “공개수사와 관련한 별도의 메뉴얼은 없다”면서도, 한편으론 “연쇄성폭행의 경우 공개수사를 하면 시민들의 불안감이 증폭되는 부작용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일선 경찰서 관계자는 “공개수사로 전환할 경우 범인잠적 등으로 검거가 어려워질 수도 있고 자칫 수사가 장기화될 경우 여론의 뭇매를 맞을 가능성이 있어 솔직히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반드시 대외적으로 사건을 공개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반대로 무조건 사건을 비공개로 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경찰행정학과의 한 교수는 “대대적인 언론보도 말고도 공개수사에 여러 가지 단계가 있는 만큼 적절히 공개를 해 지역주민들이 범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 교수는 그 방법으로 지역 공동체를 이용한 홍보와 예방책을 들었다.
지역 동반장 회의나 행사 등을 비롯해 인터넷 지역 커뮤니티 등을 활용해 범죄사실을 일부 공지하고 주민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것이다.
또한, “경찰서에서 모든 일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지구대나 치안센터 등을 활용해 범죄 예방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적극 홍보하되, 관련사실을 알려 주의를 당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선의 예방책은 범인을 조기에 검거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시민들이 2,3차 피해에 대비할 수 있도록 일정부분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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