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이-친박 불안한 동맹

한나라당 친이계와 친박계가 심상찮다.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했던 게 어제인 것 같은데 오늘은 슬그머니 손을 잡는 듯한 모습이다. “MB와 소통하고 싶다”는 친박계 좌장 김무성 의원과 “한나라당이 탄생시킨 이명박 정부가 성공해야 국가와 국민이 잘 되는 것이고, 한나라당이 성공해야 정권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상득 의원의 발언은 좀 더 밀착된 친이계와 친박계를 떠올리게 한다. “귀국 일정에는 정치적인 고려는 없다”고 못 박았지만 여전히 계파 갈등의 촉매제로 작용했던 이재오 전 의원의 귀국이 연기됐으며 박근혜 전 대표는 법안처리 과정에서 “야당이 양보해야 한다”고 당 지도부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오랜만에 하나가 된 한나라당의 모습이 ‘순간일 것’이라는 전망도 흘러나온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첩첩산중’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미디어법 “입장 밝혔다”에서 “야당 양보해야”로 선회
계파 갈등의 중심 이재오 귀국 늦춘 형님 “갈등 소지는 없다”

한나라당이 2월 입법 전쟁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다. 특히 이번 입법 전쟁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의 ‘한마디’가 정국의 핵을 찔렀다.

입법전쟁에 ‘떳다! 박근혜’

박 전 대표는 지난 2월2일 청와대 오찬에서 주요 법안처리에 대해 “쟁점법안일수록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국민 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MB정부와 여당의 ‘속도전’에 제동을 걸었다. 2월 국회의 입법 전쟁에서도 “내 입장은 이미 밝혔다”, “변함없다”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쟁점법안 강행 처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여야의 2차 법안 전쟁이 극에 치달은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들의 연좌 농성에 합류한 그의 모습 어디에도 민주당이 기대했던 ‘봄처녀’는 없었다.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이 그동안 미흡했던 부분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양보도 하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노력도 많이 했다”는 평가로 말문을 열었다. 이어 “여당이 많은 양보를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협상에 나서고 있는데 이것마저 거부하면 딴 생각이 있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며 “이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민주당에 직격탄을 날렸다.
여야를 격전으로 밀어 넣었던 미디어 관련 법안 처리 시기와 관련해서는 “시기를 못박는 정도는 야당이 합의해줄 수 있지 않느냐”면서 “시기를 못박지 않고 무한정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당 지도부에 힘을 실어줬다.
‘여당 내 야당’으로 불렀던 박 전 대표였던 만큼 이 발언은 정치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때마침 박 전 대표이 요청한 대로 처리시기를 못박는 방향의 민주당 양보안이 나오며 2차 쟁점법안 국회파행은 극적으로 타결됐다.
박 전 대표가 방향을 선회했다는 지적에 대해 박 전 대표의 비서실장을 지낸 유정복 의원은 “공감대를 형성하라는 것이 박 전 대표의 주문이었고, 그간 여야 논의과정과 국회의장이 고심한 부분을 인정한 것”이라며 “법안 내용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고, 이제까지 상황을 박 전 대표가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현 의원은 “박 전 대표가 특별히 이런 결과를 만들려고 했다기보다는 평소 정치철학을 강조하다 보니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라고 박 전 대표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친박계 좌장격인 김무성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야당에 분명한 선을 그어 줬다는 점에서 협상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 같다”며 “우연적인 부분도 있지만 박 전 대표가 상대적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국민 여론을 지켜보고 있어 더 큰 신뢰를 받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화합위해 발 벗고 나선 형님

한나라당 내에서도 모처럼 침묵을 깨고 당에 힘을 실어준 박 전 대표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나경원 의원은 “박 전 대표의 발언이 흐름을 잘 이끌어 줬다”고 평가했으며 박희태 대표도 박 전 대표의 발언에 대해 “정말 옳은 말씀이고 참 고맙다”면서 “(박 전 대표가) 도와주니 얼마나 반갑고 좋은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원희룡 의원은 “박 전 대표의 상식적인 말씀이 결국 만점짜리 정답”이라며 “아무런 희망과 중재자 없을 때 상식적이고 올바른 안을 제시,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고 말했다.
원 의원은 “당내에서는 그동안 친이, 친박이니 속도전이니, 이런 얘기들이 많았는데 결과적으로 상식적인 얘기를 하는 박 전 대표만 실컷 도와줬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나오고 있다”면서 “당 핵심부의 정치력 복원이 시급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오랜만의 ‘단합’에 한나라당은 상기된 표정이다. 또한 당에 힘을 실어준 박 전 대표의 발언이 최근 친박계와 접촉을 늘리고 있는 이상득 의원의 행보와 겹치면서 ‘친이-친박’의 화해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관측으로 이어지고 있다.


4월 19군데 당협위원장 교체, 재보선 공천 등 전쟁 준비
친이·친박 소극적 동맹의 시작, 치열한 격전 앞둔 고요 속 침묵


집권 2년차 들어 친이, 친박, 중립 등 계파를 넘나드는 광폭행보를 선보이고 있는 이 의원은 지난달 20일, 21일 부산을 방문, 지역 인사들은 물론 친박 핵심 의원들과 회동을 가졌다. 친박 김무성 허태열, 친이 안경률 이군현 의원 등과 함께 할 예정이었던 주말 골프회동이 취소된 대신 마련된 자리였다.
2월21일 조찬 회동에는 친박계 김무성 허태열 서병수 의원을 비롯해 유기준 박대해 유재중 허원제 현기환 이진복 김세연 의원과 친이계 안경률 사무총장과 김정훈 이종혁 의원 등 부산지역 의원 13명과 이군현 의원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무성 의원은 “당의 원로로서 당 화합을 위한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발 벗고 나서겠으니 맡겨 달라”면서 “한나라당은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가족이 있다. 그런 다양한 견해들을 한데 모으고 화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겠다”고 화답했다.
이어 이 의원은 “당 밖에서는 ‘친이’다 ‘친박’이다 하면서 걱정들을 많이 하고 있지만 당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뿐 갈등소지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한나라당이 탄생시킨 이명박 정부가 성공해야 국가와 국민이 잘 되는 것이고, 한나라당이 성공해야 정권도 유지할 수 있다. 당내에서 화합하고 대야관계도 원만하게 만들어나가자”고 말했다.

이재오 귀국 뒤로, 뒤로

형님의 ‘화해모드’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과 함께 이재오 전 의원의 귀국이 미뤄진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간 자신의 귀국과 관련, “귀국 일정에는 정치적인 고려는 없다”며 3월 초 귀국을 못 박았던 이 전 의원은 3월 초 귀국 계획을 접었다. “미국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지만 국내정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분석이 팽배하다.
그가 중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지난달 23일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4월로 귀국이 늦춰졌다’는 국내 보도에 강력 반발하며 귀국 일정을 단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 의원은 3일 자신의 팬클럽 ‘재오사랑’ 홈페이지에 올린 두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 대륙을 횡단했으니 미국 대륙도 자동차로 횡단하고 싶다”며 “워싱턴에서 LA까지 횡단하고 돌아갈까 한다”고 밝혔다.
또한 귀국 시점에 대해서는 “이제 (미국에 온 지) 280일이 됐으니 300일은 지나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때문에 정치권은 이 전 의원의 귀국이 적어도 3월 말, 늦으면 4월 재보선 이후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의 귀국이 늦춰지며 계파갈등도 한풀 꺾였다. 그의 조기 귀국 소식을 “친박계에 대한 전쟁 선포”라고 주장하며 “친박계는 완전히 무장해제하고 있는데, (이 전 최고위원이) 들어온다면 이쪽을 또 치려고 할 테니까 ‘또 전쟁이 시작되는구나’, 신발끈을 동여매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던 김무성 의원은 그의 귀국이 연기되자 소통하고 싶은 인물로 MB를 꼽으며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러한 ‘평화기’가 길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4월로 임기가 만료되는 당협위원장 문제와 재보선 공천 문제 등 함께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친이재오계 공성진 최고위원은 2월 법안전쟁에서 박 전 대표가 ‘일등공신’이라는 평에 대해 “조금 지나친 평가”라며 “박 전 대표가 국민과 당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어 정치적 힘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큰 역할을 했다고 보지 않는다”고 날을 거두지 않았다.
공 최고위원은 “이번 여야 합의에서 일등공신은 박희태 대표와 홍준표 원내대표”라며 “박 대표와 홍 원내대표를 위시한 최고위원단, 원내대표단이 부단히 국회의장과 야당을 상대로 회합을 갖고 애쓴 덕택”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기후변화대응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한 정두언 의원이 이 전 의원과의 회동 가능성에 대해 “상황이 허락하면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 것과 이 전 의원의 미국 자동차 횡단에 진수희 권택기 의원 등 측근들도 동행할 것으로 알려지며 그의 ‘귀국 프로젝트’가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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