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돌아간 목자 김수환 추기경

김수한 추기경 세계 최연소 추기경 서임돼 최고령으로 선종
각계 인사, 시민 너나 할 것 없이 애도 “시대의 큰 별 졌다”

한국 가톨릭계의 큰 어른이자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김수환 추기경. 낮은 자의 삶 실천한 시대의 성자인 그가 향년 87세로 지난 16일 선종(善終)했다. 격동기 한국 자유·인권 일깨운 ‘양심의 대변자’요, 윤동주 시를 애송하던 해맑은 ‘혜화동 할아버지’인 그의 흔적을 그리워하며 애도의 물결이 줄을 이었다. 87년 동안 우리 곁에 머물렀던 김수환(세례명 스테파노) 추기경은 소외된 이웃들의 정겨운 벗이자 선한 목자였고 격동기에 처한 한국 사회에서 자유와 인권,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양심의 대변자였다. 교회 안에서는 쇄신을 통한 복음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으며,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실천한 참 신앙이었다.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온 김 추기경. 그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 마지막까지 나눔의 삶을 실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천주교계의 정신적 지주인 김수환 추기경이 87세를 일기로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1969년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돼 최고령 추기경으로 선종(善終)한 것이다.

김 추기경은 지난해 7월 건강이 악화되면서 서울 반포동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해 7개월여 동안 투병 중이었으며 최근에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약해지면서 위독설이 돌았었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생명연장 장치를 거부해왔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의료진이 매일 응급 처치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올 때면 “대속(代贖·남의 죄를 대신해 당하거나 속죄함)할 일이 남아 있어 주님이 나를 살려두시나 보다”라며 삶에 초연하기도 했다.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지난 17일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명동성당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전국에서 몰려든 천주교 신자와 일반 시민 등 조문객은 이날 밤 11시까지 10만명에 이르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 않으셨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 메시지를 전했다”며 애도했다.

고인의 주치의인 강남성모병원 정인식 교수는 “추기경께서는 노환에 따른 폐렴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했다”면서 “선종 때까지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으며 임종을 지킨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2~3일전부터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며 고인의 마지막 말씀을 전했다.

김 추기경은 선종 직전 안구 등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혀 의료진이 선종 후 장기 기증을 위한 적출 수술을 시작해 이날 오후 8시쯤 수술을 마쳤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눔의 삶을 실천한 것이다. 김 추기경의 안구 기증으로 2명이 새 빛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애도했다. 특히 1970~1980년대 소용돌이의 한국 현대사에서 언제나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올곧은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 김 추기경의 생전 행보에 시민들은 교파를 떠나 안타까워했다.

직장인 최모(54)씨는 “종교인이 보여야 할 표상을 평생 온몸으로 실천한 분이셨다”고 회고했고 이모(24·여)씨는 “정진석 추기경 이전 우리나라 유일한 추기경으로서 그분은 거목 같았다. 병환에 오래 계셔서 곧 선종하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소식을 들으니 당황스러울 뿐”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홈페이지에는 추기경을 추모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이 전해지자 홈페이지 추모게시판에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 ‘이젠 정말 이 세상에서 어른을 볼 수 없게 됐다니 너무 서럽고 힘들다’ 등 추기경을 애절한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최모씨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며 “나라의 정신적 지주이고 모든 카톨릭 신자의 큰 별이셨는데….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셨으니 기뻐야 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며 안타까워했고 신모씨 역시 추모 글에서 “어린 시절 성당에서 추기경님의 액자를 보고 어머니께 누구냐고 묻자, 나와 세례명이 같다고 말씀하셔서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며 “건강은 괜찮으신지 걱정도 했었는데…. 편히 쉬시길 바란다”고 추모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17일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안구기증을 통해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희생정신이라는 큰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던지셨다”며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김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했다.

정치권, 종교계 애도 잇따라

정치권과 종교계도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큰 별이 졌다”, “따뜻한 아버지 였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모든 신앙인의 표상이며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큰 족적을 남긴 김 추기경의 영전에 온 국민과 함께 애도의 뜻을 표한다”면서 “민족사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의 등불을 밝힌 고인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면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김 추기경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때 국민과 동행한 정신적 지도자였고, 이념적 중간이 아닌 정신적 중심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추억했고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김 추기경은 우리 현대사의 큰 별이었고, 어두웠던 시절에는 빛이었고, 그분의 삶은 사랑이었다”면서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가톨릭 신자로서 만났지만 40년 이상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다”고 추기경과의 인연을 소개한 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이자 정신적 지도자가 남긴 말씀이 우리 사회가 바르게 가는 지침으로 남기를 바란다”고 애도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배태진 총무는 “김 추기경은 1960~70년대 한국 사회에 조명탄과 같은 존재”라면서 “독재의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춰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 인도하셨다”고 애도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지관 총무원장도 애도문을 통해 “한국 종교계의 큰 스승이신 김 추기경의 선종에 불교계 모든 사부대중과 함께 애도를 표한다. 스스로를 낮추며 이웃의 고통과 함께하신 김 추기경의 평생 지표가 실현되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대구에서 출생, 경북 안동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해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 경북 김천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신학·사회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1년 8개월간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1966년 44세의 김 신부가 마산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에 임명돼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을 때 택한 사목표어가 바로 그 유명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이다. 이 표어는 평생 소외받고 어두운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몸과 마음을 둔 채 어길 수 없었던 큰 나침반이었다.

19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대주교가 됐다.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을 때의 취임인사도 바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였다. ‘봉사하는 교회’, ‘역사적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원칙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로 이어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이후 핍박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곧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의 다짐대로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에 초점을 맞췄다. 민중들에 대한 관심과 부조리한 정치사회 현실을 향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아 교회 안팎에서 ‘인권 옹호자’의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 탄생이다.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2차례 역임했다.

김 추기경은 역사적 순간마다 성직자로서의 양심과 소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때문에 현대사의 고비 때마다 버팀목이었으며 한국 민주화에 있어서는 ‘큰 횃불’로 인정받는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던 인사들의 인권과, 정의를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였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서 양심의 울림과 행동을 끈질기게 이어갔던 투사였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회는 오랫동안 정치권력에게 배제 당했지만 결국 천주교회의 지위는 격상됐다.

김수환 추기경이 인권과 민주화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8년 삼도직물 사건부터다. 당시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불거진 이 사건을 놓고 추기경은 주교단 공동성명을 통해 교회가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정당함을 전격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정의 차원에서 낸 최초의 성명서로 기록된다.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정의와 인권에 개입하기 시작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과 유신헌법 선포, 긴급조치 등 독재와 부정부패가 극성일 무렵 성탄절 미사를 통해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고 나선 것은 유명하다. 당시 KBS를 통해 방송된 미사 강론에서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인가”라고 비판했으니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1971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시절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공동사목교서를 발표한 데에 이어 이듬해 ‘평화의 날’을 맞아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선포, “불의와 부정부패, 부조리, 인권탄압, 독재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80년대 들어서도 1986년 군사정권에 개헌실시를 촉구한 데 이어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를 비판,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주장했다. 그 끝에 나온 6·29선언과 대통령 직선제 실시는 결국 문민정부를 등장시킨 큰 발판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김 추기경은 또 장애인과 사형수, 철거민과 빈민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상계동과 목동의 철거민 주거지를 직접 방문했고 성탄 전야 미사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집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1987년 ‘도시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 기구로 설립해 놓았다. 그 때문에 서울대교구의 복지 시설은 200여 개로 크게 늘었다.

한국 천주교사상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서울대교구장 착좌 이듬해인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이 됐던 그는 2차례에 걸쳐 총 12년 동안 한국 주교회의 의장을 맡은 것을 비롯, 아시아주교회의 연합회(FABC)를 출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실에의 냉정한 처신을 비켜나지 않으면서도 늘 이웃집 아저씨, 할아버지 같은 살가운 정과 웃음을 달고 살았던 김 추기경. 그는 떠날 때도 정확히 알고 지킨 인물이었다. 75세가 되던 1997년 교회법 제401조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단호히 밝혔다. 교황청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사임의사를 밝힌 끝에 마침내 이듬해인 199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에서 물러났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최고의 종교 지도자였지만 스스로를 늘 부족하다고 여겼던 김 추기경. 그는 99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70평생을 회고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책을 2권 펴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다.

이들 산문집에는 “가톨릭 최고의 성직자로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고백과 “예수와 닮은 사제로서 살아오지 못했다”는 반성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웃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지 못함으로써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했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자신의 신념을 온 몸으로 실천하다 떠난 김 추기경. 그가 우리에게 남긴 업적을 돌아보면 종교 지도자를 넘어선 대한민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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