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 영웅의 탄생과 최후] 포스코 이구택 회장의 인생 파노라마

정권 바뀔 때마다 몸살 앓는 포스코, 이구택 시대 갔다
“외풍은 없었다” 퇴임의 변, 업계는 “외풍 작용했을 것”

국내 철강업계의 신화를 일궈낸 포스코 이구택 회장. 그는 포스코 전신인 포항제철의 말단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회사 최고 자리인 최고경영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런 만큼 그는 셀러리맨들에게 있어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최근 임기를 1년 남짓 남겨두고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혀, 업계는 물론이거니와 온 재계가 발칵 뒤집혔다. EH한 갑작스런 사퇴에 대해 정치적 외압에 의한 것과 실적에 따른 책임론에 의한 것이란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정작 이 회장은 이 같은 추측에 대해 일체 부인하며 ‘포스코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만 밝히고 있어 진실 여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살아있는 신화요, 영웅인 포스코 이구택 회장이 걸어온 발자취를 짚어봤다.


포스코의 이구택 회장이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지난달 15일 열린 결산 이사회에서 회장직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의표명, 외압은 없었다?

이번 사퇴의 배경에 대해 포스코는 “이 회장은 임기를 남겨두고 있지만 CEO는 임기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며, 현재와 같은 비상경영 상황에서는 새 인물이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사임을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업계는 정권의 압력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회장직에 오른 이 회장은 2007년 봄에 연임해 내년 2월까지 임기가 1년 남짓 남아 있는 상태다. 이처럼 임기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돌연 사퇴의사를 표명한 데는 정치권의 입김이 개입되지 않았느냐는 추측이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포스코 총수가 중도 하차한 선례도 이 같은 추측에 살을 더하고 있다. 포스코 김만제 전 회장이 1994년 3월부터 회장직을 맡았으나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1998년 3월 임기 만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현직에서 물러났으며, 포스코에서 잔뼈가 굵은 유상부 전 회장도 김 회장의 뒤를 이어 회장직에 올랐으나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 재선임이 유력한 가운데 돌연 사퇴한 바 있다.
이처럼 포스코는 1968년 포항제철이라는 사명의 공기업으로 출발한 후 2000년 민영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 때마다 수장이 바뀌었다.


과거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포스코의 최고경영자가 중도 하차한 세 차례의 선례와 비교, 내년 2월까지 임기가 1년 남짓 남은 이구택 회장도 이전 총수들처럼 정권 교체 시 마다 현직에서 물러나는 전례를 따르면서 정치권 개입으로 포스코 수장이 바뀌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임기가 1년이나 남아 있는 상황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돌연 사퇴의사는 납득이 힘들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초 MB정부가 출범하면서 끊임없이 사퇴설에 시달려 왔다. 특히 지난해 말 검찰이 이주성 전 국세청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포스코가 세무조사 무마 로비를 벌였다는 혐의를 잡고 수사를 벌이면서 사퇴설이 급격히 확산됐고 특정 외부인사가 차기 회장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 같이 외압 논란이 커지자 당사자인 이 회장은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지난달 15일 회장직 사퇴에 대해 “외압이나 외풍에 의한 것이 아니며 전문경영인과 사외이사제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불식시키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전한 것이다.


이구택 회장은 서울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에서 열린 기업설명회에서 회장직 사퇴에 대해 “외압이나 외풍에 의한 것이 아니며 전문경영인과 사외이사제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불식시키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밝혔다.

포항제철 말단 사원에서 최고경영자까지 ‘철강업계 신화’
쓸쓸한 뒷 그림자, 높은 벽에 차기 회장은 시작부터 ‘헉’


이 회장은 “오늘 열린 이사회에서 사퇴 의사를 밝혔고 이사회에서도 제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면서 “포스코는 오너가 있는 회사가 아니라 이사회가 경영 중심에 있는 회사인데, 전문경영인이 자신이 데려온 사외이사에게 연임시켜 달라고 부탁한다는 식의 일부 시선이 저를 괴롭혔고 이를 불식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도 CEO 자리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고 2007년부터 이런 고민을 한 바 있다”고 밝히고 “하지만 작년부터 경영환경이 나빠지면서 바로 그만두면 무책임한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 활기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퇴를 결심했다”고 소회를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흔들기에 대한 외부의 시선은 싸늘하다. 경제개혁연대는 ‘포스코 회장이 집권세력의 전리품인가’란 논평을 내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회장이 교체된다면 지배구조가 불안해지고 세계적인 철강회사로서 포스코의 브랜드 가치도 추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는 사퇴를 둘러싼 외풍 의혹과 관련해 정치권 압력설을 부인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왜 민간기업의 회장 사퇴에 청와대가 답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외풍 의혹은) 못 들어봤다”고 일축했다.

불황 파고 넘고 신화 일궈낸 철강맨

포스코 제2의 도약을 실현했던 이구택 회장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뒤 유학을 포기하고 1969년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 공채 1기로 입사해, 40년 동안 포스코에서 일한 철강 전문가다.


그가 포스코의 수장자리에 앉은 이후 매년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지난해에도 포스코는 조강 생산 3314만t, 매출액 30조6420억원, 영업이익 6조540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38%, 52% 늘어난 수치다. 생산량도 무려 20.9% 증가했다. 철강업계의 숙원이었던 파이넥스(FINEX) 공장을 세계 최초로 준공(2007년)하는 업적도 남겼다. 파이넥스는 친환경 제철 신기술이다.


이 회장은 포스코의 고속질주 뿐 아니라 포스코의 ‘고질병’이었던 부패의 사슬도 무디게 만드는 등 나무랄 데 없는 업적을 세웠다. 이를 두고 포스코 관계자는 그의 끊임없는 ‘윤리경영’ 덕분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회장은 그러나 재직 중 연임에 대해서는 단호히 잘라냈었다. “임원들은 단임 정신으로 일하라.” 2004년,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임원들을 향해 비수와 같은 일침을 날렸다. “민영화된 공기업의 임원이 순혈주의를 주장하면서 장기 재임하는 경향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임원들을 향한 경고성 발언 뿐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성격답게 “나(이구택)부터 단임정신으로 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키지도 못할 명령을 함부로 내리지 않는 이 회장도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007년 2월, 그는 재임에 성공, 다시 한번 그에게 포스코의 키를 맡아야 했다.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 게 아니라 그의 아성이 너무도 공고해 그와 ‘일합(一合)’의 싸움을 벌일 만한 적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포스트 이구택’으로 하마평에 올랐던 사람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며 손사래를 치곤했다.

포스코 앞날은?

‘포스코의 상징’이었던 이 회장의 돌연 사의 표명에 졸지에 선장을 잃은 포스코는 지금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포스코 내부는 불만으로 가득하다. 잔여임기 1년여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포스코 사상 최고 실적이 예상됨에도 “포스코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사퇴의 변을 밝힌 이 회장에 대해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끌어내렸다는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가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외국인 지분이 43%인 반면 정부 지분은 국민연금이 가진 4.3%밖에 없는 데도 정부 외압설이 제기되니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의 CEO를 이렇게 마음대로 빼고 박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포스코는 민간기업으로 특정한 지배주주 없이 전문경영인체제로 유지돼왔다. 2000년 민영화 이후 정부가 갖고 있는 주식은 단 한주도 없다. 최대주주는 16%의 지분을 가진 뉴욕멜론은행이다. 신일본제철(5%), 미국의 주식투자자 워렌 버핏(4%) 등이 주요 외국인 투자자들이다.
국내에서는 국민연금관리공단(4.3%)이 가장 많다. 정부가 이런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법적 근거는 전혀 없다. 민간기업 경영진의 진퇴는 경영실적으로 결정된다. 이 회장은 2003년 취임 이후 우수한 경영실적을 내왔으며 전문가들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철강업을 오랫동안 담당해온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이 회장이 성장전략이나 주주배당, 영업전략 등 모든 면에서 잘 끌고 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라며 “펀드매니저 등 기관 쪽에서 불안해하면서 문의가 많이 온다”고 말했다.


다음 회장이 선임되는 2월27일 주주총회에서 정식으로 물러나는 이 회장의 공식 임기는 2010년 2월2일까지다. 때문에 이 회장의 뒤를 이를 차기 회장은 취임과 함께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로 철강산업에 몰아닥친 불황의 파고를 극복하는 동시에 포스코가 민영화된 이후에도 정치외풍에 휘둘린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하고 대외신인도를 회복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았다.


내부 불만을 불식시켜야 하는 책임도 안게 됐다. 하지만 세계적인 경기위축으로 현재 경영여건은 녹록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포스코는 최근 철강 수요 감소와 원자재값 인상 등에 따른 실적 악화를 염두에 두고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동안 교체설이 끊이지 않았던 수장 교체가 현실화하자 포스코 내부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정계에서는 이 회장이 재임 기간에 밑으로부터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회사를 운영하는 시스템 경영 구도를 정착시켜놨기 때문에 이 회장이 사퇴하더라도 경영 목표를 달성하는 행보에 큰 걸림돌은 없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새 회장이 지난 2003년 포스코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끊임없는 혁신을 강조하며 포스코의 기업가치를 한 단계 상승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 회장의 높은 벽에도 도전할 수 있을지, 지난해 창립 40주년 행사에서 중장기 목표로 내세운 10년 후인 2018년 매출 100조원 달성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우려섞인 시선이 포스코를 향하고 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