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국회의장

정치권이 쟁점 법안을 두고 다시 난맥에 빠졌다. 이번 국회가 2008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회기에서 사상 초유로 기록될 만한 점거와 기물 파손, 유혈 사태 등이 벌어지면서 세밑, 민심엔 근심과 불안을 던지고 있다. 이렇듯 국회파행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곳의 중심에 서서 향후 정상화를 위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김형오 국회의장이다. 한나라당 출신으로 6선인 그는 당내에서도 알려진 합리주의자로 여당 출신으로 야당을 배려할 줄 아는 인사로 통한다. 그 때문인지 파행이 거듭될 때마다 소위 ‘중재자’로 나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린 바 있다. 국회 파행이 가속화되는 마당에 그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과연 그가 이번 사태를 극복하고 국회를 정상화 시킬 수 있을지 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임시국회 쟁점법안 처리 둘러싼 여야간 극한대치 ‘파행국회’
‘합리주의자’ 김형오 국회의장 여·야 ‘중재자’로 골머리 앓아
부산서 발표한 ‘중재안’에 한나라당, 민주당 모두 절래 절래
한나라 “참으로 실망스럽다”, 민주당 “한나라당 입장만 대변”


정국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게 됐다. 임시국회 쟁점법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간 극한대치가 심화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김형오 국회의장은 지난해 12월29일 중재에 나섰다. 여야가 합의하는 민생법안을 31일 본회의에서 우선 처리하고, 여야 사이에 이견이 큰 쟁점법안은 1월8일 정기국회 회기 말까지 처리하는 내용의 중재안을 제시한 것이다.

여야 ‘김형오 중재안’ 외면

김 의장은 이날 부산 롯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야 3당이 민생법안 처리에 이견이 없으므로 31일 본회의를 열어 합의된 민생법안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이어 “내일(30일) 이후 국회 회의장과 사무실이 점거·파괴되지 않도록 엄정조치를 취하겠다”면서 “대화와 합의가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 직권상정 문제를 포함해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거부 방침을 밝혀 법안처리를 둘러싼 여야간 대치는 가속되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여야 합의된 민생 관련 법안은 불과 몇 개 되지 않는데, 그것을 위해 본회의를 열어 처리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참으로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의장이 직권발동을 하겠다니 뜻을 받들겠다”며 본회의장 질서회복 방침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는 “(중재안은) 직권상정 프로세스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김 의장이 결국 민주당의 본회의장 점거를 강제해산한 뒤 임시국회 중에 직권상정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란 판단이다. 당연히 민주당은 본회의장 점거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조정식 원내대변인은 “직권상정 불가 약속 요구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 없이 한나라당의 입장만 대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국회를 더 막히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노동당 박승흡 대변인은 “중립을 표방한 정부·여당 편들기”라고 평가했다.
파국을 막기 위해 29일에 이어 30일에도 여야 3당 원내대표들이 만났다. 그러나 별 소득이 없었다.
여야 협상이 결렬된 이유는 방송법 등 미디어 관련법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금산분리 완화 등 3대 법안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은 전날 사이버모욕죄 관련 법안과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사회개혁법안 13건을 내년에 여야 합의를 통해 처리할 수 있다는 양보안을 내놓은데 이어 이날 회담에서는 방송법 등 언론 관련법안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등 2개 쟁점 안건도 2월 여야의 협의를 거쳐 처리할 수 있다고 한걸음 더 물러섰다.

하지만 민주당은 2개 쟁점 안건도 새 해에 여야 합의를 통해 처리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민주당은 이전부터 방송법을 저지법안 1순위로 올려놓고 있었고 이날 협상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대기업과 신문사가 방송을 소유하면 언론 환경이 보수세력에게 유리하게 조성돼 한나라당의 장기 집권이 가능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방송·통신 융합 등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대기업과 신문사의 방송사 신규 진입으로 미디어와 콘텐츠산업이 전반적으로 발전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미 FTA 비준안에 대한 견해에도 간극이 컸다. 한나라당은 버럭 오바마 정부 출범으로 재협상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국익을 위해서는 미국보다 먼저 비준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래야만 재협상을 하더라도 명분이 있기 때문에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 ‘선대책, 후비준’을 요구했다. 미국 차기 행정부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18일 한나라당의 한미FTA 비준안 단독 상정 과정에서 여야가 한판 전쟁을 벌이면서 양측의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져 있어 이날 협상에서도 비준안에 대한 의견 접근이 쉽지 않았다.
금산분리 완화와 관련해서도 의견 차이가 뚜렷했다. 한나라당은 은행자본 확충으로 중소기업 등에 대출 여력이 확대돼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지만 민주당은 재벌의 은행 소유가 가능해져 사금고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반대했다.

金 ‘실력행사’ 고민은 여전

결국 주요 쟁점법안 처리에 대한 합의를 시도하기 위해 개최된 여·야 원내대표 회담이 최종 결렬된 상황에서 김형오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해 연말 국회는 파국을 맞게 됐다.
김 의장의 이 같은 ‘실력 행사’는 무엇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압력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웠던 때문으로 풀이된다. 다만 경위들을 동원해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는 경호권이 아닌 회의장 통로 확보 수준의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배경엔 다른 의도도 읽힌다. 일단 ‘질서’를 회복한 뒤 대화 해결을 시도함으로써 강제력 동원의 명분을 얻고, 본회의장 ‘원상 회복’은 한나라당 몫으로 넘기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국회 질서 회복은 국회의장 몫”이라며 몸싸움을 거부하고 있어 경호권 발동은 시간문제라는 관측이 크다. 이 경우 김 의장은 한나라당이 연내 ‘강행처리’를 천명한 85개 법안 중 논란이 된 사회질서법안과 미디어 관련 법안을 제외한 60여 개 선에서 ‘선별 직권상정’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한나라당은 질서유지권 발동 직후 본회의장 맞은편 예결위 회의장에서 긴급 심야 의원총회를 갖고 심야까지 ‘비상대기’했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의총에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 폭력을 제거하는 최소한의 힘의 행사는 불가피하다”면서 의원·당직자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의총 직전 기자간담회에선 “질서유지권 발동으로 본회의장이 비면 한나라당 의원들이 들어갈 것”이라고 ‘본회의장 탈환’ 의지도 피력했다.
민주당은 본회의장 출입문들을 모두 쇠사슬로 감고, 의자 등으로 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쌓으면서 강제해산에 대비했다. 본회의장의 의원들은 ‘인간 사슬’용 장비를 착용했다. 400여 명의 당직자들이 국회 본청으로 집결, 본회의장 문 앞에서 겹겹이 인간 바리케이드도 쌓았다.
원혜영 원내대표의 “싸웁시다. 지킵시다”라는 독려에 박수와 함성도 터졌다. 그동안 국회 정무위원회 회의장을 점거·농성 중이던 민주노동당 의원들도 이날 오후 본회의장으로 이동, 합류했다.
이렇듯 국회가 초긴장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김형오 의장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인간사슬을 만들어 본회의장을 사수하려는 민주당과 국회 경위들이 충돌할 경우 부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상태여서 뒤로 물러서기도 어려운 상황인 점, 비난 여론이 의장에게 쏠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도 김 의장에겐 부담이다.
또한 국회 경위와 방호원을 총 동원한다고해도 160명 남짓에 불과해 200여 명의 민주당과 민노당 의원 및 당직자들이 지키고 있는 본회의장을 접수하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도 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의원과 당직자들에게 오전 10시 의총 참석 시 노-타이 차림을 요청해놓은 상태여서 경위들과 함께 본회의장 진입을 시도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김 의장 중재 재시도

그러나 김형오 국회의장이 31일 다시 여야 대화를 제안하고 나섰다. 전날 여야 교섭단체 대표회담 결렬에 따라 파국으로 치닫는 연말 임시국회 해법 찾기를 위해 마지막으로 팔을 걷어붙인 셈이다.
전격적인 질서유지권 발동으로 본인이 지난 29일 기자회견에서 처리 시한으로 못 박은 이날 본회의 강행 가능성을 시사, 긴장을 한층 고조시켰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분위기다.
이를 두고 주변에선 “야당에 마지막 기회를 주자는 의미”라며 “만약 이번 대화 시도마저 결렬된다면 그때는 이미 밝힌 대로 직권상정 수순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김 의장이 다시 대화를 제안한 이유는 무엇보다 협상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판단에서다.
전 날 밤까지 이어진 3개 교섭단체 대표 회담이 미디어관련법 처리시기를 놓고 막판 이견을 좁히지 못해 결렬된 만큼, 교섭단체 대표 및 원내대표와 국회의장단까지 모여 다시 머리를 맞대면 최종 절충이 가능할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게다가 민주당이 ‘인간 사슬’까지 각오하며 본회의장 점거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당장 경호권 발동을 통해 법안 처리를 강행하기엔 아직 무리가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한 측근은 “본인이 성명에서 밝힌 대로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인 다음달 8일까지 꼭 필요한 법안들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다만 마지막으로 여야 대화를 다시 제안하고, 거기서도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직권상정도 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측근은 또 “어차피 협상이 거의 다 됐다가 결렬된 것 아니냐. 그것을 그냥 버리고 충돌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국민 보기에도 우습다”면서 “미디어법 처리와 관련한 이견만 남은 것으로 아는데 의장이 나름의 중재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여야 막판협상 ‘불발’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김형오 국회의장이 31일 오후 2시에 개최할 것을 제안했던 각 정당 대표 및 원내대표와 국회의장단 긴급회담은 회담 형식과 장소를 둘러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이견으로 공식 무산됐다.
이에 대해 의장실 관계자는 “민주당이 원내대표단의 회담 배제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하고 있고, 회담 장소인 의장 집무실도 불법점거를 계속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면서 “한나라당과 선진당도 적절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아 회담은 무산됐다”고 밝혔다.
앞서 한나라당은 긴급최고위원회의를 갖고 김 의장의 제안에 대해 민주당이 이날 낮 12시까지 국회의장실 점거를 풀 경우 여야 9인 회담에 참여하는 방안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했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의장실 점거가 계속되자 한나라당은 회담 불참 쪽으로 최종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민주당은 ‘원내대표들을 제외한 회담’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었지만, 이에 대한 국회의장측의 답변이 나오지 않자 회담 불참을 결정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지금 시점에서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며 회담 거부 입장을 밝혔다. 다만 여야 정당 대표들은 연쇄적으로 개별 접촉을 갖고 국회정상화를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이와 함께 여야 9인 회담이 무산, 여야간 대화 가능성이 낮아짐에 따라 국회 본회의 개최 여부가 주목된다. 의장실 관계자는 “현재로서 오늘 중 본회의가 열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일단 상황을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로선 여야의 입장이 단호한 상황이어서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는 얼마 전 한나라당 의원들이 단독으로 처리한 외교통상위의 ‘한미 FTA 비준’과 관련, 강한 적대감마저 드러내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도 종전의 강경 이미지를 집중 부각하며 야당과의 대화는 있을 수 없다는 의지를 재차 밝혀 왔다. 더욱 홍 원내대표는 다수당의 우위를 내세워 김 의장의 직권 상정을 주문하는 한편 쟁점 법안에 대한 통과에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입장이다.
따라서 언론과 세간의 관심은 자연스레 김 의장에게 쏠리고 있다. 이는 그의 의사봉이 어느 방향을 가리킬 것이냐는 현 정국은 말할 것도 없이 향후 정국에 미쳐지는 파장을 감안할 때 파괴력이 크다는 관측에 따른 것이다. 당장의 현안과 아울러 역시 개원 2년 차로 접어드는 정치지형에 중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에 대해 의장실을 점거 당한 김형오 의장의 말은 다시 한번 정국의 향배에 안개를 드리운다. 김 의장은 최근 사태들과 관련 “이번 사태의 우선 책임은 국회를 이끌어 가는 한나라당에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쟁점법안을 사이에 둔 여야의 갈등이 정면 대치와 폭력 사태까지 빚으며 확대일로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그의 중재력이 다시 한 번 효과를 발휘해 국회가 정상화 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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